격렬한 역사의 과정을 겪은 나라일수록 문화예술 작품들이 뛰어난 건 각 개개인들의 에피소드가 차고 넘칠 만큼 풍부하기 때문이다. 근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어두운 역사를 겪은 사람들에겐 선악의 구분 선이 다소 얇을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 배신도 했고 한때 지나친 욕망과 오만으로 과도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자기 눈 앞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 탓, 비난을 하기에 정신이 없지만 예술, 특히 영화는 적어도 자기 반성 없는 비판은 하지 않는다. 영화가 종종 매우 중층적인 주제의식으로 선악이 모호한 결론을 내는 이유이다. 세상의 진실은 절대적일 수 없고 상대적이라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세상에서 유일한 진리는 변하지 않는 진리란 없다는 것이다라는 명제조차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그렇지 못하다. 자신 아들에게 학교폭력의 전력이 있음에도 모든 자식은 그 부모의 거울이라며 특정 개인을 향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근데 그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다. 자신의 자녀 역시 유학을 보내기 위해 이런저런 스펙 쌓기를 막대한 돈을 들여 ‘인공적으로’ 만들어 냈다는 의혹이 큰 상황임에도 오히려 특정 집안의 교육 방식을 범죄로 몰아 끝내 그 자녀의 모든 학위를 취소시키게 했다. 그러면서 그들을 범인으로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아직도 그들을 감옥에 보내겠다고 벼른다. 근데 그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많은 사람들은 진작부터 그 사안이 지닌 ‘상대적’ 진실을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닿으면 지지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요즘 한 비례정당의 돌풍은 상대적 진실이 절대적 진실보다 늘 더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다. 언젠가 이 모든 소동, 만신창이 진흙탕 싸움은 모두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는 칠레 영화 ‘공작(Duke, 公爵)’을 보면 진정한 사회적 복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칠레의 현재를 배경으로 세기의 학살자이자 독재자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아직 살아 있으며, 그의 나이는 250살인데, 그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닌 드라큘라, 곧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피노체는 그가 평소 즐겨 입던 화려한 장군 복장과 큰 칼을 차고 사람들의 심장을 파서 피를 마시며 다닌다. 사람들, 민중들의 피를 빨아 먹는 것, 국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은 학정 때인 옛날이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공작’은 흑백영화로 화면이 주는 아우라(aura)는 매우 어둡지만 기이한 통쾌감을 준다. 칠레의 영화감독 파블로 라라인과 칠레의 관객, 칠레의 비극을 지켜봐 왔던 세계인들은 천수를 누리다 죽은 피노체트의 가슴에 이제야 비로서 십자가로 된 대못을 박는 심정이었다. 1973년 피노체트가 탱크를 몰고가 민선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아엔데를 기관총으로 난사해 죽이고 정권을 찬탈했을 때도 프랑스는 바로 2년 후인 1975년 ‘산티아고에 비는 내린다’란 영화로 피를 토하듯 피노체트에게 분노를 표시했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영화는 피노체트에게 복수와 분노, 회개와 반성, 사과를 요구하는 채찍을 휘두를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정치인들이여 좀 더 예민하고 냉정해질지니. 모든 것이 기록에 남겨지고 있을 터이고 당신의 이름, 당신의 행동 하나 하나가 역사영화에 등장하게 될 것이로다. 후손에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되라.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유치원 때 배운 것이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가 조직개편을 통해 그동안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구급대를 사실상 폐지해 논란이 일고 있다. 경기신문 취재에 따르면 최근 도소방재난본부는 그동안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구급대를 일반 119안전센터에 편입시켰다. 시대변화에 따른 적절한 조직개편으로 호평을 받아왔던 경기도소방재난본부가 단행한 만큼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나오는 ‘혼선’ 우려에 대해 충분한 설득과 소통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기존 도소방재난본부 구급대는 각 119안전센터 내에서 화재진압대원인 소방관 등과 함께 근무했으나 119안전센터장이 아닌 구급대장의 별도 지시를 받아왔다. 그러나 본부가 이번에 이러한 독립적 지휘 체계를 폐지하고 119안전센터장이 구급대원을 지휘하도록 변경해 구급 현장에 혼선이 발생할 것이라는 지..
