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놀랍게도, 영화는 종종, 시대의 변화를 예측한다. 세상에 대한 예지 능력을 선보인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광야를 떠돈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자산어보’는 한국사회가 다시 개혁의 시대에서 수구 반동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점친다. 영화감독들은 시대를 따지기 위해 흔히 과거로 날아가곤 하는데 이준익의 타임머신이 이번에 착지한 곳은 순조 1년, 곧 1801년이다. 정순대비(영조의 계비. 조선시대 중기는 영조-사도세자-정조-순조로 이어진다)가 어린 순조를 섭정했던 이때에는 선대(先代)인 정조가 이뤄 놨던 수많은 개화(開化)의 전조(前兆)들이 짓밟히던 때였다. 왕권을 뒤에서 쥐고 조종하던 정순대비의 세력들, 곧 노론들은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일종의 쇄국(鎖國)을 내세운다. 곧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통제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천주교는 사학(邪學)이라 주장하는데 조선 이데올로기의 근간을 이뤘던 주자학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대적인 탄압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서 수백명의 사람들이 투옥되고 참수된다. 닭띠 해인 신유년에 벌어진 일이라 해서 이른바 신유박해(辛酉迫害)라 부르는 참사다. 이후 조선은 어둠의 시대로 다시 돌입한다. 이준익은 이때의 핵심 인물로 정씨 일가 삼형제를 주목한다. 정약전-정약종-정약용이다. 이들은 모두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들로 실사(實事)야말로 구시(求是), 곧 진리를 찾는데 있어 중요한 방법론임을 주창했던 인물들이다. 실사, 즉 사실에 바탕을 두는 학문을 찾는 길은 당연히 서학으로 연결된다. 이들 삼형제 모두 외국 문물을 일찍 받아들이려 했던 것, 곧이어 천주교로 개종하려 했던 것은 실사구시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개화의 사상을 지향했으며 개혁 군주 정조의 눈에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조는 그 중에서도 맏형인 정약전을 가장 많이 총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는 정약전에게 신신당부하기를 ‘너의 서학이 지나치게 다른 신하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똑똑하고 뛰어난 왕이었던 정조가 어렴풋이 반동의 기운이 만만치 않음을 우려했던 것이다. 시대는 그의 예측대로 갔다. ‘자산어보’의 시작은 신유박해의 과정부터이다. 정씨 형제는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이 중 천주교에 대한 배교(背敎)를 끝까지 거부했던 정약종은 지금의 절두산에서 목이 잘린다. 노론들은 남인의 핵심 인물이었던 정약전의 목을 원했지만 정작 정약전은 스스로 배교를 선택하고 막내인 정약용까지 살린다. 이들은 각각 조선시대에서 가장 외진 땅이라는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난다. ‘자산어보’는 자산, 곧 흑산도에서의 귀향 생활을 하며 어민 백성들에게서 새로운 힘을 발견하는 정약전(설경구)의 일상을 담아내는 데 주력한다. 백성은 무지몽매하다. 사서삼경은 커녕 학문의 발끝도 경험하지 못한 인간들이다. 그러나 섬 안에는 글을 탐독하는 청년 창대(변요한)가 있고 정약전은 그를 유의깊게 관찰하기 시작한다. 무릇 지식이 지식에만 머물지 않고 더 큰 세계관으로 이어지기까지에는 큰 계기가 필요한 법이다. 무지한 자에게는 학문적 스승이 필요하지만 그 스승도 무지한 사람의 일상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스승과 제자는 그렇게 주고 받는다. 인간관계의 변증법이다. 자신에게 되바라지게 구는 것을 두고 ‘이 상놈의 새끼가’라며 같이 성깔을 부리던 정약전은 창대에게서 엄청난 깨달음을 얻는다. 창대가 중얼거리듯 말한 대목때문이다. “홍어가 가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가 가는 길은 가오리가 알지라.” 홍어의 길과 가오리의 길. 선문답이듯 선문답이 아니듯 하는 이 논법은, 이후 정약전으로부터 대학(大學)과 중용(中庸)까지를 사사받고 학문을 섭렵한 창대에게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간다. 목민심서의 길이냐, 자산어보의 길이냐. 양반이라면 여전히 목민의 길, 곧 백성과 민중을 가르치고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의 길(정치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산(흑산도)에 머물며 물고기 학문을 연구하는 실질적인 학문에 전념할 것인가, 그렇게 백성들과 함께 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라는 얘기인 셈이다. 전자는 정약용의 길이고 후자는 정약전의 길이다. 지식이 쌓여 갈수록 고민은 깊어만 가는 법이다. 창대는 처음엔 목민심서의 길을 가려고 한다. 그러나 썩을 대로 썩은 세상을 목도한 그는 스승 정약전의 길이 결국 옳았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준익의 영화는 이 두 가지의 핵심 대구(對句), 곧 ‘홍어/가오리’ 얘기에서 ‘목민심서/자산어보’의 갈등 아닌 갈등의 구조로 서사를 구성하고 이끌어 나간다. 그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실로 감동적이다. 영화가 흔히 빠지기 쉬운 신파와 교육의 분위기가 별로 없다. 이준익의 생각은 뾰족하다. 동시에 따뜻하다. 세상은 늘 지식인의 잘못되고 오도된 세계관이 망쳐 왔으며 그건 ‘백성=국민=인민’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모토를 찾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자산어보’는 그렇게, 이준익 스스로, 정약용보다 정약전의 삶을 선택하겠다고 고백하는 영화다. 그런 그의 정치사상적 커밍아웃이 느껴진다. 그가 앞으로 나로드니키로(인민주의자)서의 삶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새로운 브 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이 전개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1801년 조선의 성리학이 썩었듯이=그렇게 그 숭고한 이론이 지배층의 기득권 유지에만 쓰였듯이=그래서 신문물인 서학과 성리학을 금기시했듯이=고착화되고 부패한 보수 이데올로기에 여전히 휘둘리고 있다’고 이준익은 생각한다. ‘그때의 알량한 성리학자=지금의 지식인들’이 사회와 세상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며 과거의 정약전처럼 스스로들이 지식의 귀양과 유배를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이다. 흑산도처럼 외진 곳,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곳으로의 침잠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준익은 ‘동주’와 ‘박열’에 이어 이번 ‘자산어보’도 컬러가 아닌 흑백의 질감으로 선보인다. 흑백 스크린은 단순히 지나간 버린 영화 시대를 회고하고 향수해 내는 것을 넘어서 현실 이상의 현실감을 부여해 낸다. 시대의 불운을 암시해 내는데 흑백의 명암을 대비시키는 것만큼 정확한 것도 없다. 흑산도의 풍경을 보여 주고 백성의 삶을 그려 내는 이야기인 만큼 풀 쇼트의 풍광이 자주 나온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세상의 먼지 같은 존재이며 지식인은 그 자연과 백성의 품 안에 있는 한 점 같은 존재임을 보여주려 한다.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풀 쇼트의 장면들은 꽤나 예술적이다. 세상에 대한 이준익의 완숙한 사상이 흑산도의 세찬 바람처럼 전편에 몰아치는 영화다. 이준익은 이번 ‘자산어보’ 를 통해 자신이 시네아스트로서의 정점에 올랐음을 입증해 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준익의 ‘자산어보’는 매우 불길한 작품이다. 개혁군주 정조의 죽음과 수구화된 순조 시대처럼 지금의 시대가 그 당시와 같이 보수반동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목민의 길을 갈 것인가. 자산(玆山)에 머물 것인가. 홍어의 길과 가오리의 길은 홍어와 가오리가 알 것이라는 말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자산어보’는 시대에 대한 질문을 잔뜩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안에 그 답이 있다. 당신이 그 답을 찾아내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영화 ‘자산어보’의 유의미성이 크나 큰 이유이다. 이준익은 이 영화로 시대의 사표 (士標)가 됐다. 그런 얘기를 들을 자격이 있다. 충분하다.
영화만큼 진실을 알리는 매체도 없다. 아니 영화가 유일하게 진실을 알리는 매체이다. 다만 그것이 조금 늦을 뿐이다. 영화는 언론과 달리 실시간으로 사건을 중계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은 1991년 논란의 영화 'JFK'를 만들었다. 영화 'JFK'는 1963년 11월 텍사스 댈러스에서 암살당한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범인을 추적하는, 일종의 미스터리 드라마다. 35mm와 16mm, 슈퍼 8mm를 동원해 다큐멘터리 식으로 찍었으며 컬러와 흑백촬영을 동시에 하고 대규모의 장면전환과 별도의 시각처리가 동원된 올리버 스톤의 정치적 야심작이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JFK'는 정치영화가 아니다. 철학적인 영화이다. 사실이 무엇인지를 더 이상 모르게 될 때까지 진실이 조작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이)사실이 무엇인지를 더 이상 모르게 될 때까지 진실이 조작되는 과정은 고도의 음모집단이 언론과 함께 벌이는 일종의 군사첩보작전이다. 지난 2년간 우리 안에서 벌어진 소위 ‘조국 사태’와 지금 전개되고 있는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의 과정을 보면 오래 전의 사건인 JFK의 암살과 그걸 영화로 만든 올리버 스톤의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국내의 파시스트들(극우 자본가와 반공주의자)과 우매하고 사악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총알받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진실이 중요하지 않다. 사건의 본질보다는 그 본질을 흐리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국 사태는 의도적으로 과도하고 왜곡된 공정성 논란을 가열시키며 진실을 왜곡시켰다. 이른바 박원순 사건은 2차 가해라는 미명 하에 실체적 진실을 가리게 했다. 오세훈 후보의 내곡동 땅 매입 과정도 후보 단일화 이슈로 덮는다. 박형준의 L시티 특혜 의혹은 현 정부의 있지도 않은 실정(失政)이라며 만들어 낸가짜뉴스로 무마시킬 태세다. 무엇보다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모해위증교사 사건이야 말로 검찰이 기획하고 조작했음이 분명해 보이는데도(다수의 증인이 출현해 증언을 했다. 비망록도 나왔다.) 전국 고검장들이 참석한 대검 회의에서는 ‘아니다’ ‘검사들은 죄가 없다’는 말이 10명 중 8명의 입에서 나왔다. 조선일보는 이를 받아 ‘사기꾼 말만 믿은 당연한 결과’라는 사설이 나왔다. 검사들이 옵티머스 건으로 로비를 받으면서 룸 살롱에서 술을 먹은 것도 별다른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난지 오래다. 벌서 잊혀졌다. 온갖 사건이 묻혀지고 있다. 누군가가 사건을 사건으로 묻고 이슈를 이슈로 덮고 있다. 이른바 ‘감정적 진실’이 완전히 짓밟히고 있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현학적인 한자어로 만들어 낸 수많은 법리(法理)로 판단하기 이전에 직관적으로 사건을 궤뜷어 본다. 그래서 진실을 알고 있다. 그게 흔히들 얘기하는 집단지성일 것이다. 그런데 매번 그것이 부인되고 있다. 부인도 한두 번이 아니다. 계속 반복되다 보니 이성이 모호해진다. 가짜뉴스에 휩쓸리게 된다. 감정적 진실이 파묻히면 결국 사회적으로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런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세월호 사태는 아직 상처로 남아 있다. 전두환 군부의 광주 학살은 6.25 전쟁만큼 여전히 상흔이다.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사건들이 봉인되고 있다. 땅땅땅. 관을 두드리는 못질 소리다. 한국사회가 암흑에 묻혀가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그 소리를듣지 못한다. 조선과 동아 같은 수구 언론들이 확성기를 꺼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JFK 암살음모를 밝히기 위해 미국 의회가 구성한 워렌위원회도 사건을 덮었다. 위원회는 사건을,사회주의자이자 친 카스트로 주의자인 리 하비 오스월드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을 냈다. 그러나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즈의지방검사인 짐 개리슨은 이에 의혹을 품는다. 그는 케네디의 암살이 명백한 쿠데타라고 주장한다. 미국에는 정부 외에 또 다른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CIA와 군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두 기관이 공모하고 여기에다 反카스트로 세력과 현지 마피아가 동원됐다는 것이다. 전쟁은 돈이 된다. 그러나 케네디는 미-쿠바 미사일 사태에서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흐루시초프와 손을 잡았고 베트남 지상군도 철수할 생각이었다. JFK가 죽자마자 후임인 린든B. 존슨에 의해 베트남전은 확전이 됐고 라오스 캄보디아 공습이 시작됐으며 칠레는 파시스트 피노체트의 쿠데타 조짐으로 나아가는데 미국은 이를 조종하다가 각종 사건을 일으킨다. 미국엔 거의 동시에 워터게이트 사건까지 터졌으며 이 모든 일들은 1980년대에는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까지 번진다. 결국 JFK의 암살은 미국 현대사의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얘기다. 짐 개리슨은 JFK 암살이 군산복합체와 극우 자본이 공모한 최악의 비열한 음모였음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는 고군분투했으나사건의 진실은 결국 파묻혔다. JFK 암살에 대한 모든 비밀은 75년간 봉인됐다. 2038년에 가서야 가까스로 당시 사건에 대한 모든 조사 기록들을 볼 수가 있다. 'JFK'를 만든 후 짐 개리슨처럼 온갖 비난에 시달리던 와중에 올리버 스톤은 자신의 모교인 힐 고등학교에서 이런 강연을 한다. “탐욕은 군림하고, 탐욕은 전쟁을 하고, 탐욕은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 돈에 의해 언론도 대부분 침묵을 강요 받습니다. ‘타임'과 ‘뉴스위크’, ‘CBS’ 등에서 여러분은 진실을 알아내지 못합니다. 진실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을 관에 묻을 것인가. 진실이 흔들리니 회색주의자들, 있지도 않은 제3지대자들이 판을 친다.한때 진보 논객이라 불리던 (불렸던 모양이지만 그렇게 인정할 수 없는) ‘김앵커’가 '두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나라'라는 책을 썼다 해서 일촉의 관심을 모으는 모양이다. 그는 진보인 적이 없다. 진보인 척 했을 뿐이다. 이제는 스스로 보수를 자처한다. 왔다 갔다 한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시장 선거가 위험하긴 한 모양이다. 권력에 붙고 권력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들이 늘어난다.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 식으로 얘기한다면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심히 ‘걱정’이로소이다. 대중들은 일어나고, 젊은이들은 분노하며, 지식인들은 중심을 잘 잡아야 할 것이다. 진정 그래야 할 터이다.
