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공공기관이나 민간 단체 혹은 기업에서 주최하는 사전제작지원 공모사업에는 적게는 수백 편, 많게는 수천 편의 영화 시나리오들이 쏟아져 들어 온다. 제작 지원금의 규모는 실로 다양한데 단편의 경우에는 수백만원이나 천만원 짜리가 있고 장편의 경우는 1억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작품들이 너무 많다 보니 늘 문제는 심사를 하는 것이다. 심사 의뢰를 받고 자료들을 열람하면 항상 입부터 벌어진다. 이걸 다 언제 보나 싶어서이다. 응모 작품이 많다는 것은 두 가지이다. 영화를 만들겠다, 영화를 업으로 삼겠다, 영화에 일생을 걸겠다는 사람들이 많고,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며 감독의 길이 됐든 시나리오 작가의 길이 됐든 영화계 안으로 들어 오는 등용의 문이 그만큼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영화 인력의 공급이 많다 보니 나눠 써야 하는 물적 토대는 점점 좁아지거나 할당량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그래도 그나마 이런 저런 기관과 기업에서 자금을 투여해서 모자란 제작 자금을 채워 주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년 전만 해도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일이었으며 그만큼 한국의 영화 인더스트리가 선진화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사 과정은 백퍼센트 장담할 수 있는 바, 우리사회의 다른 부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공정이나, 비리는 눈 꼽 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모두 정확하게 심사위원단을 꾸리고 철저하게 블라인드 테스트 방식의 심사를 통해 내용과 그 수준만으로 작품들을 거르고 골라 낸다. 이것 역시 20여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선진화된 측면이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 이른바 K콘텐츠가 잘 나가는 이유가 있다. 기회가 공정하기 때문이다. 응모된 시나리오를, 단편이든 장편이든, 보고 있으면 이게 일정한 트렌드가 있음을 알게 된다. 현재 진행중인 심사 작품들에서는 이상할 만큼 공포와 스릴러 장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예컨대 치매 노인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얘기라 하더라도 이 노인이 무의식적으로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줄거리로 돼있거나 아파트 안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알고 보니 다 죽은 아이들, 그 유령이라는 식이다. 오싹하다. 인간의 비정상성, 공간이 만들어 내는 공포에 대한 주제들을 다루는 작품들이 요즘 대체를 이루고 있다. 학교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내용, 회사 안에서의 왕따, 남자나 여자 상사의 성추행이나 필요 이상의 갑질 문제 같은 것은 오히려 조금 지루한 감이 있다. 한동안 다들 다뤄왔던 얘기들이어서 신선하지가 않다. 2,3년 전의 공모사업에는 이 작품도 동성애, 저 작품도 페미니즘과 여성성에 대한 것이라는 식이었다. 매 년 작품의 트렌드가 바뀌고 있는 것은 영화 작가들의 의식이 늘 변화가 무쌍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건 또 사회의 변화가 그때그때마다 다르게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공포와 스릴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이 사회의 내부가 심상치 않다는 것, 온전치 않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건 일종의 경고음이다. 시그널이다. 영화는 대체로 이렇게 시나리오가 작성되고 빨라야 2년이나 3년의 숙성 과정을 통해 극장용이나 OTT용으로 완성돼 대중 앞에 나서게 된다. 앞으로 2024년이나 5년에 갑자기 공포영화가 쏟아지면 우리사회가 지금 현재, 그러니까 2022년과 23년을 정상적인 상태로 보내지 못했음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이들 시나리오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제작자들이나 투자자들, 프로듀서들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 판단해 용도 폐기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건 반대로 사회가 일정한 자동조절능력, 정상으로의 복원 능력을 회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들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우리 사회의 향방을 읽어 내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공포 영화는 영화들 가운데에서도 그 사회의 내면을 가장 깊숙하면서도 직접적으로 그려 내는 장르의 작품들이다. 예컨대 수많은 뱀파이어 영화, 흡혈귀란 존재의 시작은 18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된 여성성을 드라큘라 백작을 통해 벗어나게 하고 싶었던 해방의 욕망을 그리는 것이다. 여성들은 코르셋에 꽉 묶여 살았으며 루마니아의 트란실베니아에서 온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인 외모의 드라큘라 백작은 그런 여자들의 목에 두 이빨을 박아 넣으며 피를 빨아 먹는다. 그 전 과정의 모습은 공포스럽지만 여성들의 (성적) 해방 욕구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했다. 요즘 등장하는 수많은 좀비영화들도 마찬가지다. 좀비는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 것인가.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시체들을 말한다. 오로지 먹고 생존하는 욕구만 남아 있는 존재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단적 부르주아와 극우 파시스트들에 기생해 살아 가는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좀비처럼 몰려 다니며 선량한 사람들을 해치고 사회의 체제 근간을 흔든다. 넷플릭스를 통해 소개돼던 우리 드라마 '킹덤'이 됐든 프랑스 드라마 '라 레볼리쉬옹'이 됐든 다 지금의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공포스러운 일을 빗댄 것이다. 