잘 우려낸 녹차 한잔을 마시고 책상 앞에 앉는다. 글을 써 무슨 의미를 찾겠다는 것인가! 나이 먹음에 싱숭생숭 해지는 고갯마루가 있다. 아마 그때가 나이 든다고 느끼는 순간일 것이다. 나이 듦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누구는 쭈굴쭈굴해진 피부, 누구에게는 평온해지는 얼굴, 또 누구는 건망증, 누구는 지혜로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 듦을 반가워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마음이 풀기 가신 풀잎처럼 버석대던 그날, 두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다음은 커피 집이다. 평화동의 어느 외국인 체인점이 좋다고 들렀다. 몸이 국내산이어서 그런지 커피는 위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들과 같이 커피를 시켜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2층에서 마시다 1층의 주문매장으로 갔다. 혹 종이컵 있으면 하나만? 하니, 한마디로 없단다. 유리잔이라도 좀 빌려주면- 하니 ‘안 됩니다.’이다. 물을 한 컵 먹을 수 있느냐? 고 하니, 그 또한 안 된단다. 아르바이트 학생 같은 그녀는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결국 천 삼백 원을 주고 물 한 병을 사들고 서양 독재자본가 앞에 동냥하는 꼴이 된 심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 순간 내 입에서는 나도 몰래 ‘이 나이에 이런 인간대접을 받으며 와야 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말이 튀어나왔다. 한 친구가 영화 감상을 제안해 영화상영관으로 갔다. 액운은 겹쳤다. 두 사람은 주민등록증이 있는데 한 사람이 없어서 경로우대가 안 된단다. 평화동 인심은 아니구나. 사람의 나이야 얼굴의 주름과 머리와 외모에 나타나는 것인데 현미경을 들이대야 하고 국가가 증명하는 ‘증’만이 통한다니! 나보다 다른 친구가 먼저 돌아서서 나오고 말았다. 운전하는 친구의 의사에 따라 둘이 중앙동 M영화관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나를 알아보고 말하지 않아도 경로우대로 표를 주면서 3층 4관으로 가시어 편한 곳에서 보라는 친절함이었다. 한 고장에서도 사람 사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 하면서 친구와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영화가 끝난 뒤 친구와 좋은 기분으로 헤어졌다. 이왕지사 나는 팔꿈치가 아파서 한의원을 들렀다. 찜질도 하고 침도 맞고 계산을 하는데 원장이 웃으며 아프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간호사 손길이 어머니 손 같았다.’고 했다.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사람 사는 곳이 이렇게 웃으며 일할 수 있고 인간답게 대해준다면- 싶었다. 그날 저녁 TV에서는 공부 많이 한 의사들이 그들 심기를 건드렸다고 아픈 사람들을 외면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한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평화와 행복한 삶을 우선으로 해야 할 정부는 ‘법대로’를 밝히며 법에만 의존하겠다는 뜻이었다. 자세히 알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나라에서 어디 기댈 데도 없이 북쪽으로는 핵무장을 한 위험한 반도의 반이 있지 않은가. 계절은 봄이다. 산에는 찔레나무 움이 참새 부리 같이 돋아 초록빛으로 벌고, 강물은 봄 햇살을 머금고 반짝인다. 생각을 가다듬으면 가장 외로운 나라에서 나도 외롭게 평생의 고독을 견뎌왔다. 그리하여 가슴속 슬픔의 정조(情調)를 지니고 사는 사람이다. 누가 잘나고 못나고 할 것도 없다. 누군가는 인간을 털 없는 원숭이에 비하기도 했다. 봄과 함께 모든 국민들께서 유머가 넘치는 가운데 사랑하며 살아가는 분위기였으면 좋겠다.