영화와 여성은 늘 조용한 혁명을 이루어 왔다. 이 둘은 때론 같이, 혹은 때로는 따로 세상의 금기를 깨뜨리는데 앞장서고 투쟁해 왔다. 여성을 해방시키는 나라는 영화와 창작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둘은 종종 무지하고 막지한 보수의 벽에 부딪히곤 한다. 영화 ‘암모나이트’는 그러한 반동(反動)의 시대를 겨냥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 프란시스 리는 두 여인의 섹스신을 강도높게 구사한다. 당연히 의도적이다. 프란시스 리는 보수화되고 있는 유럽사회에, 그리고 한국 사회에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 한다. ‘정말 아름다운 게 뭔지 보여줄까?’ 두 여인의 나신(裸身)은, 사람 간의 진짜 사랑은 성(性)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은 꼭 남자와 여자만이 사랑을 하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해준다. 신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자신이 남자든 여자든 그냥 상대인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을 것이다. ‘암모나이트’는 그 점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영화다. 이성애와 동성애가 무슨 차이람. 그 차이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담. 굳게 닫힌 듯 보이는 세상의 문은 영화 한편이 열어젖힌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로 슬며시. 그렇게 문 바깥의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한다. ‘암모나이트’는 바로 그런 영화다. 제목인 ‘암모나이트’의 뜻은, 그렇다. 바로 그 암모나이트다. 중생대의 생물. 연체동물이다. 달팽이 같이 생겼다. 그 작은 공룡 화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쥐라기가 중생대이다. 그러니까 암모나이트는 그것이 발견되는 지역의 연원을 추적할 수 있게 한다. 공룡시대의 연구에 시금석 같은 자료가 된다. 그런데 왜 영화 제목이 굳이 암모나이트인가. 오래 전에는, 그러니까 약 200년 전에는 이 암모나이트가 일종의 유희였다. 화석은 관광지 가게에서 팔고 사는 기념품과도 같았다. 그러다가 매우 정교하고 모양이 제대로 갖춰진 화석이 발견되면 고생물 연구에 활용됐다. 이 영화의 주인공 메리 에닝(케이트 윈슬렛)이 바로 그 고생물 연구자다. 그런데 여자라는 이유로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전설적인 명성만 자자한데 영국의 남자 사회에서 이런 식으로 소문이 돌아 있는 모양이다. ‘화석을 주으며 살아가는 여자가 있대. 가끔 놀라운 발견을 하는 가봐. 별일이지?’ 그래서 뛰어난 모양의 암모나이트를 발견했음에도 대영박물관에는 메리 에닝의 이름 대신 그녀에게 그걸 산 남자의 이름이 기증자로 걸려 있다. 200년 전에는 이런 식이었다. 사회가 화석과 같았다. 바위 속에, 돌멩이 속에,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들이, 그렇게 갇혀 살았다. 영화의 배경은 영국 남부의 해변 마을 라임 레지스(Lime Regis)이다. 당연하다. 이곳은 아직도 쥐라기 코스트(coast)라 불릴 정도다. 지금은 매우 팬시(fancy)한 해안가로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지만 영화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1840년에는 그냥 평범하고 외진 해변 마을에 불가했다. 물론 이때부터도 관광객이 존재했다. 메리 에닝이 젊은 여인이자 유부녀인 샬럿 머치슨(시얼샤 로넌)을 만나게 되는 것도 순전히 그녀의 남편이 딜레탕트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화석 연구가 취미인, 비교적 부유한 남자이고, 아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라임 레지스에 왔지만 사실은 ‘전설의’ 메리 에닝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샬럿은 얼마 전 아이를 얻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산을 했거나 아니면 낳고 잃은 것으로 보인다. 샬럿은 우울증에 시달린다. 무엇보다 사랑에 목말라 있다. 남편이 안아 주기를 바라지만 경직된 사회의 우둔한 남자들은 육욕이 죄악인 양 군다. 치사하고 비겁하고 용렬(庸劣)하다. 위선적이다. 남자는 (정신이) 아픈 여자를 메리 에닝에게 떠넘기듯이 안기고 자기 길을 간다. 학회에 가겠다며. 길어야 6주만 맡아 달라며. 메리와 샬럿은 그렇게 만난다. 운명의 관계는 때론 원치 않는 것처럼, 그러지 않은 척 다가선다. 그리고 불길을 만들어 낸다. 메리 역시 상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홀로 외롭게 연구와 발굴(생계용 채석)을 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레즈비언이지만 그걸 숨기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에게는 예전에 가까웠던 연상의 여인(피오나 쇼)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둘은 끝내 함께 하지 못한 관계다. ‘그 여인’은, 나이가 많은 만큼, 늘 인자하고 인내하는 표정으로 메리에게 얘기한다. “정말 들어 와서 차 한잔 하고 가지 않을래?” 그때마다 메리의 몸과 얼굴 표정은 따로 논다. 몸은 들어가고 싶지만 표정은 차가워진다. 그리고 결국 돌아선다. 여인은 슬퍼한다. 메리 역시 가슴에 늘 사모(思慕)의 상처를 안고 산다. 사랑의 슬퍼지면 삶이 힘들어진다. 메리의 삶이 그렇다. 그렇게 중년이 된 메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샬럿이 출현한다. 시인 마리아 라이너 릴케의 얘기처럼 사랑은 갑자기 찾아온다. 그리고 금방 뜨거워진다. 어쩌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하루면 되거나 순간이면 된다. 가벼운 키스로 시작해 농염한 섹스로 이어진다. 둘은 메리의 작은 침대에서 서로의 은밀한 부위를 탐하며 세상을 얻는다. 육체의 환희는 정신적 고통따위를 저 세상으로 던져 버리게 한다. 육체의 맛을 알지 못하는 사랑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는 연인은 그렇게 세상을 얻는다.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사랑이 없이는, 마음이 동하지 않고서는, 상대와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들의 섹스는 말 그대로 진심의 향연이다. 진심의 열정이 교환되는 베드신은 늘 그렇지만 아름다운 법이다. 영화 ‘암모나이트’는 같은 계통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비해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간 작품이다. 이 둘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데 ‘타오르는’은 여성 감독의 작품이고 ‘암모나이트’는 남성 게이의 작품이다. 결의 차이는 아마도 거기서 생겼을 것이다. 한 보 더 깊어 보이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해안과 바닷물은 중요한 구실을 한다. 샬럿이 혼자서 해수욕을 한다고 했을 때 바다는 그녀를 거칠게 밀어낸다. 샬럿은 파도에 치이고 맞는다. 당연히 그녀는 물에 들어간 후 병이 걸리고 그 병이 메리에게 다가서게 만든다. 병이 다 낫고, 둘이 사랑과 섹스를 한 후에, 바다는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들인다. 밀어내지 않고 샬럿을 둥둥 뜨게 한다. 메리가 그녀를 물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둘은 물 안에서 포옹하고 키스한다. 바닷물은 세상이다. 여자 혼자일 때는 매정하고 못되게 밀어 내지만 사랑하는 둘이 같이 하면 그러지 않는다. 세상은 연대함으로써 이겨내는 것이다. 바다에서의 둘의 키스가 그렇게나 예쁜 이유다. ‘암모나이트’는 차별금지법 논란이 일고 있는 우리사회에 의미심장한 러브 스토리 영화이다. 동성애를 마치 무슨 질병인 양, 정신병인 양 취급하는 기독교 보수 교단의 목사들을 향한, 조용한 외침 같은 영화이다. 정치적 주장은 이렇게 예술적이어야 한다. 케이트 윈슬렛의 살찐 등판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다. 케이트 윈슬렛은 영국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2008년작 ‘더 리더 : 책 읽어 주는 남자’에서도 이미 농염하면서도 슬픈 연기를 선보인 바 있다. 무려 십수년의 시간이 흘렀고 몸과 마음은 그 세월에 많이도 녹아 내렸지만 신체적 매력은 오히려 더 풍만해졌다. 좋은 배우이다. 그녀가 선택한 ‘암모나이트’도 그렇다. 좋은 영화가 좋은 여배우를 만드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좋은 여배우는 좋은 영화를 만든다. 늘 그런 법이다.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공포 그 자체이다. 환희나 기쁨 같은 것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길과 같다. 세계관이 바뀌는 일이다. 무섭고 두려워진다.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는 안 그렇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공포영화의 작법이 어울린다. 공포영화가 꼭 진실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진실에 대한 영화는 공포영화다.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를 알게 된 후 스파이로 변신하는 부부의 이야기, 그 어둠과 두려움의 이야기인 ‘스파이의 아내’를 공포영화의 대가(大家)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만든 이유다. 그게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스파이의 아내’는 첩보 스릴러보다는 심리 스릴러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그녀는 나를 밀고할 것인가. 그녀가 나를 밀고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그녀가 알게 됐고, 그렇게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식의 반복되고 중첩되는 배신과 의심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세상의 모든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사람의 마음 속 우물도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그를 배신한다. 남편 역시 아내를 위해 그녀를 배신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배신인가 사랑인가. 이 둘은 국가 기밀을 외부로 반출시키려 한다. 그 기밀은 끔찍한 만행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매국노인가 애국자인가. 국가가 사람들을 배신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 사람들은 국가를 배신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내는 것이 맞는 것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 국가가 번영해야 개인도 행복한 것인가. 아니면 그 둘은 한 몸인가, 별개인가. 그렇다면 과연 국가와 개인은 무엇인가. 영화는 점점 더 중층의 문제의식을 하나하나 던져주기 시작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를 넘어 지금 당장의 시대 의식에 근접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과연 그때와 달리 진실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암흑 속에 있는가.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한발자국 씩이라도 진보하고 진화하고 있는 것인가. 영화의 배경은 1940년의 고베 시이다. 조금씩 조금씩 패전의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는 때이다. 일본 군국주의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 세계를 향해 전선을 급속히 확대시킨다. 일본 군부는 집단적 광기로 완전히 돌아섰으며 결국 1941년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미국까지 세계대전에 끌어들인다. 총동원령이 내려진 가운데 일본 사회는 점점 더 어둠의 구덩이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시작은 다소 한가해 보인다. 아니 그보다는 한가한 척하고 있다는 것을 역력히 보여준다. 주인공인 유사쿠-사토코 부부는 전쟁과는 아랑곳없다는 듯 영화를 찍으며 보낸다. 감독은 남편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 주연은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와 이들의 외조카 후미오(반도 료타)이다. 영화 속 영화의 여주인공은 남편 몰래 그의 금고를 뒤지려고 한다. 영화 속 영화의 남편은 그런 그녀를 뒤에서 낚아챈다. 남편은 여자의 무도회 가면을 벗긴 후 금고를 열려고 했던 사람이 자신의 아내였음을 알게 된다. 이 영화 속 영화는 이후 라스트 씬을 완성하며 회사 망년회 때 공식 상영된다. 영화 속 영화의 결말은 남자가 여자를 떠나보내는 척 등 뒤에서 총을 쏴 그녀를 죽이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죽인 여자를 품에 안고 슬퍼한다. 무성영화로 찍힌 이 영화 속 영화는, 많은 것을 암시하는 액자영화이다. 궁극적으로 영화 ‘스파이의 아내’가 어떤 이야기로 흘러가고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 가를 짐작케 한다. 똑똑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 속 액자영화 안에 모든 비밀이 담겨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게 된다. 취미로 영화를 찍을 정도인 걸 보면 주인공 유사쿠는 상당한 리버럴리스트임이 틀림없다. 재력가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외국, 특히 적대국으로 불리는 영국이나 미국을 상대로 무역업을 해서 상당한 돈을 벌어 온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그런 유사쿠에게 내부 반역행위를 색출하는 군 헌병 당국의 압박이 조여 오기 시작한다. 