얼마 전 재개봉된 25년전의 일본 영화 '큐어'나 지난 해 만들어진 연상호 감독의 '지옥' 같은 작품 역시 모두 지금 사회가 만들어 내는 이상하고도 괴상한 공포, 그로 인해 만들어진 비정상적 존재들, 그것들의 엽기적 행태와 살인극을 그리는 것이다. 공포영화가 많이 만들어질 조짐에는 여러 가지 함의가 들어 있다. 적어도, 사람들이 극히 불안해 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존재가 의식을 지배하고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물론 그 역도 가능하다. 나는 지금의 위정자들이 이 신호를 제대로 알아 채고 있는 지 모르겠다. 신호음이 울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다. 한심하다.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영화 ‘큐어’에서 그려지는 도쿄의 모습은 을씨년스럽다. 화려한 네온사인 같은 것, 고층 빌딩과 사치스러운 쇼윈도 따위는 일체 나오지 않는다. 도시가 그렇게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워서 기이한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잇따른 정신이상의 살인 행위 때문에 도시가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살짝 구분은 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엽기살인 탓이 먼저인 것처럼 보이지만 언뜻 생각해 보면 공간과 시대가 사람을 죽고 죽이게 만들거나 죽이게끔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시는 심각하게 우울해 보인다. 공간 전체가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영화 ‘큐어’는 1997년에 나왔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초기작이다. 25년 만에 리마스터링 작업이 이뤄졌고 최근 국내에 재개봉됐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1990년대 후반 일본 사회가 겪었던 내면의 살풍경스러움이 느껴진다. 당시 일본 사회는 풍요로웠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내부적으로 이미 무너지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영화가 발표됐던 1997년보다는 2022년 현재, 일본 사회가 어디서부터 붕괴됐는지를 갈파시킨다. 실제로 일본 경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그 거품이 빠지기 시작해 장기 불황의 늪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시대적 불안증이 영화 전편에 깔려있다. 영화 속 엽기 살인의 주인공인 마미야 쿠니히코(하기와라 마사토)는 자신의 희생자들에게 늘 이렇게 묻곤 한다. “당신은 누구야? 뭐라고? 누구라고?” 그래서 나는 누구다, 내 이름은 뭐다, 나는 뭐 하는 사람이다 식으로 답하면 철저하게 아랑곳없이 다시 묻는다. “그러니까 누구라고 넌?” 짜증나는 선문답을 주고받기를 몇 번, 사람들은 마미야가 묻는 게 그냥의 내가 아니고 나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 마음속에 담겨 있는 욕망의 실체를 직접 꺼내서 마미야 자신 앞에 진열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미야는 묻는다. “자, 이제 너의 얘기를 해 봐. 당신의 얘기를 들려줘”. 도쿄에서 원인 모를, 살해 동기를 좀처럼 짐작하기 어려운 살인사건이 잇따라 일어난다. 여관방에서 창녀가 살해되는데 평범한 회사원이 그 여자를 죽였다. 쇠 파이프로 머리를 가격했지만 사인의 직접적인 원인은 목에서부터 가슴까지 X자로 난자당한 상처 때문이다. 당연히 경동맥이 잘렸고 과다 출혈로 죽었다. 초등학교 교사의 착한 아내도 똑같은 방식으로 살해된다. 범인은 남편이다. 이들은 단란하고 화목한 신혼의 부부였다. 동네 파출소에서 평범한 순경으로 살아가는 남자도 어느 날 이유도 없이 같이 근무하던 젊은 경관을 총으로 쏴 죽인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X자로 목과 가슴을 도려낸다. 병원에서 성실히 일하던 여의사도 남자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던 남자를 죽이고 X자로 얼굴과 가슴을 도려낸 후 얼굴 가죽을 벗기다 사람들에게 목격된다. 다들 미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상 행동을 해댄다. 경시청에 근무하는 고참 형사 다카베(야쿠쇼 코지)는 이 일련의 살인사건이 누군가에 의해 정신적으로 교사되고 있음을 직감한다. 최면술이 동원되고 있다고 직감하고, 그 같은 사술(邪術)의 장본인을 추적하려 기민한 수사 감각을 동원한다. 이 과정에서 친구인 정신과 의사 마코토(우지키 츠요시)의 도움을 받는다. 다카베는 곧, 범인이 18세기 오스트리아의 최면술의 창시자 프란츠 안톤 메스머의 추종자임을 알게 된다. 다카베는 결국 마미야를 검거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때부터 영화는 기이한 방향으로 롤러코스터를 탄다. 형사 역시 이 이상성격의 살인자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될 것인가. 주인공 형사까지도 살인 행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다카베의 아내 후미에(니카가와 안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다카베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바쁜 경찰 일정 탓에 늘 집에 들어오는 것이 늦다. 당연히 다카베는 후미에의 일상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다카베의 표정이 어두운 것, 그가 한 번도 웃지 않는 것도 그런 개인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카베는 정말 후미에를 걱정하는 것일까. 진짜 사랑하는 것일까. 혹시 간호와 돌봄에 지쳐서 그녀를 죽이고 싶은 욕망, 내심 그녀가 스스로 죽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은 없는 것일까. 후미에의 정신과 주치의는 그런 다카베에게 말한다. “당신이 정신적으로 더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실제로 후미에가 정신 상담을 하러 와서 의사를 기다리며 읽는 책은 프랑스 동화 『푸른 수염』이다. 푸른 수염을 가진 부유한 성주(城主)는 어느 날 딸이 많은 가정의 막내딸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하는데, 알고 보니 성주가 전처 6명을 살해한 남자라는 설정이다. 