정치 계절, 요즘 자주 듣는 말 재승덕박(才勝德薄), ‘재주는 많은데 덕은 부족하다’는 뜻이다. 전엔 꾸중이었다. 어른의 저 말씀은 무서웠다. 인격포기의 (최종적) 판단이었던 것이다. 요즘은 다른가. ‘사람이, 깊이가 있어야지...’ 하는, 부정적 평가임은 여전하다. 가령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의당 ‘덕이 부족한’ 이는 아웃이다. 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깊이는 좀 부족해도, 재주는 뛰어나니 그나마 써먹을 구석이 있겠지’하는 기분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다. 토사구팽(兔死狗烹)의 요즘 말뜻도 짐작되는 분위기다. 부끄러움 모르는 사람들이 나란히 윗줄에서 요란 떠는 세상, 재주 있어서 인기만 높으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하랴. 재주가 힘(권력 또는 주먹)도 갖췄다면, 이는 진짜 잘나가는 것일까? 우기면, 거짓말도 억지도 진실처럼 언론에 나가는 걸 보면, 세상은 어디로 흐를까? 아서라, 애들 볼라. 다음 시기에 저런 이들 얼마나 꼴사나운 비난의 대상되어 세상을 웃길까? 재승덕박의 원래 말 재승덕(才勝德), 재주(才)가 덕성(德)을 이긴다(勝)면, 막말로 막가는 세상이다. 하릴없이 골로 가리라. 다만 시간의 문제다. 백 살쯤 살면 철들었을 테니 알겠지. 말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고로 주술(呪術)의 뜻 담겼다. ‘말(言)이면 다 말이냐, 말 같아야 말 아니냐’하는 푸념은, 실은 그 주술의 반영이자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는 호통이다. 그런 사람들 언행(言行)은 과연 재주는 있어 보인다. 덕은 없겠다는 말이다. 그 재주의 힘(대개는 검찰 경찰 같은 권력을 지닌)과 경험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자신만만하다. 상대방 또는 세상 상당수는 침묵한다. 그러나 대다수는 (침묵파도) 묵언(默言)일 터이지만, 마음에 품는다. 회포(懷抱)는 정(情)만 품는 것이 아니다. 한(限)도 새긴다. 사람에 대한 (이런) 판단 또한 지워지지 않는다. “저 친구, 저렇게 컸나보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 저 생각은 하늘의 판결이다. 여태 보지 않았던가. 이 말에 ‘나 아니겠지,’ 하는 이들, 천벌 받을 준비 단단히 하라. 착한 민심 천심을 이길 도술이나 변론(辯論)은 없다.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는 천둥일 터다. 상형문자(象形文字)는 그림으로 만든 글자다. 그 그림에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시대가 담겼다. 德은 뭘 담았지? 열 길 물속보다 깊은 한 길 사람 (가슴)속이, 德이 담기는 그릇이다. 선악(善惡) 미추(美醜) 진가(眞假) 따위 이분법의 구별을 넘어서는, 동양의 최고 이념이다. 서양(철학)으로 치자면 플라톤의 이데아(idea)와도 비교되리라. 너무 쉬워서 혹 실감하기 어려울까? 한 곳만 바라보는 (정직한) 눈(直 직)과 마음(心 심)이 큰길 네거리(行 행) 한 가운데 놓인 것이 德이다. 갑골문(의 그림)은 더 직설적이다. 直은 눈(目 목)에 (직진)방향표시가 붙었다. 心은 심장(하트)이다. 합쳐서 悳(덕)이다. 정직하게 살되, 바탕은 ‘마음’이라야 한단다. 그 뜻만으로도 좋다. 그러나 한 계단 더 오르자. 그 悳을 3,000년쯤 전의 네거리(行) 한 가운데 놓는다. 德이다. 行의 오른쪽은 생략됐다. 회오리 같은 중생의 삶들 속이나 시장 바닥에서도 낙낙히 통하는 어진 방식이라야, 덕(스러운 것)이다. 칼자루 먼지떨이 쥐고서 진실타령 독점하면, 자칫 적반하장 빚으리. 그대를 털면 먼지 안 날까? 사람을 보라. 사람이 하늘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공직선거가 시작되던 때부터 후보자의 선거운동방법 중 대표적인 것으로 후보자합동연설회가 있었다. 중장년층 이상 세대는 아버지를 따라 혹은 자발적으로 후보자연설을 듣기 위해 학교 운동장으로 갔던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후보자합동연설회는 후보자의 연설을 현장에서 생생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후보자와 주민과의 직접적인 만남의 장이 형성되다 보니 부작용도 꽤 있었다. 경쟁 정당 또는 후보자 간의 기 싸움으로 인한 물리적 충돌, 주민들을 상대로 금품이나 음식물 제공 등 매표행위가 이뤄지는 위법 장소가 되기도 했다. TV 등 미디어 매체의 보급률이 높아지고 바쁜 일상이 생활화된 시대변화에 따라 지금은 후보자합동연설회의 역할을 각급 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관하는 후보자토론회가 대신하게..