유사쿠가 상대하는 영국인 사업자가 스파이라는 것이다. 아내 사토코는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오직 남편에 대한 사랑과 믿음 하나로 살아간다. 그녀의 삶은 전쟁 중임에도 매우 풍족하다. 세상은 웃음을 잃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를 않는다. 모든 일의 시작점은 남편 유사쿠가 조카 후미오와 함께 만주로 한 달 간 출장을 다녀오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둘은 뭔가 비밀스러운 행동을 하기 시작하고 이들이 만주에서 데려온 것으로 의심되는 묘령의 여자 히로코(현리)는 급기야 강가에서 시체로 떠오르기까지 한다. 두 사람은 곧 살인 용의자로 감시를 받게 되는데 그 와중에 내용을 알 수 없는 노트와 필름을 숨기기에 급급해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토코는 남편 몰래 그 내용을 들여다보고 경악하게 된다. 진실을 알게 되기 전 사토코는 남편에게 거세게 항의한다. 당신은 매국노가 되려 하느냐고 추궁한다. 유사쿠는 아내에게 자신은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은 코스모폴리탄이라는 것이다. 아내는 두 사람을 군 헌병 당국에 고발하고 조카 후미오는 곧바로 체포돼 손톱 10개가 뽑히는 극심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급격하게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한다. 영화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 준다. 무엇보다 전쟁 중 일본의 내부, 그 내면이 어떠했는 가에 대해 이만큼 솔직한 토로는 처음이라는 느낌을 준다. 군국주의로 인해 획일화된 사회 속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애썼음을 보여준다. 군부가 앞장서 미쳐 돌아가는 행태를 보인다해도 보통의 일본인들은 그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군국주의에 대해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동의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이념과 사상, 언론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된 상황 속에서도 일본 내 자유주의자들의 일상이 만만찮은 두께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 내 상당수의 지식인은 세계동포주의란 이름으로 반정부 및 반체제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 역사가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고 자신들이 오랫동안 그것을 비판하고 지적해 왔다는 것에 대한 우회적인 주장으로 이어지는 대목이어서 꽤나 흥미롭다. 지금껏 자신들의 과거 군국주의 역사를 다뤄 온 일본 영화 가운데 ‘스파이의 아내’처럼 비교적 처절할 만큼 자기 반성적인 작품은 없어 보인다. 이건 한국이나 주변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자신을 위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현재의 일본사회가 아직은 꽤나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역작이다. 그의 세계관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만들고 잉그리드 버그만과 캐리 그란트가 나왔던 1946년 영화 ‘오명’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스파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러브 스토리다. 그런 점에서 닮았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팬데믹 탓에 일반 개봉이 미뤄져 오던 가운데 영화 팬들이 줄기차게 기다려 온 작품답다. 일본 내 군국주의 잔재가 여전히 강고하지만 그에 대한, 지식인다운 격렬한 문제의식이 느껴져서 반가운 작품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은 우리의 극우주의로 이어진다. 두 가지는 초록의 동색이다. 우리가 구로사와 기요시와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제목대로라면 전도가 양양한 한 젊은 여자의 이야기, 곧 학계나 비즈니스 쪽에서 꽤나 잘 나가고 있는, 성공 스토리쯤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일종의 엽기 스릴러인데다 이야기가 완전히 예측불가능한 쪽으로 움직인다. 매우 새로운 영화이다. 여성감독의 영화이고 여성이 주인공이며, 여성 문제가 앞세워진, 파격적인 페미니스트 영화다. 요즘엔 영화고 어디고 여성이 대세다. 여성주의가 시대를 주도한다. 남성이 주도하던 시대가 파산했음을 보여주고 폐기돼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인공인 카산드라는 낮과 밤이 다른 여자이다. 낮에는 친구 게일(래번 콕스)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점원으로 일을 한다. 꽤나 외모가 눈에 띈다. 그래서 카페 점원을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집도 꽤 잘 사는 편 정도가 아니라 부유한 편이다. 먹고 살 걱정은 없어 보인다. 아빠는 내색하는 편이 아니지만 적어도 엄마는 늘 카산드라가 걱정이다. 딸이 너무 허송세월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낮에는 설렁설렁 무위도식하듯 살아가는 카산드라는 알고 보니 7년 전에는 아주 똑똑한 의대생이었다. 우리 식으로는 예과 2년을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때려치웠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모든 걸 다 그만두고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하고 산다. 대체로 허무주의에 빠져 있으며 흥미를 갖는 것이 없다. 공부도 싫고 친구도 별로고 남자가 필요하지도 않다. 미래계획이 없다. 그런데 이 여인 밤마다 술집에서 진탕 취한 척 한다. 옷이란 옷은 다 풀어 헤치고 치마 속은 다 보여 주면서 술집 남자들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친절한 척, 늘 취한 여자를 어떻게 해 보려는 남자를 ‘낚아서는’ 그 남자로 하여금 된통 일을 치르게 한다. ‘밤의 카산드라’는 주로 취한 여자를 대상으로 강제로 추행하거나 강간하려는 남자들을 죽이거나 적어도 거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여자처럼 군다. 그녀는 밤의 살인마인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카산드라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보이며 매우 계획적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일종의 ‘범행 수첩’을 쓰고 있는데, 거기에는 횟수를 의미하는 작대기가 수십 개나 그려져 있다. 카산드라는 아마도 7년 전에, 그러니까 의대 시절에 남자들에게 ‘무슨 일’을 당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아 이 여자는 복수를 꿈꾸고 있구나’하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적어도 영화의 첫 장면, 그러니까 흐느적거리고 질펀한 바(bar)에서 남자의 손에 이끌려 간 카산드라가 그 남자 를 ‘처단하는 듯’한 시퀀스는 이 영화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 남자들에게 유린당한 여자(들)의 복수극은 할리우드에서는 한 장르를 차지할 만큼 ‘무지하게’ 많이 만들어져 온 내용들이다. 아벨 페라라의 1981년작 ‘복수의 립스틱, Ms. 45’이 대표격 영화로 늘 거론되는 작품이다. 강간당한 여자가, 거리의 모든 남성들, 불량배들을 향해 45구경 권총을 겨눈다. 닐 조단이 만들고 조디 포스터가 나와 화제를 모았던 2007년 영화 ‘브레이브 원, The brave one’도 같은 경향성의 작품이다. 이런류 영화의 원조 격으로 기억되지만 이상하게도 한동안 음성적인 비디오로 유통된 작품으로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I spit on your grave’가 있다. 1978년에 나온 1편은 B급 저예산 독립영화로서 남성 중심적 사회에 대한 여성적 저항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었지만 이후 2편, 3편 등 리메이크가 거듭되면서 자극적인 ‘강간의 스펙터클’만이 담겨진, 비교적 ‘쓰레기’ 작품들로 이어졌다. 이 영화가 여성주의 담론의 영화에서 제외된 것은 그 때문이다. 프랑스 영화 ‘베즈 무아 : 거친 그녀들, Rape me’이 의도적으로 아예 하드코어 포르노물로 만든 작품이다. 영화 전문가들도 보고 있기가 쉽지 않은 영화다. 하지만 이번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처럼 ‘낮과 밤이 다른’ 여자의 컨셉은 영화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숨겨진 영화인, 켄 러셀 감독의 1984년작 ‘크라임 오브 패션, Crime of passion’의 이야기 구조를 더 많이 닮아 있다는 착시를 준다. 히치콕의 전설적인 영화 ‘사이코, Psyco’의 배우 안소니 퍼킨스가 나오고 낮에는 커리어 우먼이지만 밤에는 창녀로 살아가는 여자로 ‘보디 히트, Body Heat, 1981’의 캐서린 터너가 나온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레퍼런스를 가져 온 이야기 구조로서 그것의 여성판 서사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프라미싱 영 우먼’이 단지 그렇게 예전 영화의 여러 요소들만을 차용해서 짜깁기 한 영화라면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지난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등 주요 부문에만 4개나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그만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는 것인데 일단 이 영화를 만든 에머랄드 펜넬은 감독보다는 배우이다. 그녀는 이번 영화로 세계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주연을 맡은 캐리 멀리건은 지금껏 나왔던 모든 영화에서의 자기 이미지를 완전히 전복시켰으며 올해의 LA비평가협회는 그런 점을 높이 평가해 그녀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줬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무엇보다 스타일과 미술, 패션, 음악에서 이전 작품들에 비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초현대적이다. 최신이면서도 초월적으로 다른 경지에 다다른 작품이라는 의미이다. 이야기의 예측 불가능성이야 말로 이번 영화가 갖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특징이다. 도무지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어느 방향으로 튈지 예상하기가 어렵다.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의 후반부와 그 결론에 적잖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남자의 결혼 전 총각파티에 짙은 화장과 가발을 쓴 채 짧은 간호사 제복(그것도 라텍스 재질의)을 입고 복수극을 벌이려는 카산드라의 계획과 그 에피소드의 이야기는 극 후반을 한마디로 폭풍처럼 몰아치게 한다. 그녀는, 그리고 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럴 수가’라는 표정을 짓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복수의 립스틱’ ‘브레이브 원’ 등등의 영화는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일종의 여성 자경단(自警團)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성이 주체가 되긴 했어도 복수의 방식은 전형적으로 남성적 방식이었다는 얘기다. 여성 창의적인 작품들은 아니었다. 남성 자경단 영화로는 그 옛날 찰스 브론슨 주연의 시리즈물로 만들어졌던 ‘데스 위시’같은 작품을 말한다. ‘프라미싱 영 우먼’의 카산드라는 목적이 보다 개인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여성형을 보여 주려는 측면이 강하다. 복수의 목표가 꼭 남성 중심의 사회를 바꾸겠다는 식의 거대담론을 취하고 있지도 않다. 그보다는 죽은 친구에 대한 복수이다. 남성들에 대한 응징도 매우 혁신적이다. 예컨대 ‘밤의 창녀’로 술집에서 낚은 남자들은 그녀에게 직접 복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복수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카산드라는 이들 남자의 ‘약점’을 잡아(대부분 유부남이거나 사회적으로 자신의 비행이 알려지면 안되는 남자들이다.) 다른 남자를 처단하거나 응징하는 데 이용한다. 강제 청부행위를 시키는 셈이다. 자신은 범행 뒤에 숨을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이 취하려는 궁극의 복수극을 위해 단계별로 하나하나 일을 도모해 나가는 치밀함을 선보인다. 계산적이고 효율적이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카산드라는 틀에 박힌 행동을 삼가한다. 가능하면 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엄숙한 표정은 혼자 있을 때만 지으려고 한다. 카산드라는 지금까지의 여성 복수극 영화에서 가장 발랄하고 섹시한 캐릭터이다. 카산드라를 보고 있으면 그녀의 위험한 경계의 삶에 동참하고 싶어진다. 그녀의 목적에 흔쾌히 동의하게 만든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겉으로는 매우 脫정치적이지만 꽤나 정치성이 강한 작품이다. 광범위한 여성적 연대를 ‘획책’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영화의 결말에 동의하게 될까. 개인적으로는 감독이 고민 끝에, 도덕적이면서도 제도권적인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영화의 결론은 남녀간에, 사람들간에 꽤나 논쟁을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 여성주의 문제로 논쟁이 많은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다. 영화가 주목을 받을 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그러기에 충분한 영화이다. 너무나도.