남자는 새로운 아내에게 지하의 어느 방은 들여다보지 말라 했지만 여자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문을 열어 봤고, 거기에 전처들의 시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남자는 또다시 여자를 죽이려 하지만 여자의 가족과 오빠가 먼저 선수를 쳐 남자를 죽이고 성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사랑 따위는 없다.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과 발설할 수 없는 속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게 드러나는 순간 사람들은 서로를 죽고 죽이는 행위에 몰입하게 만든다. 다카베의 본심은 무엇일까. 푸른 수염일까. 후미에는 주치의에게 책을 던지듯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난 이 책의 결론을 알아요”. 후미에는 다카베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범인으로 잡혀 온 마미야는 그런 다카베를 몰아세운다. ‘자, 너의 얘기를 해 봐. 당신의 진짜 얘기를 듣고 싶어’. 영화는 엽기 살인 행위에서 시작돼 다카베의 신경증, 노이로제와 불안증으로 옮겨 간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을 옥죄는 것은 끝없는 불안함이다. 상대가 어떻게 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상대를 어떻게 할까 몰라서 떨게 되는 공포심이다. 자신의 끝없는 심연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방법을 알게 되는 순간, 인간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범인 마미야가 그렇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 악마를 발견하고, 그로 인해 스스로가 붕괴되는 대신 그를 영접해 전도사가 되는 길을 택한 인물이다. 마미야는 다카베의 수사 결과 도쿄 외곽에 있는 무사시노 대학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한 인물이다. 마미야는 끝까지 다카베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려 한다. 다카베는 아내 후미에를 살해하게 될까. 다카베의 정신적 흐름과 그 점층적 리듬이 이 영화 ‘큐어’의 핵심적 아우라다. 살인보다는 살인을 저지를지 모르는 인간의 마음속 어두운 풍랑이 더 무서운 법이다. 살해라는 직접적 행동보다는 살의라는 인간 심연의 어두움이 더욱더 공포스러운 법이다. 영화 ‘큐어’는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는 작품이다. 1990년대 후반의 일본 사회가 사실 얼마나 깊은 사회적 살해 욕망과 욕구를 품고 살았는가를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풍요와 번영은 다 소용없는 짓이다. 내면이 중요하다. 평범한 척하는 가면의 얼굴 안, 진짜 표정이 더 중요한 법이다. 사회라면 더욱더 그렇다. 체제와 시스템으로 안정적인 척 사실은 그 안에서 이미 붕괴가 시작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게 더 무서운 일이다. 자기 안의 공포를 인식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하는 사회가 맞이하는 결과와 결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1997년에 2020년대의 일본을 예감한 셈이다. 영화가 결말로 가는 과정,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의미심장하다. 자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의 얘기를 해 보라. 그것도 진짜 얘기를. 너는 누구냐?
콜 사인 아이스 맨(발 킬머)과 매버릭(톰 크루즈)은 탑 건 훈련 시절 엄청난 라이벌 관계였으나 지금은 다 지나간 얘기일 뿐이다. 아이스 맨은 별 넷인 4성 장군 제독이 됐고 매버릭은 여전히 대령에서 진급이 멈춰 있다. 괴짜(매버릭)라는 닉네임처럼 온갖 말썽과 구설수, 군조직에 반하는 행동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파일럿 사이에서 여전히 전설이다. 아이스 맨은 그런 매버릭을 파일럿의 교관으로 불러들여, 위험한 대테러 작전에 투입시키려 한다. 아이스 맨은 후두암으로 죽어 간다. 군 내부에서 진퇴양난에 처한 매버릭은 그를 만난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아이스 맨은 그에게 컴퓨터 키보드로 이렇게 쓴다. “It’s time to let go”. 흘러가게 해, 이제 그냥 놔 줘, 그냥 내버려 둬, 뭐 그런 뜻일 것이다. 둘은 오랜 세월을 라이벌이든 친구이든 교감해 왔고 매버릭은 아이스 맨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스 맨이 하늘에서 최고의 파일럿은 누구냐고 묻자 매버릭은 지금처럼 좋은 분위기를 망치지 말자고 한다. 둘은 뜨겁게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늙어 가는 두 남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스 맨을 연기한 발 킬머는 실제 후두암으로 죽어 간다. 영화 ‘탑 건 :매버릭’의 이 장면은 할리우드 안에서 오랫동안 두 배우의 실제 관계를 영화 안의 이야기로 이중화한 것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마치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지금까지 누가 가장 훌륭한 배우였지?’, ‘지금 와서 왜 그런 얘기를 하고 그러나 이 사람아, 그리고 당연한 걸 가지고 왜 물어?’. 뭐 그런 식의 내용일 수 있다. 발 킬머는 1959년생이고 톰 크루즈는 1962년생이다. 발 킬머는 곧 죽을 것이고 톰 크루즈는 더 이상 액션 영화를 하지 못하거나 줄여 나갈 것이다. 배우도 어쩔 수 없이 늙어 가되, 두 사람은 그나마 자신들의 마지막을 잘 준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런 점이 사람들의 가슴을 ‘쿵’ 내리친다. ‘탑 건: 매버릭’은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역작이 돼 나타난 속편이다. 아무도 이 영화에 이런 감흥이 담겨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이따위’ 군사 영화에 인간관계에 대한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느낌을 담아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 영화는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속편이라는 평가로 기록될 것이다. 