대규모 전세사기 범죄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의미 있는 제도로 기대되던 ‘악성 임대인 명단 공개’가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악성 임대인 명단 공개가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명단 공개가 전세사기 피해를 줄이는데 실질적인 성과를 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실효성을 높일 방안이 재구축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사기 피해 위험성은 여전한데 ‘빛 좋은 개살구’가 무슨 소용이냐는 불만이다. 경기신문 취재에 따르면,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지난해 3월 개정된 민간임대주택특별법·주택도시기금법에 따라 지난해 12월 말 악성 임대인 명단을 최초로 공개했다. 해당 명단은 국토교통부의 ‘HUG 안심전세포털’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공개 약 3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해당 명단에서는 고작 24..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마트료시카는 당당해“는 필자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오늘은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에서 사소한 발견을 해 보자. 한때 나는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그 나라의 민속 인형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디자인대학에서 강의를 했을 때 교환학생으로 온 모스크바 출판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우리 집에 방문하여 모아놓은 세계 인형들을 보고 재미있어 했다. 그중 한 학생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마트료시카는 다산과 다복, 부유함과 행운을 가져오는 인형으로 알려져 있다. 마트료시카는 큰 인형 속에 더 작은 인형이, 그 속에는 더 작은 인형이 들어 있어서 모두 꺼내면 여러 개의 인형들을 점점 작은 크기로 줄을 세울 수 있다. 아주 단순하지만 인형들을 꺼내어 줄세우는 것은 심심할 때 나에게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현대인의 정신적 불안 이 단순한 놀이를 반복하다보니 이 인형에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을 연상하게 되었다. 가장 바깥의 나는 겉으로는 아무일 없다는 듯이 살고있지만 내 속에는 또다른 내가 상처받고 절망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어서 내 속의 나를 만나기 두려워하고 부정하고 싶어한다. 또는 현재의 나는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하지만 내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나는 맑고 밝고 건강하여 내 속의 나를 만나는 것이 현재의 나를 치유하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맨몸으로 태어나서 아주 약하고 작은 나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월의 옷을 한 겹씩 끼어입으면서 점점 자라고 늙어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어린 나를 발견하지 못하다가 큰 일을 겪고나면 자신의 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 안에 있는 나를 사랑하라 그 아이를 발견하고 따뜻이 품어주면 깨닫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더 작고 여린 나를 잃지 않고 품어가는 것임을. 따뜻하게 품고 있다가 어느 날, / 순하고 어린 아기였던 내 웃음이 필요할 때, / 마지막 잎새에 눈물짓는 열세 살의 눈빛이 필요할 때, / 당차게 도전하던 스무 살의 심장이 필요할 때, / 어려움에도 벌떡 일어나는 서른 살의 의지가 필요할 때, / 함께 웃고 울며 타인을 품에 안을 줄 아는 마흔 살의 아량이 필요할 때, / 기꺼이 그때의 나를 꺼내 지금의 나에게 보여주며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 바로 그것이였다. 어느 시절이든 후회도 있고 상처도 있었지만 최선의 삶이었고 진심이었던 것은 조금 더 큰 내가 더 어린 나의 그 추억과 기억을 아름답게 보호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내 속의 나를 지금도 나 몰라라 하면 어떤 내가 어떤 아픔으로 웅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내 속의 수많은 나들을 꺼내어 보듬어주면 예전의 상처는 싸매지면서 추억으로 남고, 예전의 자랑은 나를 세우는 자존감으로 남는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나의 현재 뿐만 아니라 나의 과거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그때 나의 미래가 나의 현재를 책임져 줄 것이다. 마트료시카에서 찾은 내 속의 수많은 나의 발견은 비록 사소하지만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내 속의 모든 나들이 나를 사랑하고 축복하면 험한 세상 속에서도 나는 좀더 당당해지지 않을까?