영화는 제목 하나로 비교적 모든 것을 추출할 수 있게 한다. 영화 ‘미나리’를 두고 사람들은 왜 ‘미나리’냐고 묻는다. 물론 미나리(를 심고 기르고 캐고 하는 등등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보다는 미나리가 상징하고 은유하는 내용의 영화일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영화에서 장모인 순자(윤여정)는 사위 제이콥(스티븐 연)과 별다른 상의 없이 손자 데이빗(앨런 S. 김)을 데리고 나가 미나리를 심는다. 집에서 좀 떨어진 냇가다. 순자는 데이빗에게 “여기가 미나리 심기에 딱 좋은 데네.”라면서 한국에서 가져온 종자를 뿌린다. 미나리는 그렇게 뿌리기만 하면 스스로 알아서 크는 작물이다. 요즘에야 미나리가 숙취 해소에 꽤나 좋은 것쯤으로 다 알고 있지만 옛날 사람들에겐 잔병에 안 걸리게 하고, 무조건 여기저기 건강에 좋고, 그래서 오래오래 살 수 있게 해주는, 만병통치의 나물로 인식돼 왔다. 향은 강하고 독특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약과 같은 나물로 취급받았다. 무엇보다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나물이라는 점이 좋았을 것이다. 할머니 순자는 그렇게, 미국 땅 아칸소에 미나리 씨를 뿌리면서 손자 데이빗이 미나리처럼 쑥쑥 아프지 않게 자라기를 바라는 소망을 보여 준다. 데이빗은 심장이 아주 약하며 그래서 엄마 모니카(한예리)나, 아빠 제이콥이나, 거의 입버릇처럼 아이에게 이런 얘기를 하게 만든다. “데이빗. 뛰지 마.” 영화 초반부터 모니카는 아들 데이빗에게 강한 톤으로 그렇게 얘기하는데 전후 사정을 모를 때는 그게 꽤나 의아하게 느껴진다. 엄마가 아들에게 지나치게 딱딱하게 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로 이 부부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아이, 특히 아들을 엄하게 키우려고 한다. 아픈 아이니까 더 세심하게, 반면에 그렇게 특별히 정을 더 주는 만큼 더욱 엄격하게 군다. 영화 ‘미나리’도 그렇게 양가적(兩價的)이고 이중가치적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는 어쩌면 우리들(특히 아버지 세대들)이 살아가는 내내 겪어야 했던 척박한 인생을 그려 내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 안에 담겨 있는 가족주의와 따뜻한 인간관계를 펼쳐 내려 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을 더 비중 있게 보느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시선은 많이 달라진다. 일상은 늘 폭력적이지만 그 폭력 속에도 인본(人本)적인 무엇이 삶을 견디게 하는 법이다. 일상의 폭력성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철없는 짓이다. 그렇다고 그 안에서 휴머니즘의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삶의 동력을 잃게 되는 일이다. 두 가지에 대한 인식은 전체와 부분, 안의 것과 밖의 것을 연결하는 고리다. 영화를 보다 보면 비교적 명확하게 영화 전체가 감독인 정이삭(미국명 리 아이삭 정)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채워져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정이삭은 코리안 아메리칸 3세대로서 자신의 전 세대가 어떤 일을 하고, 또 겪으며 살아 왔는 가를 전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전전(前前) 세대인 할머니가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민자로서의 고립된 삶 속에서 자신에게 무엇을 남기고 갔는 가, 어떤 정체성을 부여하고 갔는 가를 기억하고 기록하려고 한다. 그 과정이 매우 눈물겹지만 정이삭 영화의 특징은 그걸 ‘눈물의 카타르시스’로 과장되게 분출시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는 가능한 꾹꾹 누른다.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의 애증도 선을 넘지 않게 한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도 지나치게 (한국적으로) 유별나게 보이지 않게 하려 한다. 여기 나오는 가족들, 특히 아버지와 엄마는 가혹한 운명을 대할 때에도 어마어마하게 분노하지 않고(각고의 노력으로 재배한 채소들이 불타 없어지지만), 비정상적으로 광적이지도 않으며(모니카가 살짝 미신에 가깝게 기독교를 믿지만) 목을 놓아라 통곡하지도 않는다.(장모이자 할머니인 순자가 죽은 것인지 살아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게 그려진다.) 이상한 관계가 생겼을 법 한데 그걸 드러내려 하지도 않는다.(병아리 감별 전문가인 제이콥은 아내 모니카 옆에서 일하는 공장의 여자와 자꾸 눈이 마주친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그 톤앤매너가 좋다. ‘미국식으로’ 개인주의적이거나 냉정하지도 않으면서 ‘한국식으로’ 다분히 요란을 떨지도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이 이야기가 가공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인공적이지 않고 매우 내추럴한 느낌을 준다. ‘미나리’가 거대담론을 보여주려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2007년작 ‘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와 서사 구조와 그 맥락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앤더슨의 영화는 주인공 대니얼(다니엘 데이 루이스)이 캘리포니아의 한 작은 마을 리틀 보스턴에서 홀로 유전을 캐며 지옥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의 어린 아들은 정신적으로 ‘약간’ 아픈 아이인 데다 친자식도 아니지만 그는 아이를 나름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미나리’에서도 제이콥은 아칸소의 ‘깡촌’에서 한국 채소 농장을 만들겠다면서 그야 말로 ‘열일’을 한다. 그는 미국에 한국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에 결국 신선한 한국 음식 재료를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의 작물은 댈러스와 덴버를 넘어 캘리포니아까지 팔리는 기회를 맞기도 한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낸다. 우물도 직접 판다. 아내는 그의 ‘야망’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 믿지 않는다. 제이콥 입장에서 보면 대니얼처럼 실로 고난의 행군이 아닐 수 없다.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는 대니얼의 주변에 광신도 목사가 한 명 나타나는데 폴 선데이(폴 다노)가 그다. 둘은 결국 비극적 파국을 맞는다. ‘미나리’의 제이콥 주변에도 광신도가 한 명 기웃대며 살아간다. 폴(윌 패튼)이란 이름의 남자가 바로 그다. ‘데어 윌 비 블러드’와는 달리 ‘미나리’에서 둘은 폭력적 관계가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왠지 불편하다. 폴은 제이콥의 일꾼이다. 폴은 정말 성심을 다해 일을 하는데 입에 주님을 달고 사는 게 문제다. 그는 수도승처럼 자신을 학대하며 비루한 삶을 살아간다. 제이콥은 폴이 아내인 모니카에게 종교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싫지만 그가 없으면 자신의 노동이 배가 될 것이라는 점을 안다. 그는 억지로 폴의 신앙 방식을 인정한다. 어쨌든 두 영화가 닮았다는 착시와 오해가 생기는 건 그 같은 인물 배치와 관계 설정 때문일 것이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100년 전의 이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강고한 노동과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주의, 오일(oil)과 그를 둘러싼 (정치사회적이면서도) 폭력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나라인 가를 보여 주려 한다. ‘미나리’도 19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의 레이건 시대 때의 얘기며 미국이 얼마나 혹독하고 자기희생적인 노동의 이민자들 손에 의해 길러진 나라인 가를 웅변한다. 두 영화 모두 미국이 지니는 진정한 가치, 흔히들 얘기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하는 것의 진면목을 보여 주려 한다. 자본주의란, 인간의 손과 몸으로 땀 흘려 재화를 만들어 내되 청교도적 가치로 스스로는 검약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회인 것인 바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은행과 지수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금융자본주의 이후부터) 인간 노동이 갖는 본연의 숭고함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몰아내고, 차별하려 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인데 미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민자들이 구축해냈던 자본의 올바른 물신성(物神性)을 몰각한 데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간난(艱難)했던 삶을 이겨냈던 한 가족의 이야기로 풀어 가면 올바른 자본주의적 정신이니 미국적 가치니 하는 말들은 말을 위한 말, 수사학(修辭學)에 불과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제이콥이 모니카에게 강조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모니카는 더 이상의 힘든 노동의 삶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녀는 자신만이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캘리포니아로 가고 싶어 한다. 제이콥은 모니카에게 말한다. “나는 여기 있을 거야. 그래서 나중에라도 아이들이 아빠가 이루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어.” ‘미나리’는 우회적으로, 그리고 은근히, 지금은 상실된 부성의 가치를 회복시키려고 한다. 순자의 미나리 밭을 이어받는 것도 결국은 제이콥이다. 제이콥=아버지는 결국 많은 일을 해낸다. 상대적으로 엄마 모니카와 딸 앤(노엘 조)의 역할은 뒤로 숨겨져 있다. 스티븐 연을 완전히 새롭게 보게 됐다. 그는 더 이상 이창동의 ‘버닝’에 나오는 이국적인 인물이 아니다. 광신도 폴 역의 윌 패튼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정이삭 감독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인 데이빗의 캐릭터에도 공을 들인다. 그 연출의 배분과 조합, 흐름이 뛰어나다. 퍼펙트하다. 좋은 영화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일본 최고의 로맨틱 가이 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신작 ‘라스트 레터’는 그의 전작(前作)인 ‘러브 레터’를 보지 못한 신세대 관객들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극 중 인물들이 (시대가 어느 때라고) 매일같이 ‘손편지’를 주고받는 내용이어서 ‘꼰대 영화’라는 소리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의 전작(全作)을 대체로 봐왔던 사람들, 특히 ‘뱀파이어’(2011)나 ‘립 반 윙클의 신부’(2016)까지 봐왔던 사람들은 ‘라스트 레터’가 결코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작품들을 넘어 이와이 슌지 자체를, 그래서 흔히들 ‘이와이 월드’란 말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번 새 영화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숨은 그림을 찾아보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가장 쏠쏠한 맛이다. 복잡한 척 하지만 ‘라스트 레터’는 사실 그리 복잡한 내용이 아니다. 앞뒤, 그리고 중간중간 시간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고, 주인공 토노 유리(마츠 다카코)의 시어머니가 늙으막에 연애를 하다 허리를 삐긋한다든지, 극중에서 소설가로 나오는 오토사카 쿄시로(후쿠야마 마사하루)가 그의 이전 여자 토노 미사키의 옛집을 찾아 가 그녀의 전남편 아토(토요카와 에츠시)와 이제는 그와 동거하는 여자 사카에(나카야마 미호)를 만난다든지 하는 것 등등 모두 일종의 맥거핀이다. 맥거핀. 눈속임 장치. 본래 얘기를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앞에 깔아 놓은 주단 같은 이야기. 알고 보면 편집해서 없애도 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니 그런 거 다 빼고 영화의 기둥 줄거리를 한 줄로 정리할 수 있으면 좋다. ‘라스트 레터’는 25년간 한 여자를 사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작가 오토사카는 고등학교 때 만난 미사키(히로세 스즈)와 대학 때 잠시 같이 살듯이 연애를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가 그녀는 폭력적인 남자 아토를 선택해 결혼한다. 미사키는 아토와의 사이에 딸 아이 아유미(히로세 스즈)를 낳았지만 폭력남편을 피해 도망 나오고 그렇게 평생을 행복하지 못한 채 살다 죽는다. 행복하지 못했던 건 오토사카도 비슷한데 그는 젊은 시절, 그녀와의 연애담을 소재로 ‘미사키’라는 소설을 썼고,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그래서 어쭙잖은 상도 타고 그러긴 했지만, 그 이후 단 한 권도, 아니 단 한 줄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살아왔다. 글을 쓰긴 했어도 데뷔작인 ‘미사키’의 범주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두 번째, 세 번째 책으로 묶어 내지 못했다. 오토사카는 평생을 미사키의 존재와 그녀와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런 남자는 대개가 다 대체로 불행하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거나 하지 못한다. 오토사카가 처한 극 중의 상황, 바로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이 영화의 핵심 포인트이자 키워드가 된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오래전 ‘이와이 월드’의 시티즌이었던 사람들은 그가 지금껏 매우 다양한 영화들을 여러 편 만들어 오며 영화예술적으로 종횡무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같은 숨겨진 걸작을 만들어 왔으며 ‘립 반 윙클의 신부’ 등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영화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인물인가를 드러내 왔다. 이와이 슌지의 세계관은 상당히 비관적이며(그의 영화 속 아이들 상당수가 어릴 적 이지메를 당하는 등등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따라서 영화들도 알고 보면 매우 ‘다크’한 측면을 지닌다. 그렇게 그는 지금껏 자신의 영화 세계를 비교적 잘 구축해 왔다. 그러나 그건 보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이와이 슌지 자신, 그 스스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걸 이번 신작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평생을, 극 중 인물인 오토사카가 ‘미사키’라는 소설 한 권 이후 제대로 된 작품을 못 써 온 것처럼, 자신도 초기작인 ‘러브 레터’의 성공 이후, 제대로 된 영화와 제대로 된 영화 흥행을 해오지 못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뼈아픈 자각을 하며 살아왔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 부분에서 이와이 슌지와 주인공 오토사카는 일치된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영화 속 남자 오토사카를 넘어 이와이 슌지에게 동일시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군. 저 자(者)도 괴로운 심연으로 살아왔군, 젊은 시절 한때의 성공을 넘어서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면서 살아왔군, 그게 잘 안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모두가 안고 살아가는 트라우마를 슌지 역시 앓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된다. ‘라스트 레터’는 이와이 슌지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영화적 자서전 같은 작품이자 우리 모두의 숨겨진 일기 같은 영화이다. 오토사카가 이와이 슌지 자신을 얘기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영화는 여러가지가 ‘훅’ 들어온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왜 일본 혼슈(本州) 미야기현의 센다이 시(市)인지도 알게 된다. 센다이는 이와이의 고향이다. 자신의 얘기를 하려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가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종의 귀소(歸巢) 본능인 셈이다. 오토사카가 미사키를 왜 25년간 사랑해 왔는지도 알게 된다. 이와이 슌지가 ‘라스트 레터’를 만든 2020년은 ‘러브 레터’를 만든 지 딱 25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극 중 인물들이 왜 그렇게 엇갈리는 손편지를 주고받는지도 이해가 간다. 이건 ‘러브 레터’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와이 슌지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배우들을 캐스팅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러브 레터’의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가 이번 영화에서 단역으로 나오는 것, 심지어 ‘러브 레터’에 나왔던 코요카와 에츠시가 이번 영화에서 미사키의 나쁜 남자이자 전 남편인 아토로 나오는 것도 심상치 않다. 이와이 슌지에게 있어 전작인 ‘러브 레터’는 이제 나쁜 기억 혹은 아픈 기억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영화 ‘라스트 레터’의 사실상 주인공 토노 유리, 곧 미사키의 여동생 역으로 마츠 다카코가 캐스팅된 것은 그녀가 슌지의 또 다른 히트작 ‘4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와이 슌지는 이번 영화로 자신의 최고 히트작인 ‘러브 레터’의 동어 반복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에 대한, 자신의 영화적 초심(初心)과 영화에 대한 오래고 오랜 뜨거운 사랑을 복원시키고자 한다. 그 노력이 왠지 눈물겹다. 극 후반에 오토사카는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여자 미사키의 딸 아유미와 반대로 자신을 평생 흠모하고 짝사랑했던 미사키의 여동생 유리의 딸(모리 나나)을 아날로그 스틸 카메라로 한 컷에 담는다. 두 아이는 사진 속에서 각자 우산을 들고 아주 적당한 사이를 둔 채 밝고 포근한 분위기로 서 있다. 마치 이와이 슌지가 자신의 예전 영화 ‘러브 레터’와 새 영화 ‘라스트 레터’가 그렇게 서 있기를, 그렇게 공존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와이 슌지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진다. 영화 좋군요. 맞아요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만나야죠. 그렇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죠. 걱정마시길. 지금까지처럼만 영화를 만드시길. 영화감독이 매번 걸작과 흥행작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란 점을 받아들이시길. 