속편 영화 중 가장 흥행을 많이 한 작품으로도 기록될 것이다. 실제로 톰 크루즈 주연작 중 가장 관객을 많이 모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84년에 나왔던 1편 ‘탑 건’은 레이건 시대, ‘강한 미국’을 표방하고 그런 체제를 홍보하기 위한 일조의 프로파간다용 군사 영화였다. 다분히 ‘쓰레기’였다. 무엇보다 클리셰(cliché) 덩어리였다. 비행 훈련학교의 젊은이들의 꿈과 야망, 사랑을 그린 내용이었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할리우드가 군대를 소재로 무수하게 쏟아 낸 작품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리처드 기어 주연의 ‘사관과 신사’와 ‘탑 건’ 1편의 내용을 헷갈려 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을 정도다. ‘탑 건: 매버릭’은 ‘탑 건’의 유일한 장점인 캐릭터만 가지고 이야기와 영화의 전체 사이즈를 확장시킨다. 무엇보다 이들 모두가 성숙하고 늙었으며 세상의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달아 가는 인물들로 치환시킨 것이야말로 이번 속편의 최대 매력이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첨단화되고 사회의 시스템과 자본의 힘이 커졌다 한들 지난 30년간 우리가 깨달은 것은 그게 과연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했냐는 것이다. 군사적으로 최강 국가가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미국이 그래서 과연 최고의 나라가 됐느냐는 것이다. 그 같은 성찰과 깨달음의 시그널을 ‘탑 건: 매버릭’은 여기저기 심어 놓는다. 매버릭의 능력은 높이 사지만 그의 군 생활 태도에 화가 나 있는 또 다른 해군 장성인 케인 소장(에드 해리스)은 복잡한 표정과 심경으로 매버릭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이제 파일럿은 필요가 없는 시대야. 그런 시대가 바로 코앞에 왔다고!” 실제로 미국은 현재 모든 비행 공습을 드론을 통해 실행한다. 전투기 조종사가 실제로 비행기에 탑승해 미사일을 싣고 가서는 목표 지점에 폭탄을 투하하거나 발사하는 식의 전쟁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 ‘본 레거시’). 그러니 케인 소장의 말은 예언이 아니고 현실이다. 전투기 조종사 간의 공중전투 따위도 사라진 지 오래다. 때문에 이제 그런 훈련, 곧 공중전 훈련 따위는 요구되는 시대가 아니다. 탑 건은 공룡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케인 소장의 그 같은 호언장담을 묵묵히 듣던 매버릭은 뒤돌아서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Not Today”, (그래도) 오늘은 아니야. 당장은 아니야라는 뜻이다. 성숙한 스토리 라인만으로 ‘전투기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군사 영화에는 전투가 나와야 하고 전투기 영화에는 공중전이 나와야 한다. 영화 ‘탑 건: 매버릭’은 그 라스트 미션을 수행해 낸다. 어딘가(로 특정하지 않은 것, 어떤 나라나 어떤 집단을 특정하지 않은 것도 이 영화가 꽤나 영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매설돼 있는 핵탄두를 파괴하기 위한 작전과 그 공중의 스펙터클이 영화 전체를 휘감는다. CG의 유혹을 버리고 ‘육질의’ 촬영, 공중의 높낮이와 속도는 조정했을지언정 실제 비행하는 과정을 찍고 연기한, 스턴트 액션의 난이도야말로 이번 영화가 지닌 영화 테크놀로지의 위대한 승부수이다. 톰 크루즈는 이번 작품에서도 위험한 액션 연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가 됐든, 사회가 됐든, 그것이 나라가 됐든 인간의 몸을 써야, 곧 인간 스스로가 직접 나서야 가장 좋은 그림과 모양새가 된다는 것을 스멀스멀 은근히 스며들게 얘기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사회가 지수 자본주의(주식과 코인 등)가 되면서 망가졌듯이, 모든 노동 현장에 로봇과 전자 기기가 일상화되면서 노동자들의 삶이 무너졌듯이, 그리하여 인간 스스로의 힘 그 육화(肉化)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 가를 역설한다. 그 노력이 가상하고 눈물겨운 작품이다. 1980년대의 문화적 코드가 넘쳐난다. 그 시대에 유행한 패션의 아이콘들을 대거 투입한다. 매버릭이 몰고 다니는 가와사키 바이크, 그가 입고 차고 다니는 항공 점퍼와 스위스제 시계 등등이 이른바 ‘덕후’들의 눈을 자극했고 아마도 이 영화 이후 다시 유행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매버릭의 연인 페니(제니퍼 코넬리)가 마지막에 몰고 온 고가의 포르쉐까지는 아니더라도. ‘탑 건: 매버릭’은 매력적인 자본의 상품을 즐비하게 진열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얼마나 괜찮은 건지,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국가가 사실은 얼마나 선하고 좋은 것인지를 교묘하게 이식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청소년들이 무비판적으로 이 영화를 수용하는 한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위험한 작품이기도 하다. 게다가 주인공 매버릭 역의 톰 크루즈는 늘 ‘톰 아저씨’로 불리며 한국을 10회 가까이 내한했다. 그가 가진 마음씨 좋은 아저씨 이미지는 영화로까지 확장되며 미국 제일주의, 선한 미국의 이미지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갖는 정치적 한계이다. 때문에 영화의 매력적인 부분만을 추출해서 볼 수 있는 심미안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 건: 매버릭’은 지지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이다. 한 시대의 종언은 좌우를 불문하고, 이념이나 국가의 차이와 상관없이 현재진행형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차근차근 진행해 가느냐가 다음 세대의 연착륙을 위해 필요하다는 식의 어른의 깨달음을 얘기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 맹렬한 반공주의자였던 맥아더가 얘기해서 그 의미가 퇴색했지만 어쩌고저쩌고해도 인생의 역설이 느껴지는 어구이다. 다 그런 것이다. ‘탑 건: 매버릭’은 그 쓸쓸함을 강조한 영화이다. 그 점이 최고점을 받았다.