의료대란의 해결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처음에는 부족한 지역의료, 필수의료, 공공의료 인력의 확대를 위한 정부 정책에 의료계가 반대를 하는 모습에 공분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며 의대의 교육 현실이나 의료 현장의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2천 명 증원을 무슨 특수부 수사하듯 그림을 그려놓고 권력의 칼을 휘두르는 듯한 정부의 모습에 공분을 느끼고 있다. 대도시의 종합병원 전공의들이 빠진 자리를 공중보건의 수백 명을 차출해서 채우려 한다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농산어촌 의료공백이 더욱 커질 것은 명약관화다. 의료계와 정부 양측 다 공익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데 정작 가장 큰 명분 중 하나였던 지역의료의 공백은 더욱 커지게 됐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꼴이다. 그래서 제안한다. 공중보건의가 차출돼 생긴 의료공백을 전공의들이 의료 농활로 채울 것을 제안한다. 의료대란 와중에 열렸던 서울대 의대 졸업식에서 김정은 학장의 졸업 축사는 사회에 울림을 줬다. “여러분은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회에 숨어 있는 많은 혜택을 받고 이 자리 서 있다. 지금 의료계는 국민들에게 따가운 질책 받고 있다. 사회적으로 의사가 숭고한 직업이 되려면 경제적 수준이 높은 직업이 아닌 사회적 책무를 수행하는 직업이어야 한다” 이 축사는 비단 서울대 의대생에게만 해당하는 말도 아니고 의료계에만 해당하는 말도 아니다. 우리나라가 도시화, 중앙집권화, 산업화로 압축성장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농산어촌의 희생이 있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지방소멸 위기고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과잉 경쟁과 저출생의 위기다. 이 파국적 패러다임에 의료계도 역시 포함돼 있다. 나는 적지 않은 의대생들이 김정은 학장의 축사에 공감할 것이라고 믿는다. 잠잘 시간도 없이 의료 현장을 지켰던 전공의들 입장에서는 억울함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전공의 의료 농활을 제안하다. 전공의들이 의료인으로서 진정한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길 바란다. 지금의 전공의 사직이 개인의 영리를 위한 것만은 아님을 항변하고 싶다면 지금 실천이 필요할 때다. 전공의들의 파업으로 전공의가 없으면 가동을 멈추는 비정상적인 종합병원의 상황을 국민들은 알게됐다. 이제 의료 농활을 통해서 의료취약지역의 보험수가를 높여주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을 만드는 계기를 만들면 좋겠다. 잘못된 의료전달시스템에 경종을 울리고, 스스로도 지역의료 현장의 문제를 파악하며 의료인으로서 다시 마음을 되새기는 계기도 될 것이다. 의료계의 반대로 추진이 안된다고 알려진 전 국민 주치의 제도나 원격진료에 대해서도 열악한 촌의 관점에서 그 필요성을 파악하는 계기를 삼으면 좋겠다. 초고령화 시대, 4차 산업혁명으로 변화될 시대의 의료 주역은 바로 지금의 전공의들이다. 누가 뭐래도 전공의들은 대한민국 의료계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들이다. 머지않은 미래 본인들의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위한 주체적인 준비를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못난, 못된 기성세대들이 벌이고 있는 아수라장에 젊은 의료인들이 함께 어울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어느 세대보다도 ‘공정’에 예민한 세대로 알고 있다. 밑돌(촌의 공중보건의) 빼서 윗돌(대도시 대학병원 전공의) 고였으니 이제 윗돌이 밑돌 역할을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는가.