끝까지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면 결국 모든 것이 소통될 것이라는 점을 믿으시길. ‘라스트 레터’는 슬픈 연가이다. 한 영화감독이 25년간 영화를 사랑해 왔음을 고백하는 이야기이다. ‘라스트 레터’를 보면서 마음이 촉촉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앞선 부모들이 늘 그렇게 말씀하시며 살았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었던 세대였던 만큼 하루하루가 위태로웠을 것이다. 눈앞에서 코 베어가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기대했던 삶의 해결방식은 양심이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원. 근데 그 기준은 늘 애매했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해결하는 게 다였다. 상식은 기준이 없다. 원칙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 ‘상식’으로 분쟁이 해결될 때가 적지 않았다. 일종의 ‘무질서의 질서’인 셈이다. 지금은 오히려 ‘질서의 무질서’의 행태들이 넘쳐 나고 있지만. 영화평론가인 만큼 이번 달은 영화 얘기를 두어 편 하겠다. 하드 보일드 작가로 유명한 미국 보스톤의데니스루헤인은 지금까지 연인 탐정 ‘켄지&제나로’ 시리즈를 딱 5권만 썼는데 그중 꽤나 유명한 작품이 '가라 아이야 가라, Gone baby gone' 이고 2007년 배우 벤 에플렉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주인공 패트릭켄지 역은 케이시에플렉이, 앤지 제나로는 미셸 모나한이 했다. 이 소설과 영화의 핵심은 4살짜리 아이 아만다의 유괴범을 잡는 일인데 처음엔 미해결로 보였던 (그래서 아이가 이미 사망한 것으로 종결처리된) 사건이 또 다른 유괴 살해사건과 연결되면서 우연히 실마리를 찾는다. 문제는 진짜 유괴범이 사회적으로도 명망이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고 정작 친엄마 헬렌(에이미 라이언)은 마약중독에 난잡한 성생활, 마약 조직과도 연관이 있는, 양육에는 최악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서로 지독하고 쿨(cool)한 사랑을 나누기로 유명한 켄지와제나로는 이 일로 부딪힌다. 제나로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 사건을 이대로 놔둬야 한다고 말한다. 켄지는 법리의 원칙대로 유괴자를 경찰에 신고하고 아이는 친엄마의 품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 둘은 결국 이 일로 오랜 파트너 생활을 정리한다. 김학의 사건을 두고 법을 수호합네 어쩌네 하면서 법리 공방에 나서 있는 일부 일선 검찰들께서는 실체적 범죄가 어떻든 그 범죄를 가리는 절차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의 행복이 중요한지 아이를 둘러싼 범죄를 소명하는 게 더 중요한지에 대한 켄지와제나로의 논쟁과 얼핏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소설과 영화 속 켄지와제나로는 둘 다 목적이 순수하다. 그게 돌아가는 길이건 지름길이건 모두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각자의 고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학의에 대한 법적 절차 논쟁은 켄지나제나로와 달리 한쪽의 의도가 순수치 못하다. 여기엔 단지 큰 범죄와 작은 범죄가 있을 뿐이며 작은 범죄가 큰 범죄와 연동돼서 일어난 일이다. 당연히 큰 것 먼저 잡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세상은 상식적으로 움직여져야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는다. 인간들이 양심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된다. 얼굴도 다 공개됐는데 식별할 수 없다며 무죄, 출국 금지를 시킨 것이 절차상 하자가 있는 식으로 온갖 판례를 일방적으로 동원해 또 방면하려는 의도는 상식적이지 않다. 세상은 상식이 움직여야 한다. 국민은 개 돼지가 아니다. 영화 얘기 하나 더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부 시리는 1, 2, 3으로 돼 있다. 한편 모두 걸작이지만 역시 1편이 최고다. 1편에서 주인공 대부 비토꼴레오네(말론 브란도)는 뉴욕 채과상 앞에서 총을 맞는다. 총상에서 가까스로 회복은 했지만 큰 아들은 죽고 막내 아들마저 곁을 떠나 있는 걸 알게 된비토콜레오네는 수십년은 더 늙은 얼굴과 표정으로 미국 내 모든 패밀리들의 회합을 주도한다. 그는 모든 것을 협조하겠다고 약속한다. 마약을 매매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상관 안하겠다고 한다. 매춘으로 돈을 벌겠다고 하면 그것도 용인하겠다고 한다. 그의 조건은 단 하나다.시칠리에 있는 아들 마이클을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이클이 돌아 오는 길에 많은 일들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만에 하나 그 아이의 머리에 번개가 떨어진다 해도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오.” 자리가 숙연해진다. 아들 마이클은 무사히 뉴욕으로 복귀한다. 각 패밀리들은 서로의 아이들과 여자들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룰을 지킨다. 아이들만큼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상식 중의 최고 상식이다. 그래서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곽상도와 나경원은 그런 점에서 상식적이지 않다. 곽상도는 오래 전 유서대필사건을 조작해 강기훈을 장기간 투옥시킨 사람이다. 그런 정도의 범죄를 저질렀고 세상이 다 알고 있으면 조용히 세상 한켠에 물러나 있어야 한다. 다시 정쟁을 일으키며 대통령 아들의 있지도 않은 특혜논란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하려 하지말아야 한다. 인간이 양심이 있어야지 원. 곽상도는 상식의 이름으로 처벌돼야 한다. 그는 그 때를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나경원은 다른 건 다 몰라도 두 가지 점에 있어 상식의 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는 본인의 아이 문제다. 법적으로 다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해도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어떻게 해서 아이의 성적이 D학점에서 A학점으로 고스란히, 여러 과목이나 조정될 수 있었는지. 본인 만큼은 잘 알 것이다. 나경원은 조국과 어렸을 때 학교를, 그것도 같은 과를 다닌 적이 있다. 흔히 얘기하는 친구인 셈이다. 같은 학번 동기이다. 그러니 친구의 자식을 건드리는 것은 아니다. 그건 뉴욕 마피아들도 안하던 짓이다. 골목 깡패, 양아치 짓이다. 그러니 나경원 역시 한켠에서 입 다물고 조용히 살아 가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사람이 양심이 없다. 상식을 못배워서일 수도 있겠다. 세상은 전문가가 움직이지 않는다. 테크노크라트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다. 상식을 지닌 보통 사람들, 제너럴리스트들이 궁극적으로는 지배한다. 지금 세상이 복원해야 할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국민들은 개 돼지가 아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생각하는 영장류이다.
재미교포 2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 ‘미나리’가 골든글로브 시상식 부문에서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것을 두고 인종차별, 영어중심주의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골든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HFPA)는 3일(현지시간) 제78회 골든글로브상 후보작을 발표했다.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가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지명되는데 그쳤다. 오는 3월 국내 개봉을 앞둔 ‘미나리’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낯선 미국 아칸소로 이민을 떠난 한국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배우 스티븐 연과 한예리, 윤여정이 출연했다.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의 제작사인 플랜B가 제작했고, 정이삭 감독과 공동제작자이자 주연을 맡은 스티븐 연이 한국계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로 지명됐다. 이는 대사 중 50% 이상이 영어가 아닌 경우 외국어 영화로 구분하는 골든글로브의 규정 때문이다. 미국에 뿌리 내린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고, 제작에 참여한 이들이 한국계 미국인인데도 영화 속 대화가 한국어로 이뤄진다는 이유로 인해 ‘미나리’는 영어중심주의 골든글로브 벽 앞에 가로막혔다. 이번 골든글로브 시상식 후보 발표 직후 외신도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LA타임스는 “‘미나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골든글로브 규정보다 더 낫게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고 평가했고, 뉴욕타임스(NYT)도 “바보같이 보이게 했다”며 HFPA의 선택을 비판했다. 세계 영화산업 중심지인 할리우드는 그동안 비영어권 영화에 유독 배타적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지난해, 영화 ‘기생충’으로 언어 장벽과 완고한 백인주의 벽을 깨며 해외 유수 시상식에서 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 그 역시 한국영화가 지난 20년간 오스카 시상식에 입후보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질문에 “오스카(아카데미) 시상식은 지역 축제일 뿐”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비판의 목소리는 미국 내에서도 흘러나왔다. 영화 ‘조커’로 2020년 제73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호아킨 피닉스는 당시 기쁨을 표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혼란스럽다. 대우를 받아야할 동료 연기자들이 나와 같은 특권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자신도 인종 문제에 속해있는 일부이며, 떳떳하지 못하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유색인종의 사람들에게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 같다. 억압적인 구조를 제거하는 것은 차별을 만들고 혜택을 받은 사람들의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문턱을 낮추면 외국작품 수상이 늘어날 수 있어 산업적, 국가적 차원에서 스스로 전통적인 원칙을 바꾸지 않는 이상 쉽지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내다보며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것도 좋은 성과”라고 이야기했다. 정이삭 감독은 미나리의 질긴 생명력과 적응력이 마치 가족과 닮았다며 ‘가족간의 사랑’에 빗대어 표현했다. 영화 속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란다’는 메시지와 달리 해외에서는 아쉬움을 느낀 평가를 받았으나 ‘기생충’의 이어 한국영화의 명성을 이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돈? 권력? 종교? 법? 뜻밖의 공포영화 ‘모츄어리 컬렉션’을 보면 그건 모두 아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스토리다. 이야기이다. 남들의 호기심을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이야기, 그래서 스스로를 바꾸고, 남들을 바꾸고, 결국은 세상까지 바꿀 수 있는 이야기. 스토리야말로 진정한 힘의 원천이다. ‘모츄어리 컬렉션’은 공포영화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오히려 다 저지르고 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점점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매력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무섭지 않다. 그다지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 다만 표현 수위가 나름 높다는 것뿐인데 그 정도는 공포보다는 쾌감의 수준이다. 공포영화가 가장 공포스러울 때는 무섭지 않을 때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그런 불문율도 이 영화에서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하나도 무섭지 않은 반면 매우 흥미로운 스토리로 진행된다. 그것이야말로 ‘모츄어리 컬렉션’의 특징이다. 이 영화의 골조는 기본적으로는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옴니버스 형식이다. 짧은 이야기가 잇따라 이어지며 그 얘기마다는 연결 고리가 없다. 아니 없는 척 한다.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전체 이야기는 마치 뫼비우스 띠와 같은 것이다. 처음은 끝에 연결돼 있고 휘어져 가는 이야기의 과정 끝은 또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근데 그건 지어낸 것들인가, 아니면 진짜 있었던 것들인가. 사실 그 문제는 중요하지가 않다. 그보다는 상대를 몰입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런데 그건 어찌 보면 영화라는 것 자체의 운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얘기가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그럴듯한 가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얼마나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는 가이고 결국 그들로 하여금 홀딱 넘어가게 만들 수 있느냐이다. 그런데 ‘모츄어리 컬렉션’을 보고 있으면 특이하게도 영화가 지닌, 그같은 숙명 자체에 대한 약간의 시니컬한 기분도 느껴진다. ‘영화가 꼭 재밌기만 해야 하니?’라는 질문도 담겨져 있다. 할리우드 너희들, 그렇게 재미 재미 노래를 부르더니 남은 게 뭐였니, 하는 힐난의 표정이 느껴진다. ‘모츄어리 컬렉션’은 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영안실의 수집품’들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장의사가 채집해 놓은 이야기 보따리란 뜻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시체들은 모두 자기들만의 사연을 하나씩 다 갖고 있기 마련이고 그걸 아는 사람은 바로 장의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장의사 다크(클랜시 브라운)는 막 어린아이의 영결식 진행을 끝낸 참이다. 그의 추도사가 ‘투 머치(too much)’였던 탓에 사람들은 매우 불편한 기색으로 돌아간 직후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젊은 여성이 슬픈 표정으로 아이의 관을 열어보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샘(케이틀린 커스트)이고 알고 보니 직원 채용 표지판을 보고 들어온 여성이다. 이때부터 다크와 샘의 수다가 시작된다. 정확하게는 다크의 일방적인 얘기가 펼쳐진다. 그는 여자를 신규 직원으로 채용할 결심이며 그녀에게 장례식장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주구장창 늘어놓을 생각이다. 그래서 이런 얘기도 있었지, 저런 일화도 있었지 등등 1화, 2화, 3화를 지껄인다. 마지막 4화, 곧 대미는 샘이 직접 장식한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야말로 이 영화가 지닌 재미의 극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전의 묘미를 보여준다. 아하 그렇단 말이지. 그랬었단 말이지, 하게 된다. 무릎을 철썩 치게 만든다. (샘이 왜 처음에 관을 열어보려고 했는지 그 짧은 순간의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모든 장르 영화는 트릭을 하나씩 숨겨 놓고 있고 그걸 알아차리는 것은 사실 쏠쏠한 재미를 준다.) 1화에서 3화까지 전개되는 다크의 방담(放談)이 한 단계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되는 게 흥미롭다. 1화를 얘기해 주자 샘은, 아 그건 별론데요 한다. 2화에서 다크는 강도를 좀 높이고 3화에서는 아예 쭉 끌어 올린다. 사실 관객들도 1화의 얘기를 보면서는 자칫 심드렁해지기 십상이다. 이거 너무 뻔한 얘기 아냐? 어쩐지 스타급 배우는 한명도 볼 수 없는 B급 공포영화같더라니, 하는 심정이 된다. 인간의 탐욕이 큰 화를 부른다는, 교과서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화장실에는 늘 괴수가 숨어서 살고 있다는 ‘전설의 고향’식 스토리이기도 하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주인공 남자의 비뚤어진 성적 쾌감의 욕망을 비꼬는 2화의 이야기는 이게 공포영화인지 코미디인지를 다소 헷갈리게 만들 정도다. 남자는 그 벌로 여자에게 ‘감염’이 됐고 그래서 임신을 하게 된다. 이 남자는 결국 애를 낳다가 배가 터져 사망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조금 미안하게도’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1980년대식 AIDS에 대한 편견과 그에 준하는 사회적 공포 의식이 어쩌면 유치하고 마초적인 남성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비롯됐고 어떤 의미에서 그 벌을 저렇게 처절하게 받았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3화에서는 식물인간으로 살아가는 아내를 10년 간 간호해 온 남편이 결국 그녀를 살해하려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엘리베이터에서 정신줄을 놓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에피소드는 결코 코믹하지 않은 바, 오랫동안 부부생활을 해 온 커플들에게는 역설의 공감(共感)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누군들 ‘저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안 해 본 부부란 없을 것이다. 다만 저걸 저렇게 대놓고 얘기하니, 이상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통한 대리만족이 없는 한 현대사회에서는 부부의 비극이 속출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늘 그렇게 위선의 간극을 오가며 살아가는 존재다. 마지막으로 견습생 샘이 장의사 다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가 본체이다. 그 스토리에는 피 터지는 살육전이 전개되는데 사실 이야기가 뒤집혀져 있다. 진짜가 가짜이고 가짜가 진짜이다. 눈썰미가 강한 관객은 왜 베이비시터인 샘이 아이 부모의 전화를 앤서링 머신으로만 듣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것이다. 직접 통화를 하지 않고. 그 부분을 유의 깊게 되짚어봐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훅 이해가 된다. 자, 모든 건 스토리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스토리로 엮어내는 콘텐츠이며 그것을 있게 하는 궁극의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 시인의 사회다. 상상력을 고갈시키게 만드는 세상은 쓰러져 가는 고목(古木)의 사회다. 세상은 정경사(政經社)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건 닫힌 사회다. 발칙한 상상력의 이야기들로 세상을 자꾸 열어가야 한다. 한국사회는 지금 닫힌 사회인가, 열린 사회인가.