개봉과 동시에 엄청 화제를 모을 것이 확실히 되어 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에는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형사는 자꾸 자신 앞에 용의자가 돼 나타나는 여자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이 대사는 이제 여기저기서 패러디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여자의 대답은 이거였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남자 형사의 저 대사를 지자체장들에게 해주고 싶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되면, 특히 새로 되고 나면, 늘 만만한 게 영화제인 모양이다. 이런저런 영화제를 만들겠다, 혹은 만들어 달라 등등 이쪽 전문가들에게 요구와 부탁을 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영화제 하면 그저 극장에 영화를 ‘갖다 붙이는 행위’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거, 돈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오? 얼마면 된다는 거요, 식이다. 문제는 영화제가 그렇게 만만한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극장에 영화를 갖다 붙이는 것만으로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가당치 않은 일이다. 영화제를 돈만 가지고 할 생각이라면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수없이 영화제를 해 온 사람으로서 그럴 때마다 지자체장 당사자에게 거나 관련 공무원에게 분명히 경고성 얘기를 건넨다. 영화제는 한번 시작하면 ‘빽도’가 불가능하다, 한번 멈추거나 연기하는 순간 중단되는 것이다, 대중들에게 영화제란 존재를 알리기까지 최소한 3년의 시간이 걸린다, 길게는 5년까지 걸린다,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단체장의 임기는 4년이다. 혹시 선거에서 지고 단체장이 교체된다 하더라도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등등이다. 대체로 초기에는 모든 걸 호언장담한다. 그리고 많게는 수십 억, 아무리 적어도 10억 내외를 투여해 첫 해 영화제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체로 3년이 못 가서, 혹은 그 언저리에 사단이 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현재 강릉국제영화제다. 이 영화제에 대해서는 신임 시장이 선거 운동 당시부터 아예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매년 10월 말 혹은 11월 초에 열리는 이 영화제는 지난해까지 3회를 했으며 예산은 매년 30여 억원 가까이 투입돼 왔다. 지금 폐지한다면 백억 원 가까이를 허공에 날리는 셈이다. 영화제를 단체장의 취향에 따라, 정치적 의도에 따라 만들었다 없앴다 하는 식으로 하려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영화제 자체를 우습게 안 결과라느니(영화제를 하려면 수십, 수백 편의 영화를 사전에 검토하고 일일이 저작권 이슈를 해소하고, 돈을 들여 수급을 해서는, 한 편 한 편 번역과 자막 작업을 해야 한다. 그걸 번인으로 할 때가 있고 슈팅 기법으로 자막을 할 때가 있다. 그런 것도 결정해야 한다. 번인은 스크린 안에 자막을 심는 기술이다.) 영화인들에 대한 모욕적인 행태라느니(한번 씹고 버리는 껌처럼 자신의 정치적 홍보에만 활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기에도 지쳤다. 그냥 막대한 예산 낭비를 지역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의 얘기만 하고 싶다. 다 지역민들이 세금으로 낸 것, 국민이 세금으로 낸 것으로 예산을 충당했고 그 돈이 헛되이 쓰인 결과가 됐다면 결국 국민과 지역민들만 희생이 된 꼴이기 때문이다. 영화제를 열어서 외부인사들, 배우들, 연예인들을 초청하려면 숙박과 교통이라는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역으로 얘기하면 영화제를 하면 지역의 숙박시설, 교통 인프라가 확충되고 발달할 수 있는 계기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쪽이 먼저 돼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한쪽이 한쪽을 자극시키고 결과적으로 산업이 확장되는 형태로 나아가면 된다. 그런데 이런 부분에 대한 전략적 검토 없이 마구잡이로 일단 영화제를 유치하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다. 그와 동시에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전문가의 얘기를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전문가에게 일을 맡기지 않으려고 한다. 앞에서는 네네 하면서도 뒤에서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된다는 소리를 반복한다. 그렇게 충돌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는 영화제가 현재 전국적으로 270개가 넘는다. 발상의 전환, 의식의 전환을 할 때가 됐다는 얘기다. 한국에 영화제가 많은 이유는 극장 환경 때문이다. 국내 극장에서는 오로지, 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상업영화밖에 볼 수가 없다. 예술영화, 비상업영화, 독립영화는 오로지 영화제에서 밖에 볼 수가 없다. 영화제가 많아진 원초적인 이유는 극장 문화의 균형이 무너져 있기 때문이다. 이걸 수정하고 복원하면 영화제의 수도 자연스럽게 정상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영화제가 복무해야 할 것은 두 가지 방향이다. 하나는 중국의 시장 의존도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시장을 개발해야 하는데 6억 5000만 명에 이르는 아세안(ASEAN) 10개국 만한 곳이 없다. 전 정부의 新남방정책은 윤석열 정부 들어 가차 없이 폐기됐다. 영화계 입장에서 보면, 실로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복무해야 할 두 번째 방향은 철저하게 지역화하고 소규모화 하라는 것이다. 전국 단위의 영화제는 부산과 전주, 부천 정도로 됐다. 다른 영화제들은 공연히 ‘국제’ 소리 붙이며 몸집만 키울 필요가 없다. 과도한 욕망이다. 지역에 맞는 콘셉트로 지역 축제로 만들어 내되 콘셉트도 특색 있게 좁힐 필요가 있다. 날자도 줄이고 편수도 줄여서 예산 역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맞다. 수십 억을 들인다 한들 스태프들 월급은 거의 최저 수준을 밑돌 때가 많다. 그건 실로 괴이한 일이다. 하여 영화제를 만들겠다고 하는 단체장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 정말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현재 영화제를 없애겠다고 발 벗고 나서 있는 시장이나 군수, 혹은 시의회 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다고 생각하는가? 하기사 대통령이 EU가 아니라 NATO에 가서 경제실리외교를 하고 돌아오겠다고 하는 현실이니. 실로 자괴스러운 나날이다. 할 말이 없다.