최중증 발달장애인 가정은 심각한 경제적, 심리적 위기 상황 상황에 처해있다. 급기야는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고 스스로도 목숨을 끊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수년간 언론에 보도된 사례만 해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최근 국민들에게 충격을 준 대표적인 참사는 지난 2월 2일 서울시에 거주하는 한 아버지가 10살 뇌병변·발달 중복 장애를 가진 자녀를 숨지게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경기도에서도 이런 비극이 잇따라 발생했다. 2022년 3월 수원에서 40대 여성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발달장애인 8살 아들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같은 날 시흥에서도 말기 갑상선암으로 투병 중인 50대 여성이 "딸이 나중에 좋은 집에 환생하면 좋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긴 뒤 발달장애인 20대 딸을 살해하고,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인터넷 장애인신문 에이블뉴스는 지난 1월 1급 자폐성장애인 아들을 38년째 돌보고 있는 70대 지체장애인 권유상 씨의 “대통령님, 발달장애인과 부모들 제발 좀 살려주세요”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권씨는 “대한민국에서 장애인과 장애인 부모로 산다는 건 지옥보다 더 극심한 고통이라는 건, 이미 발달장애인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거나 동반자살한 사건에서 증명되고 있다.”면서 “장애인 자녀 양육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고, 자녀와 부모가 희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며 육신이 서서히 죽어가는 발달장애인과 부모들을 대통령님께서 살려 주실 것을 간곡히 청원”했다. 이것이 중증 발달장애인 가족이 겪는 현실이다. 이는 지난 1월 경기도가 발표한 최중증 발달장애인 24시간 돌봄 실태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경기도는 도내 최중증 발달장애인 1500명을 대상으로 돌봄 실태조사를 실시했는데 최중증 발달장애인 보호자의 정신적 건강은 ‘심한 수준의 우울감’이 41.0%(580명)나 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최중증 발달장애인 보호자 25.9%(366명)가 지난 1년 동안 ‘죽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31명은 실제 극단적 선택 관련 시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응답자의 73.6%가 공적 돌봄서비스에 불만을 표시했다. 공적 돌봄서비스 시간이 부족하다고 답변했다. 이에 경기도가 4월부터 최중증 발달장애인 맞춤돌봄 사업과 가족돌봄 사업을 시작한다. 최중증 발달장애인 맞춤돌봄 사업과 가족돌봄 사업은 경기도에서 실시하는 360도 돌봄 중 하나다. 맞춤돌봄은 도전적 행동이 심한 경우나 2개 이상의 중복 장애가 있거나 혹은 일상생활이나 의사소통, 행동 중 2개 이상 기능이 제한된 사람이 대상이며, 가족돌봄 사업은 복지혜택에서 배제되고 돌봄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가구가 대상이다. 도는 맞춤돌봄 사업 대상자 60명, 가족돌봄 사업 대상자 210가구를 모집한다. 공적으로 돌봐야 할 위기상황에 놓인 최중증 발달장애인과 보호자가 어디 이들 뿐이랴.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돌봄의 울타리 안에 들어 올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정부가 예산을 늘리고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발달장애인의 완전한 통합사회’가 실현될 수 있도록 보다 더 전문성 있는 돌봄을 제공하고, 가족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몇 년전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저린 통증이 있었다. 병원에 가면 진단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한 진단이 없기에 아무리 좋은 약을 처방해도 낫지 않는다. 의사도 머리를 갸우뚱했다. 분명히 수치는 내려갔으나 통증은 멈추지 않는다. 다른 원인이 있겠다 싶어 과를 옮기며 진료 받았다. 검사에 CT, MRI, 초음파 등 첨단 장비가 동원되었다. 의사는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를 받도록 했다. 병원 갈때마다 처방받은 약이 수북히 쌓였다. 약이 싫어질 쯤 심리적인 것이 몸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오랫동안 의사의 진단과 처방에 의존했다. 남쪽에서는 최첨단 기계로 검사 하기 때문에 오진이 있을까 싶다. 웬만한 병은 빠르게 진단할 수 있다. 다행히 진단명을 알면 덜 고생하게 된다. 그러나 진단명이 나오지 않으면 여러 과를 팽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