3대가 모인 가족 조찬에서 할머니인 릴리(수잔 서랜든)와 손자인 조나단(앤슨 분)의 대화가 흥미롭다. 손자가 묻는다. “할머니는 내게 줄 유산이 많아요?” 릴리의 대답이 걸작이다. “내가 주는 돈을 매춘부와 마약 사는데 쓴다고 약속하면 네게 주마.” 가족들 모두 왁자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할머니는 우드스탁 세대, 곧 히피 세대다. 손자는 래퍼들의 세대이고. 그 세대간 간격을 ‘불경한(?)’ 농담으로 해소한다. 할머니 릴리는 자신과 같은 세대이자 오랜 친구이고 남편의 사실상 연인이기도 한 리즈(린제이 던컨)와 해변을 거닐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집안에 레즈비언 한 명 정도는 있어야 좋지. 안그래?” 릴리의 둘째 딸 안나(미아 와시코우스카)는 게이다. 그녀는 이번 주말 자신의 파트너인 크리스(벡스 테일러 크라우스)와 함께 엄마 집을 찾았다. 가족 간의 대화가 이 정도로 자유스러우면 좋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적 상상력만으로라도 이런 대화를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유머와 풍자를 잃고 비뚤어진 종교적 신념과 위선적인 순결주의, 기계적인 양성 평등주의와 역사적 순혈주의만을 강조하느라 경화(硬化)된 사회는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지 못한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그렇다. 상상력을 복원시켜야 한다. 정치적 상상력, 경제평등주의의 상상력, 사회주의적인 상상력 등등. 대중들에게는 ‘노팅 힐’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은근히 사회적 소재를 영화로 만들기를 즐기는 영국 로저 미첼 감독이 만든 ‘완벽한 가족, Blackbird’은 독특한 영화다. 이 영화 속 엄마이자 할머니인 릴리는 죽어 간다. 몸의 왼쪽은 오래 전 마비됐고, 서서히 오른 쪽도 말을 듣지 않는다. 남편 폴(샘 닐)이 건네 준 샤도네이 잔을 떨어뜨리기까지 한다. 생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의사인 남편과 진작부터 약속한 일을 실행하려 한다. 그래서 가족들을 모아 만찬을 준비한다. 하지만 예상했듯이 이 ‘거사’는 가족 간의 해묵은 갈등과 논쟁을 유발시킨다. 릴리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인가. 무엇보다 합법적인 것인가. 그녀의 두 딸, 제니퍼(케이트 윈슬렛)와 안나는 이 일로 서로의 입장이 왔다 갔다 한다. 안나는 처음엔 반대하고 제니퍼는 나중에 반대한다. 둘은 엄마인 릴리가 강인하고 독립적으로 키웠다고 생각하지만 제니퍼는 지나치게 원칙적이어서 세상과 가족관계를 자기중심적으로 받아 들인다. 사실은 이기적이다. 안나는 약물중독에다 조울증에 시달린다. 뭘 하나 제대로 끝까지 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사랑에 결핍돼 있다. 하여, 세상에는 완벽한 가족이 없다. 다들 단아하고 단란한, 그럼으로 해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완벽한 가족이 되는 걸 꿈꾸지만 그건 애초에 꿈일 뿐이다. 사실 그같은 욕망은 사회나 국가에도 적용된다. 완벽한 체제는 없다. 그걸 향해 나아갈 뿐이다. 다만 그 나아가는 방향과 방법이 지나치게 기계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무수한 장애에 부딪힐 때 그걸 극복하는 사람은 엄마인 릴리와 같은 자유로운 상상력의 소유자들이다. 사랑을 베풀고 베푼 만큼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사랑이 백해의 약이다. 자유로운 사랑의 관계가 만병통치 약인 것이다. 할머니 릴리 세대, 곧 68혁명 세대는 그 같은 기조의 신념을 이루려고 한때 열심히 싸웠던 인물들이다. 기성의 잘못된 질서를 혁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탈을 감행했던 사람들이다. 릴리는 친구인 리즈의 침실에 늦은 밤 찾아와 말하며 서로 낄낄댄다. “우리가 그때 LSD같은 거 말고 머쉬룸=버섯환각제을 했었어야 했어.” 그리고 곧 축축한 눈망울을 주고 받는다. “애들을 부탁해.” 손자 아이에게 나이 든 사람은 현명한 것이 아니라 현명한 척을 할 뿐이라고 말하는 전전 세대. 청소년 아이에게 허물 없이 너 게이니? 너 트랜스젠더니? 라고 물을 수 있는 할머니 세대. 우리는 오랜 세대의, 오랜 꿈과 이상을 이미 다 상실하고, 망각하고, 무시하고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근데 그건 버려서는 안될 가치였을 것이다. 영화 ‘완벽한 가족’은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시대적 회한에 대해, 그 종말과 새로운 시작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로저 미첼 감독은 자신의 전작이자 2013년작인 ‘위크엔드 인 파리’를 통해 68혁명 시대의 복원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68의 가치는 사회의 모든 지식은 공유되고 계층과 계급 간의 차별은 최소치로 해소돼야 하며 남녀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50년이 넘도록 그 이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당시 세대의 그 정신적 자존감은 이어져 가야 한다는 것을 로저 미첼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영화의 원제가 ‘블랙버드’인 것은 비틀즈가 이 노래를 불렀던 60년대를 잊지 못하는, 그 시대적 격렬함을 추억하려는 감독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이 영화의 할머니 릴리와 손자 조너던처럼. 그녀가 손자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은 릴케의 시집이다. 둘째 딸의 게이 파트너인 크리스는 릴리에게 이런 말로 위로하려 한다. “하루는 너무 천천히 가고 한 해는 너무 빨리 지나가네.” 미국 밴드 마그네틱 필즈의 노래 가사다. 낡은 세대와 어린 세대는 그렇게 소통한다. 소통은 다분히 시적이어야 하는 것이 옳다. 시대의 변화는 꽤나 미학적이어야 성공할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 프랑스 부르고뉴산 피노누아인 쥬브레 샹베르망을 한 병 사서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면 좋을 것인 바, 지나치게 비싸 보이는 만큼 싸구려 술이라도 사서 가족들, 친구들과 나눠 마시면 좋을 것이다. 영화 전편에 흐르는 바흐의 ‘조곡 모음 6번 2악장 알르망드’를 유튜브에서 찾아 들으면 좋을 것이다. 연주는 미샤 마이스키 것이 좋다. 너무 한가한 얘기로 들리는 가. 혁명을 좀 예술적으로, 영화적으로 할 일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팬데믹 시대에 왕가위의 2000년작 ‘화양연화’가 관객 10만 명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역설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세상에 일정한 환멸을 느끼고 있으며 왕가위 식 탐미주의에의 탐닉을 탐욕스럽게 갈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다이즘도 1차 대전 끝의 황량함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나왔다. 지난 4년 간 극우 반동의 광기에 지친 사람들이 이제 쉴 곳이 필요하다고 소리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첸 여사(장만옥)와 차오(양조위)의 이어질 듯 말 듯하는 불륜의 일탈처럼, 지금의 사람들은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을 관조하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영화 ‘화양연화’처럼 정치적인 기호로 가득한 작품도 드물다. 이 영화는 스러져 가는 홍콩의 영화(榮華)에 대한, 그렇게 배신의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왕가위 식의 애처로운 송가(頌歌)이다. 홍콩의, 홍콩에서의, 홍콩을 위한 세상과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그 같은 사랑과 애정은 더 이상 실현되지 않을 거라는 좌절이 담겨져 있다. 그런 정서의 기조(基調)는 왕가위의 또 다른 작품들인 ‘타락천사’와 ‘중경삼림’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화양연화’에서 중요한 정치적 키워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첸 여사와 차오가 만나고 사랑하는 연도다. 그들은 1962년에 만나 1966년 헤어진다. 이 기간은 홍콩 역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기간이다. 1967년의, 이른바 ‘홍콩 봉기’의 전조(前兆)가 짙게 깔리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식민통치를 받았던 홍콩은 값싼 노동력으로 자신들을 착취하던 영국령 정부를 향해 서서히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한다. 대중들의 그 같은 폭발 심리를 뒤에서 지원한 것은 대륙의 중국 공산당 정부였다. 당연히 영국은 이를 저지하고 탄압했으며 냉전 이데올로기의 시기였던 만큼 세계 여론도 홍콩 노동자들에게 백퍼센트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 같은 사회 분위기는 영화에서 첸과 차오가 각각의 배우자들이 불륜을 저지르는 걸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둘의 연애도 결국 끝은 안좋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습과 닮아 있다. 홍콩은 결국 반환될 것인 바 서구 사회와 중국 공산주의 정부 사이에 낀 존재 같은, 실존의 불안감은 영화 속의 두 남녀처럼 오랫동안 홍콩의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때는 영국에 기대 살았고, 또 앞으로는 중국에 기대고 살아야 하지만 궁극으로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파편화 되고 고립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담겨져 있다. 첸 여사는 결국 남편과 재결합한 듯이 나오며 아이까지 낳는다. 차오는 제3세계 급인 싱가폴로 떠난다. 여자는 남자를 따라가지 못하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데려가지 못한다. 둘은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배신하는 셈이다. 이 영화의 또 한 가지 정치적 키워드는 2046이라는 숫자다. 2046년은 중국과 홍콩이 합의한 일국양제가 끝나는 해이다. 영화에서 신문기자인 차오는 (거리의 시위와 소요사태를 취재하기 보다는) 무협지를 쓰는 일에 매달린다. 그는 이 소설을 첸과 같이 쓰는데 그 작업을 하는 공간이 한 호텔의 2046호이다. 그런데 둘은 이 룸에서 섹스를 했는지, 안했는지가 불분명하다. 둘은 결합도 아니고 분리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2046호에서의 밀회를 즐기지만 그건 그 안에서 일이다. 게다가 무협지를 쓰는 일로만 즐거울 뿐이다. 둘의 모습처럼 2046년이 지나면(2046호를 나가면) 홍콩과 중국의 밀애는 사라질 것이다. 더 이상 ‘무협지를 같이 쓰지’ 않을 것이다. 둘은 첸과 차오처럼 갈라설 것이다. ‘화양연화’를 정치적으로 읽어 내는 것은 무상(無常)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결코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 모든 것도 결국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한 일이다. 저쪽과 이쪽 모두 똑같은 자들이 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두 남녀의 사랑이 실패했음을 슬퍼한다. 첸과 차오의 사랑은 이뤄졌어야 했다고 그는 말한다. 사랑이 세상의 진보를 방해하는 적은 없다. 세상이 사랑을 가로막을 뿐이다. 그건 늘 그렇다.