박찬욱의 신작 ‘헤어질 결심’은 한 마디로 ‘영화 볼 결심’을 하게 만든다. 실로 수년 만에, 십수 년 만에 만나는 영화적인 영화, 영화다운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박찬욱은 이번에 ‘위대한 걸작’이란 표현보다는 ‘매우 뛰어난 역작’이란 표현이 걸맞은 영화 한 편을 내놨다. 그가 얼마나 장르적 규칙에 민감하고 뛰어나면서도 동시에 그 허들을 넘어서는 도발적 작가 의식의 인물인가를 유감없이 토해 냈다. 박찬욱이 사람의 마음속 심연을 들여다보는 방식은 때론 악마적일 만큼 잔혹하다는 평가와 오해를 받았지만, 그건 그가 너무 예민하고 면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 현미경과 같은 정확한 심도에다가 뜻하지 않는 따뜻한 심성이 플러스됐다. 영화는 절절해지고 가슴이 아파졌지만 때론 달콤할 만큼 사랑스러운데다 그 마음속 우물이 더욱더 깊어졌다. 박찬욱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으며 여전히 새로운 영화적 항로를 찾으려 부심하는 감독이라는 것을 입증해 낸다. 한국에서 봉준호가 칼 마르크스라면 박찬욱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아니 그 둘을 합친 에리히 프롬과 같다. 박찬욱은 어찌 보면 매우 기독교적 근본주의에 입각해 있는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참회를 해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야만 구원과 용서를 받는다는 논리를 영화 속에 일관되게 심어 놓는다. 사람의 범죄는, 특히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물리적인 일이든 아니면 심리적인 것에 불과하든 늘, 이해는 되지만 용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고 이해는 안 가지만 용서는 할 수 있는 경우로 나뉘게 된다. 그 이해와 용서 사이의 강을 건너는 동안 사람이 겪는 감정은 대체로 사랑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그 사랑의 강 사이에서 헤매고 번민하는 남녀의 이야기이다. 눈물겹다. 박찬욱이 이렇게 지독한 러브 스토리를 찍을 수 있었다는 사실, 이런 정서의 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에 대해 솔직히 말하면 경악스러울 만큼 반가워진다. ‘헤어질 결심’에는 두 가지 살인이 나온다. 두 번 다 똑같은 여자와 똑같은 형사가 얽힌다. 형사는 처음에 만만하게 당하지만, 두 번째에서 그는 그러지 않으며 여자가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에게 만만해지려고 노력한다. 예고편에도 나온 컷이어서 공개된 장면을 소개하면 이렇다. 두 번째 살인 현장에서 여자 송서래(탕웨이)를 만난 형사 해준(박해일)은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여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근데 사실은 그 이후의 다이얼로그들이 중요하다. 영화의 핵심적인 키워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말한다. 그것도 중국어로. 통화로 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남자는 그걸 번역기로도 듣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어로 말해 달라고 한다. 여자의 중국어는 이런 내용이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을 떠났고 이제 내가 당신을 사랑하려 하니 당신이 나를 떠나네.” 여자는 흐느낀다. 이때부터 영화 전체가 흐느낀다. 사랑은 늘 엇갈릴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세상 이치이고 상대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건 이미 갖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반대로 상대를 놓아 주자 영원히 그를 가지게 된다는 진리를, 바로 그 신파의 진리를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맹렬한 속도로 웅변해 낸다. 여자는, 박찬욱의 모든 주인공들이 그렇듯이, 예컨대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가 그렇듯이, 사람을 죽였지만 죽이지 않았다. 죽이지 않으려 했지만 어쩌다 죽음에 이르게 했거나. 그녀의 범행은 우발적이지만 계획적이고, 설혹 계획을 세운 것이라 해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적어도 여자는 이런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사랑과 운명, 인생은 그 우연 속의 필연, 필연 속의 우연에서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우주의 삼라만상, 마음속의 격랑을 그려낼 수 있게 되고 또 깨닫게 되지만, 늘 그렇듯이 그건 이미 바다가 만조(滿潮)가 된 후의 일이다. 엇갈리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늘 미완성과 불완전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친다. 그렇게 사람들을 숙성시킨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는 박찬욱 스스로 적자(嫡子)로 생각하고 자신이 영화적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의 모든 코드들이 심어져 있다. 일단 형사 해준은 심각한 불면증 환자이다. 그래서 그는 잠복근무를 자처하는 일이 많다. 잠복근무는 늘 훔쳐보는 일이 태반이다. 관음증 아닌 관음증 환자이다. 망원경 렌즈 속의 상대는 늘 묵언이다. 형사 해준은 늘 상상으로, 머릿속의 시뮬레이션으로 모든 범행을 재구성해 낸다. 그건 마치 감독을 대신해서 영화 속 주인공이 영화를 직접 찍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일종의 거울 속의 거울이다. 그렇게 관객들은 영화 안에서 영화를 본다. 사실 속에 또 다른 사실이 숨어 있으며 진실은 늘 그렇게 가설처럼 만들어지거나 때론 조작될 수 있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불면증과 훔쳐보기 외에 히치콕의 장기는 현기증, 고소공포증이었다. 이 심리 장치는 이번 ‘헤어질 결심’에서는 처음 시체가 발견되는 장소에서 펼쳐진다. 실제와 가상을 뒤섞은 공간, 구미산 비금봉에서 내려다보게 찍은 부감 숏, 저 아래 기도수(유승목)의 시체가 누워 있다. 그 아찔한 느낌을 히치콕과 달리 박찬욱은, 영화 속 인물이 아니라 영화 밖 관객들이 갖게끔 만든다. 해준이 부하 형사 수완(고경표)과 함께 자일에 매달려 봉우리 정상으로 오르는 장면은 고소공포증에 현기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실감하게 만든다. 오싹하다. ‘헤어질 결심’에서 박찬욱이 가장 공들여 찍은 장면은 취조실에서의 모습이다. 형사와 여자는 마주 앉아 서로의 마음속을 탐색하기 바쁘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저 다 하는 얘기일 뿐이다. 쓸데없다. 본질의 질문과 답이 아니다. 사건의 진실은 속마음에 있다는 것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두 사람을 투 숏으로 담아내되, 두 사람 너머의 취조실 유리창(이중 거울)에도 두 사람의 투 숏을 복제 시킨다. 두 사람은 한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공간에도 존재한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또, 한 사람은 취조실 안에 있고 또 한 사람은 취조실 밖 모니터 속에서 잡히게 한다.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다른 곳에 머문다. 두 사람의 마음과 육체는 합쳐질 듯 합쳐지지 않는다. 이 취조실 장면의 기이한 기하학은 박찬욱이라는 인물이, 영화란 궁극적으로는 구도의 예술이며 대칭과 비대칭의 혼합적 양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장인(匠人)이고 장인이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다. 영화는 상상과 이데올로기, 작가적 천재성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며, 끊임없이 기본기에 대해 충실해지려는 노력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보여 준다. 영화가 한 컷 한 컷, 한 장면 한 장면, 놓치고 버릴 것이 전혀 없다. 단 한 컷도 없다. 박찬욱은 이번에 진실로 ‘친절한 찬욱 씨’가 됐다. 그는 이전 작품에 대해서 사랑과 인간, 세상에 대해 줄곧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다. 사랑, 기껏 해봐야 불륜은, 세상을 평정시키거나 평화롭게 만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랑 따위가 뭘 할 수 있겠느냐는 태도였다. 그런데 그가 서서히 사랑을 믿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설령 사랑이 시작은 창대하고 끝은 미약하더라도 그나마 사랑만이 세상의 미동(微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눈물겹다. 박찬욱은 이번에 눈물겨운 작품을 만든 셈이다. 이번 영화 ‘헤어질 결심’은 그의 초기 전작 ‘복수는 나의 것’ 등과는 다른 선상에 서 있다. ‘스토커’나 ‘리틀 드러머 걸’, ‘아가씨’에 더 가깝게 서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후반 작품 가운데 최고봉이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받을 것이다. 박찬욱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영화적 거인(巨人)이다.
코고나다의 영화 ‘애프터 양’은 기이한 작품이다. 미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 모두 과거를 사변하려 한다. 과거를 기억하고 거기서 뭔가를 얻으려 하거나 또 실제로 얻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미래 얘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의, 곧 현재의 이야기다. 그건 알렉산더 와인스틴의 원작 단편 ‘양에게 안녕이라고 말하기(Saying Goodbye to Yang)’가 직시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미래에 대한 상상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는 것, 그렇게 성찰하는 것, 바로 SF영화와 문학의 지향점이다. ‘양’은 안드로이드다. 그런데 가족과 진배없다. 아니 그냥 아들이다. 제이크(콜린 파렐)와 카이라(조디 터너 스미스) 부부는 서로를 비교적 열렬히 사랑하지만 아이가 없다. 그래서 입양을 한다(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도 입양을 했었을 수도 있다). 중국인 아이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다. 이들 부부는 아이가 일찌감치 자신들의 혈육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제이크는 백인, 카이라는 흑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둘은 아이가 자신의 중국쪽 토대를 잊지 않게 하려고 보육교사 겸 아이 돌보미를 집안에 들인다. 그게 중국계로 보이는 ‘양(저스틴 민)’이고, ‘양’이 바로 안드로이드다. 그런데 이런 설명 모두가 이 영화의 전사(前事)이다. 실제 영화에서는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대사 한 줄로 처리되는 부분이다. 이 영화가 갖는 그 같은 생략, 그 같은 점핑 컷, 그로 인해서 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겪게 되는 사고의 추출 과정, 그 상상력의 전개는 한편의 문학적 서사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이야 말로 이 작품이 갖는 매력 중 하나이다. 문제는 ‘양’이 고장이 난다는 것이다. 고장난 ‘양’의 ‘부품’은 수리할 수 있는 것인 것인가. 아니면 아예 폐기를 하고 다른 안드로이드로 대체해야 하는 것인가. ‘양’을 대신할 안드로이드는 있는가. ‘양’의 주인, 그러니까 양부(養父)인 제이크는 고민에 빠진다. 딸 미카는 매일 같이 오빠가 보고 싶다고 울먹인다. 제이크와 카이라 부부는 그 누구보다 미카를 사랑하지만 ‘양’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과 일상에 새로운 전환점이 도래했음을 직감한다. 제이크와 ‘양’의 관계는 어쩌면, 신과 인간의 관계로 확장해서 해석될 수가 있다. 