역사는 일상 속에서 반복된다. 2011년 어느 초여름쯤 서울 한남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상을 엎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이 있다. 10년이 된 얘기지만 40대 후반의 나이였을 때니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기억하기로는 그 자리에 꽤나 스노비시(snobbish)한 인간들이 모였었는데 건축가 변호사 방송인 패셔니스타 시인 등등이 있었을 것이다. 장소도 한남동 유엔빌리지 근처였다. 비교적 여유가 넘쳐나던 분위기였던 건 불문(不問)이 가지(可知)다. 자연스럽게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이, 무상급식을 놓고 벌인 정치 도박에 대한 얘기가 화제가 됐다. 그중 여자 시인의 말이 화근이 됐다. 그녀가 말했다. “왜 내가 낸 세금으로 강남 집 애들까지도 공짜로 밥을 먹여야 해? 미친 거 아냐?”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없었던 탓에 말을 더듬었고 그런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걸 만회한다며 한 짓이 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뛰쳐 나오고 말았다.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이랬어야 옳았다. 제 정신으로 차분하게. “그럼 한줌도 안되는 강남집 애들 공짜로 밥 먹이는 게 겁이 나서, 대다수 없는 애들, 가뜩이나 못먹는 애들까지 다 굶겨?! 꼭 그래야만 하겠니?!"(김래원 주연의 《해바라기》 버전으로) 그러면 외견상이마 비교적 화기애애하게 자리를 파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여간 그들과는 그날 이후로 만나지 않는 관계가 됐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의자에 걸치고 나왔던 웃옷은 그들이 화형식으로 처형한 것으로 훗날 전해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지못할 해프닝이었고(아무리 논리와 정의가 앞서더라도 술먹고 사고를 치면 안된다는 것은 고금의 진리이다.) 매우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이슈가 다시 부활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재난지원금을 두고 선별지급이냐 전국민 지급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물론 10년 전의 무상급식 논쟁과 지금의 재난지원금 논쟁을 등가비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정서적으로는 비슷하다고 본다. 내가 낸 세금을 가지고 왜 강남에서 카페하는 사람들한테까지 돈을 줘야 하느냐 하는 얘긴데 걔네들 안 주려고 지금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자영업자들, 그들의 가족까지 굶겨야 하는가. 그러니 다시 똑 같은 마음으로 상을 뒤엎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알기에는 정부 신문인 서울신문은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때는 본인들로서는 정부의 눈치를 안볼 수 없다며 어쩔 수 없이 정부 나팔수 노릇을 한다고 엄살을 부렸다. 요즘 들어서는 연일 반정부 기사를 내기에 바쁘다. 원래 그들이 어느 쪽 라인에 줄을 대 왔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쨌든 어느 쪽이 됐든 설득력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의 1월 8일자 기사 ‘국민 반대하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 與 재보선 앞두고 또 포퓰리즘 병’은 국민정서는 물론 사실에 기초한 기사도 아니었다. 그냥 홍남기 병에 걸린 것일 뿐이다. 문재인 국정 지지율을 항상 가장 낮게 조사한다는 오해를 받아 종종 공격을 받고 있는 리얼미터의 1월 6일 조사조차도 애써 무시하고 있는 기사이기 때문이다.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재난 지원금 전 국민 지급에 찬성하는 응답이 전체의 68.1%가 나왔다. 작금의 일부 언론, 보수 언론이 국민을 우습게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얘기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 의료계와 교육계를 싹 뜯어 고쳐야 하지만 거기에 가장 앞서서 해 내야 할 개혁을 넘어선 혁명의 대상은 언론이다. 신문과 방송, 유투브, 팟캐스트 등등 전 언론에 대한 사회적 감시의 신경망을 올바르게 구축해 내지 않으면 사회 개혁은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영화를 많이 본다고 한다. 코로나19 이전에 극장이 뚫려 있었을 때는 천만 관객의 영화가 심심치 않게 나오곤 했다. 5천1백만 인구의 나라에서 영화 하나에 천만 명이 몰린다는 건,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요즘처럼 극장이 ‘봉쇄’돼 있을 때조차, 사람들은 온갖 온라인 도구들을 동원한다. 질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넷플릭스의 국내 가입자가 전년 대비 두배에 해당하는 360만을 넘어섰다는 것은 기록할 만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왜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가. 언론이 제 기능을 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교육이 자꾸 뭔가를 빠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정의와 진리를 알아가고 배워 나가는데 있어 결핍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산의 부장들》에 사람들이 몰리고 시즌 드라마 《킹덤》이 어마어마한 인기를 모으는 것이다. 아마도 2,3년 안에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접대 의혹과 관련해서는 영화가 먼저 진실을 밝혀낼 것이다. 어느 쪽으로든. 옵티머스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근데 이게 원래는 다 언론이 해내야 하는 일들 아닌가? 부끄럽지도 않는가. 배두나 주연의 프랑스 영화 《아이 엠 히어》에는 인천공항과 서울이 참 예쁘게 그려진다. 할리우드 리들리 스콧은 그의 걸작 《블레이드 러너》에서 일본의 문화를 대놓고 그린다. 스콧은 이후 《블랙 레인》을 아예 일본 올 로케이션으로 찍기까지 한다.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가 1985년에 만든 《도쿄가, Toko-Ga》를 보면 유럽인들이 일본을 얼마나 경외해 왔는지를 알 수가 있다. 독일에 앞서 프랑스는 그중 단연 선두였다. 그런데 이들이 이제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의 술과 음식, 노래와 영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됐음을 영화 《아이 엠 히어》는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 강남 애들 안 먹이려고 모든 애들 굶기자는 식의 해괴한 논리를 갖고 사는, 비뚤어진 기득권 사람들은 한국의 국격이 올라가는 것, 우리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향유되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사회가 조금씩 정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 어마어마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는 법이다. 독일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말이다. 영혼이 망가진 자들을 흔히 좀비라고 부른다. 지금 세상엔 좀비가 너무 많다. 좀비는 고칠 수가 없다. 치료할 수가 없다.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그 답 역시 영화에 나와 있다. 인기있는 미드 《워킹 데드》의 주인공들 마냥 좀비와 싸우기 위해서는 뭐든 손에 들고 무장할 일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 할 일이다.
2021년 경기신문의 오피니언 면이 새로운 필진들과 함께 더욱 풍성해집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전문가들이 소소한 일상의 소재에서부터 전문적인 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다채로운 글을 통해 독자 여러분을 만납니다(이하 성명 가나다순). ‘곽노현의 징검다리’는 우리 사회의 법과 정치, 교육의 중요 의제에 대하여 화두를 던지며 독자와 함께 그 실마리를 찾아갈 것입니다. ‘김동민의 아르케’는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규명하려 했던 아르케(만물의 근원이 되는 물질)가 이데아, 존재, 본질, 실재의 규명으로 발전하는 철학적 논리에 기반하여 사회 제반 현상의 본질 내지는 실재를 규명해 갈 것입니다. ‘김민웅의 하늘의 창’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고통과 모순, 그 뒤에 숨어 있는 실체 등 우리의 의식 세계가 빠져 있는 함정에서 우리 삶을 건져낼 방도는 어디에 있는지 인문적 사유, 사회과학적 분석 그리고 철학의 본령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글을 펼쳐갈 것입니다. ‘김수정의 슬기로운 뉴스생활’은 TV나 신문의 뉴스를 습관처럼 보고 읽으며 필요한 뉴스를 공유하는 일이 당연한 시대에 뉴스의 정보와 의견을 따져보고, 뉴스의 출처와 맥락, 내가 믿는 바 등을 확인하면서 뉴스가 만들어 지는 과정을 이해하도록 안내할 것입니다. ‘김주대 시인의 그림’은 시가 문자화된 노래라면 문인화는 시의 시각적 확장이라는 신념에 의거해 삶의 노래를 그림으로 표현할 것입니다. ‘김형배 공동선’은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시민사회의 대응전략에 대해 성찰하면서 공동선 도출을 독자와 함께 모색해 갈 것입니다. ‘오동진 칼럼’은 영화평론가가 바라 본 세상과 영화를 통해 세상을 읽는 방법을 안내함으로써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하여 생각하기를 제안할 것입니다. ‘오세훈의 온고지신’은 동서양 고전과 다양한 고사들을 소재로 하여 오늘의 시대적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답을 찾아 갈 것입니다. ‘우희종의 생명이 답이다’는 코로나 사태까지 불러 온 인류세의 위험사회에 대응하여, 단순한 생태주의를 넘어 생명 행복사회를 위해서 필요한 현장의 ‘생명정치’에 대하여 제안할 것입니다. ‘위영금의 시선’은 음식으로부터 일상사에 이르는 다양한 소재를 매개로 남북한 문화의 같은 점과 다른 점에 대하여 필자의 시선(탈북자의 시선)으로 다루어 갈 것입니다. ‘이건행 칼럼’은 현상 아래 속살을 보다 풍부하게 들여다보기 위하여 인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사회-정치적 현상, 그 이면에 대한 글쓰기를 펼쳐 갈 것입니다. ‘임형진의 맷돌고성’은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역사적 사건과 대비시키면서 정치적 입장에서 풀고 해석해 갈 것입니다. ‘조준용의 숨n쉼’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몸과 맘이 지친 시기에 컨디션 조절, 면역력 향상 및 다이어트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운동 방법과 운동 효과를 소개하면서 운동이 왜 최고의 선물인지 깨우쳐 줄 것입니다. ‘최광범의 미디어 비평’은 신뢰도 꼴찌의 한국 언론에 대하여 왜 그런지를 추적해 갈 것입니다. ‘최영의 달리는 열차 위에서’는 “달리는 열차위에 중립은 없다”는 하워드진의 말처럼 기관사의 입장에서 불공평한 삶의 민낯을 투박하게 그려낼 것입니다. ‘최영묵의 미디어 깨기’는 오욕과 상처뿐인 영광으로 점철된 한국 언론 미디어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혁신과 개혁 방향을 중심으로 그 미래를 조망해 갈 것입니다. ‘최진자의 바로 보는 세상’은 세상 이야기를 또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에 대하여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제안할 것입니다. ‘한일수의 관규여측’은 일상에서 만나는 소소한 이야기와 함께 한의학에 대하여 소개할 것입니다. ‘홍숙영의 젠더프리즘’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를 젠더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며 대안을 모색해 갈 것입니다. 이상 열아홉 명이 참여하는 2021년 경기신문 오피니언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가 제작한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가 31일 온라인을 통해 최초 개봉된다. ‘족벌 두 신문 이야기’는 지난 3월과 4월 창간 100년을 맞이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감춰진 역사와 이들의 현주소를 다룬 블랙코미디 형식의 다큐멘터리 영화다. 앞서 국정원 간첩조작사건을 다룬 ‘자백’, 정부의 언론장악을 폭로한 ‘공범자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 ‘김복동’, 대한민국 핵발전의 현주소를 직시한 ‘월성’을 만든 저널리즘 다큐의 명가 뉴스타파의 다섯 번째 장편 다큐 영화로 김용진, 박중석 기자가 연출을 맡았다. 영화는 총 168분 분량으로 ▲1부 조선·동아일보가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한 행적 추적을 다룬 ‘앞잡이’ ▲2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권력과 야합하고 결탁한 과정을 그린 ‘밤의 대통령’ ▲3부 1987년 이후 두 신문이 스스로 권력집단이 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한 ‘악의 축’으로 구성됐다. 198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누가 더 ‘친일지’고 ‘민족지’인지 다투며 ‘친일 공방’을 벌인다. ‘족벌 두 신문이야기’는 두 신문이 한사코 감추려 한 ‘일제의 앞잡이’ 역사를 추적한다. 개봉에 앞서 30일 김용진 감독과 오동진 영화평론가, 조선희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활동가가 참여한 온라인 GV를 통해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진행됐다.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가 예지력이 있다고 해야하나. 언론개혁이 화두로 떠오른 현재, 개봉했다”고 운을 뗐다. 김용진 감독은 “‘언론개혁’은 늘 염두에 둔 프로젝트이고, 지난해 연말에 영화를 만들어보겠다고 계획했다”며 “2020년이 두 신문의 창간 100년이 된 해인데 기대와는 달리 반성도 없이 신년호에서 ‘민족의 등불이었다’ ‘민족 정론지’라고 자화자찬하더라. 다른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두 신문사뿐 아니라 참담한 지금의 언론환경을 다룬 것”이라며 “가짜뉴스 등 언론에 대한 불신의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가기 위한 내용이다”라고 설명했다. 조선희 민언련 활동가는 “언론개혁의 열망이 타오르는 지금, 민언련으로서는 영화개봉이 언론개혁의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희망한다”고 기대를 표했다. 특히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지난 29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영화 개봉소식을 전하며 “풍전등화의 시대에 언론의 개혁이 왜 필요한지, 검찰권력과 사법권력, 종교권력, 엘리트 권력과 함께 왜 동시에 언론개혁이 이뤄져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다큐멘터리”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김중배 기자의 칼럼을 읽고 컸다는 오 평론가는 “그는 이 다큐에서 여전히 일갈하는 대기자의 모습을 선보인다. 그는 지난 100년의 조선과 동아의 역사에 대해 ‘오로지 권력의 편에만 섰던 역사였다. 일제 때는 친일로 해방 후에는 극우보수 세력과 독재 세력에 세상이 바뀐 후에는 자본권력의 편에 서 온 역사’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언론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권력이 될 수 도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언론은 날이 잘 드는 양날의 칼과 같아서 정의를 위해서 쓰여질 때는 역사를 진전케 하는 훌륭한 힘이지만 잘못 쓰였을 때, 권력에 결탁했을 때 폐해는 엄청날 수 있다”고 연설하는 육성이 들린다. 1988년 국회 언론청문회에 출석한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 “어떻게 조선일보가 과거 일제 앞잡이를 했다고 모독하고 매도하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소리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시대적 과제를 던진 ‘족벌 두 신문 이야기’를 향한 독자들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이날 GV는 810명이 넘게 시청했으며, “언론개혁을 하려면 종편 등에서 허위, 왜곡뉴스를 내보내면 거기에 대해 엄중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본다”, “자긍심을 느끼는 언론을 가지고 싶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하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가 될지 보이는데 현실이 안타깝다” 등 목소리를 냈다. 오 평론가가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닌가’, 과연 개혁이 될 것인가하는 의견도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나”라고 질문을 건네자 조선희 활동가는 “영화를 보면서 잘 살고 있는 사주들과 나와서 증언하고 있는 해직언론인이 대비돼 한편으로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음성이 마음에 와닿았다”고 답했다. 끝으로 김용진 감독은 “한자를 모르는 세대도 볼 수 있도록 편집했다. 젊은이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고 관심과 지지를 당부했다. ‘족벌 두 신문 이야기’는 31일 온라인 개봉에 이어 1월 1일부터 대한극장, 서울극장, 아트나인을 비롯해 동성아트홀, 광주극장, 광주독립영화관 등에서 오프라인으로 개봉할 예정이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철학자들은 세상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이 말을 정치비평에 적용하면 이렇다. 정치평론가들은 숱하게 정치판을 분석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정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눈꼽만큼도 그러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종편과 유튜버 등 온갖 미디어에서 난무하는 정치비평이 요즘엔 약보다 독이다. 대다수가 윤석렬이 해임에 버금가는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내다 봤다. 틀렸다. 추미애는 사퇴하지 않을 것이며 혹은 대통령이 사의를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틀렸다. 죄 틀린다. 그때마다 대중들이 갖게 되는 실망과 좌절감이 얼마 만한 것인지 그들이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국내 대중들은 한때 개돼지 취급을 받은 적이 있어, 상당히 똑똑해졌다. 그런 만큼 꽤나 흔들리기도 잘한다. 대중들은 더 이상의 분석보다는 행동의 지침을 요구한다. 행동하는 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문학이 종종 고전을 찾듯이 정치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어땠는지를 보면 된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지금의 사회 개혁이 행동주의적 측면에서 당시의 사회주의 혁명의 단초를 모방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는 더 이상 자본가와 노동자의 싸움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박찬욱 초기의 걸작 “복수는 나의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자본가는 싸우지 않는다. 최하급 노동자와 조금 나아진 노동자의 대리전이 있을 뿐이다. 그만큼 사회가 복잡해졌다는 얘기고 그런 식으로 싸움의 전선이 만들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영화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특히 지금의 한국사회는 기득권 대 反기득권의 진정한 투쟁 국면으로 접어 들고 있다. 여기에 따라 진영을 나눠야 한다. 기득권층은, 요즘 너무도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정치검사집단 그리고 의사, 대형교회 목사, 폴리페서들, 무엇보다 언론 카르텔이다. 그들과의 전면전이 요구된다. 이중에서 검찰과 언론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없이는 한국사회가 더 이상은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절감하고 있다. 검찰 조직은 한마디로 조폭 조직과 같다. 그러나 영화 속 마피아처럼 멋이 있거나 의리가 있거나 하는 쪽과는 거리가 생긴지 오래다. 양식과 양심을 버린 지도 오래다. 검찰의 수장이라는 총장부터 선출된 권력인 문민 통제를 거부하고 나선다. 그건 쿠데타를 일으키는 군인들과 같다. 지금이 12.12 때인가. 게다가 그런 검찰을 언론이 철저하게 지원한다.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민중들의 자각과 행동 외에는 없다. 이제는 행동할 때인 것이다. 진정으로 무엇을 할 것인 가를 고민해야 할 때인 셈이라는 얘기다. 특히 언론을 바꿔야 한다. 지금의 언론은 더 이상 자성을 기대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케빈 맥도널드 감독의 2009년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현재 상황)”에서 워싱턴 글로브 지 기자(러셀 크로우)는 자신을 막아서려는 정치인 친구(벤 에플렉)에게 이렇게 말한다. “왜? 이제 아무도 신문을 읽지 않아서? 며칠 시끄럽다가 말 거니까? 그래도 난 믿어. 독자는 진정한 기사와 쓰레기를 구분할 줄 아니까. 누군가는 진실을 써주길 원할 거라는 걸.” 이런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젠 헛웃음이 나온다. 우리에게 이런 영화는 이제 판타지물에 불과하다. 어두운 세상이로다.
경기도가 그동안 고난위 업무에도 불구하고 홀대받던 소방관 처우개선에 팔을 걷어 붙였다. 이를 위해 도는 소방관의 근무여건 개선을 위해 방화복 전용세탁기와 세탁물 건조기를 확대 지급한다고 26일 밝혔다. 도는 1회 추경예산안에 관련 사업비 13억 원을 반영했으며 다음 달 도의회 임시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는 대로 집행한다. 도내 전체 34개 소방서를 대상으로 방화복 전용세탁기 41대(9천900만 원), 세탁물 건조기 336대(3억6천960만 원), 개인안전장비 보관함 2천775개(8억3천250만 원)를 설치한다. 세탁물 건조기 보급은 이번이 처음으로 171개 안전센터, 69개 구조구급대, 62개 지역대 등에 336대가 지원된다. 방화복 전용세탁기는 아직 설치되지 않은 41개 지역대에 보급된다. 일반 세탁기에서는 세탁통이 회전하면서 발생하는 원심력 때문에 방화복이 손상될 수 있어 소방서에서는 전용세탁기를 사용해야 한다. 화재현장에서 한 번 사용된 방화복에는 폼알데하이드 등 유해물질이 남아있어 세탁이 제대로 안 될 경우 각종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 소방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지난 12일 민간보트 구조작업 중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 김포소방서 고(故) 오동진 소방위·심문규 소방장 합동영결식에서 “슬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며 “고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도지사가 가진 모든 권한을 사용해 더 나은 소방안전의 기틀을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행동에 옮기고 있다. /최준석기자 jschoi@
“무겁고 아팠던 것들을 훌훌 벗어 버리고 따뜻한 온기와 아름다운 마음만을 품고 새로운 세상에서 편히 영면하시길….” 한강 하류에서 구조작업 출동 중 보트가 뒤집혀 순직한 소방관 2명에 대한 눈물의 영결식이 16일 가족과 동료 소방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수됐다. 이날 오전 10시 김포시 김포생활체육관 강당에서는 지난 12일 구조작업 중 순직한 고(故) 오동진(38) 소방위와 심문규(38) 소방장의 합동영결식이 경기도청장(葬)으로 진행됐다. 영결식에는 유가족과 고인들의 친구, 동료 소방관, 이재명 경기도지사, 홍철호 국회의원, 김두관 국회의원, 정하영 김포시장, 의용소방대원 등 1천200여명이 참석했다. 고인들의 유해가 생전 근무했던 김포소방서 수난구조본부를 들렀다가 영결식장으로 입장하자 뒤따른 유족 사이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들과 임용 동기로 김포소방서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갑내기 손석중 소방교는 조사를 통해 “6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힘들고 고된 현장에서 어머니와 어린 쌍둥이 자녀들을 그리며 꿋꿋히 돌아왔던 동진, 문규 친구들아!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다면 손 한 번 더 꼭 잡아 줄 걸”이라며 “나의 소중한 친구 동진아 문규야 사랑한다”며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국화 속에 둘러쌓여 웃는 모습을 보이는 두 고인에게 동료 소방관들은 “거센 물 속에서 헤매며 끝내 주검으로 돌아온 너희들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달라”며 “우리들 가슴에 영원한 소방인으로 가슴에 묻는다”라고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아들을 품에 안고 남편의 영정에 헌화하던 심 소방교의 아내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했고, 생후 16개월 된 쌍둥이 아들은 천진한 얼굴로 아버지 영정을 바라봐 주변을 눈물짓게 했다. 이 지사가 장의위원장을 맡아 경기도청장으로 치러진 합동영결식은 고인들에 대한 묵념과 약력보고, 1계급 특진 추서와 공로장 봉정, 영결사, 조사, 헌시낭독, 헌화 및 분향 등 순으로 진행됐다. 이 지사는 영결사에서 “고인들의 고결한 희생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마음깊이 새기며 더 나은 경기도를 가꾸겠다”며 “경기도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구조에 나서는 모범을 보여 주신 진정한 영웅의 표상인 고인들의 영면을 빈다”고 애도를 표했다. 영결식이 끝나고 오 소방장과 심 소방교를 태운 운구차는 세종시 은하수 공원화장장으로 향했다. 이들의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 소방청은 구조 출동 중 순직한 이들을 1계급 특진하고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했다. /김포=천용남기자 cyn5005@
경기도는 지난 12일 구조작업 중 순직한 고(故) 오동진 소방위와 고(故) 심문규 소방장의 합동영결식을 16일 오전 10시 김포 생활실내체육관에서 경기도청장으로 개최한다고 15일 밝혔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장의위원장을 맡고 김희겸 행정1부지사·김진흥 행정2부지사·이화영 평화부지사가 부위원장을, 실·국장 및 김포소방서장 등이 각각 장의위원을 맡았다. 이에 따라 도는 순직소방관 영결식 거행 후 이들을 대전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1계급 특별승진 및 옥조근정훈장 추서, 국가유공자 지정 추진 등을 통해 이들의 희생을 기린다. 도는 또 홈페이지에 ‘순직소방관님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페이지를 개설했다. 도청 직원들 역시 근조 리본을 착용하며 애도주간을 운영하는 등 명복을 빌고 한마음으로 애도하고 있다. 고인들은 모범공무원 표창을 받는 등 동료 소방관 사이에서도 귀감을 받아왔다. 오 소방위는 수난구조 전문대원으로 항해사 특채로 임용된 뒤 지난해 11월까지 양평수난구조대 근무하다 김포서 수난구조대로 이동한 베테랑이었으며 심 소방장도 항해사4급, 동력수상레저기구조종 2급 등 수난구조 분야 자격증을 보유한 전문요원이었다. 이 지사는 지난 14일 “살아 돌아오시길 기도했는데 우리 곁을 떠나게 돼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며 “두 분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도 소속 모든 공직자가 한마음으로 추모하고 희생자 가족 위로와 영결식 준비 등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양규원·최준석기자 ykw@
지난 12일 민간인 보트가 위험하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하던 중 구조 보트 전복사고로 순직한 김포소방서 고 오동진 소방위와 심문규 소방장의 합동영결식이 오늘(16일) 오전 10시 김포 생활실내체육관에서 경기도청장으로 개최된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장의위원장을 맡고 김희겸 행정1부지사·김진흥 행정2부지사·이화영 평화부지사가 부위원장을 맡는다. 먼저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바쳐 희생한 두 소방관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유가족들에게 국민들과 함께 위로를 보낸다. 고 오 소방위와 심 소방장은 지난 2012년 6월 나란히 소방관에 임용된 동기였다. 모범공무원 표창을 받는 등 동료 소방관들의 귀감이 됐다. 오 소방위는 베테랑 수난구조 전문대원이었으며. 심 소방장도 수난구조 분야 자격증을 보유한 전문대원이었다. 오 소방위는 미혼으로써 부모님을 모시던 효자였으며, 심 소방장은 돌이 갓 지난 쌍둥이 아이들의 아빠여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하다. 도는 영결식 후 두 소방관을 대전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1계급 특별승진과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하고, 국가유공자로 지정할 방침이다. 당연한 일이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과 그 유족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이뤄져야 마땅하다. 그게 올바른 나라다. 문재인 대통령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오늘 내내 소방관 오동진 님과 심문규 님이 생존해 오시길 기다렸다. 그러나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진다”고 안타까워했으며 “심문규 소방관님의 어린 쌍둥이가 눈에 밟힌다. 두 분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국민을 지키고 구조하는 분들이 충분히 안전조치를 보장받아야 국민들도 더 안전할 수 있다. 소방관들의 안전 대책을 더욱 꼼꼼하게 점검하겠다”고 약속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특히 소방관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근무하고 있는 만큼 그에 합당한 대유를 해줘야 하며 안전하게 구조와 소방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장비도 완벽하게 지원해야 한다. 김부겸 장관이 “소방관의 처우와 근무환경 개선을 위한 국가직 전환에 대해 더욱 힘쓰겠다”면서 “화재나 사고 현장에서 생긴 트라우마로 힘들어 하는 소방관을 위한 ‘복합치유센터’ 건립도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하겠다”고 한 약속이 미뤄지지 않고 확실하게 지켜지길 바란다. 다시 한 번 순직한 젊은 소방관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