제이크는‘양’을 엄청 애정하지만 그렇다고 미카만큼은 아니다. 그저 아끼는 물건일 뿐일 수 있다. 그래서 사실은 언제든 버릴 수 있다. 신도 그럴 수 있다. 인간을 엄청 애정하지만 사실은 이 세상 전체만큼은 아닐 수 있다. 신도 언제든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폐기하고 새로운 종을 들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양’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유한의 존재이다. 생명이 제한돼 있다는 것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 제한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것이 유한의 실제 의미이다. 영화 속에서 제이크는 신의 사유를 대신해서 보여 준다. ‘양’을 버려야 할 때 사실은 ‘양이’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많이 슬프고 측은해 한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정작 ‘양’의 기억 속에는 제이크만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제이크가 알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 놀람은 결코 배신감 같은 것이 아니다. ‘양’이 지녔던 놀라운 자유의지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그가 개체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 대한 놀라움이다. 신도 인간을 내려다보면서 늘 그런 점들이 놀랍고 흥미로울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 점, 그러니까 ‘양’이 제이크처럼 점점 인간의 사고와 감정을 갖는 존재로 진화하는 것이나(‘양’은 사실 연애를 했다), 인간이 점점 신을 닮으려 애쓰고 있는 점이야 말로 신이 인간을 애정하고 지키려 하는 진짜 이유의 요체일 수 있다. 영화 ‘애프터 양’은 신과 인간의 애정관계라는, 그 기쁨과 슬픔을 교차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제이크와 카이라 부부는 결국 ‘양’의 존재를 다른 방식으로 대체시킨다. 버리지만 버리지 못한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런 점에서 왠지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데, 신이 결국 인간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애프터 양’은 장면 하나하나마다에 엄청난 공을 들인 흔적을 보여 준다. 예컨대 ‘양’의 데이터를 통해 과거 그와 함께 했던 메모리를 꺼내는 장면이고, 그것을 복기하는 장면들이다. 제이크는 언젠가 ‘양’에게 다도(茶道)에 대해 가르쳤다. 차 한 잔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식의 얘기를 한다. 숲과 바람과 향기와 습도 등등이 다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 날 만큼 차를 우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가르친다. 차를 한잔 내리고 단숨에 꿀꺽 마시자 ‘양’이 묻는다. “어떤 맛인가요”. 제이크가 말한다. “잘 모르겠어”. 인생은 그렇게 차 한 잔과 같아서, 논리적으로는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지만 실제의 삶은 그 같은 명료한 이치에 한 치도 다가서지 못할 때가 많다. 다도와 인생은 같은 것이라는 것 그건 제이크와 양, 둘의 관계도 결국 마찬가지라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제이크는 ‘양’의 생을 결정하는 데 있어 한 치도 논리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 결국 차의 맛처럼, “잘 모르겠다”가 결론이다. 그는 어떻게 할 지 몰라 우왕좌왕한다. ‘애프터 양’은 인류사회가 이제 새로운 가족관계를 맺을 때가 왔음을 선포하는 척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의 가족관계는 매우 코스모폴리탄적이고 비(非)인간화를 인간적으로 재구성하기도 했으며, 그리하여 가족은 실존적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지, 존재 그 자체의 문제일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제 선택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가족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주의를 벗어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전통의 가족주의가 낳아 온 계급과 계층의 세습, 그 자본의 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그럴 수 있음을 보여 주려 한다지만 꼭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영화는 훨씬 더 철학적이고 근본적이다. ‘양’은 언젠가 엄마인 카이라와 대화를 나누며 이렇게 말한다. “애벌레가 종말이라고 부르는 것을 세계의 다른 존재들은 나비라고 부르죠(What the caterpillar calls the end, the rest of the world calls a butterfly)”. 엄마가 묻는다. “노자 얘기니?” 그렇게 영화는 노자의 철학을 가르쳐 준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며 그건 깨달음에서 온다는 것을 알려 준다. 사유하는 SF인 만큼 여러 가지 요소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했던 영화이다. 특히 음악이 그렇다. 사카모토 류이치와 아스카 마쓰미야가 이뤄 낸 피아노 건반의 단음들은 오히려 풀(full) 구성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장중한 음악 마냥 이 영화에 대한 사고의 폭을 확장시킨다. 제이크-카이라 부부의 집이 일본 전통 가옥의 느낌인 것은 연출자 코고나다가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히로의 공간을 답습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돼 있으면서도 연결돼 있는 느낌 같은 것이다. 미카는 잠을 자다가 물을 마시러 나오곤 하는데 미닫이문을 하나 열고 거실에 앉아 있는 아빠 등 뒤를 지나 또 다시 미닫이를 열고 주방으로 간다. 아빠 등 뒤는 유리벽이다. 미카는 움직이지만 제이크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느낌의 고요한 동선은 영화 내내 이어진다. 다이얼로그보다는 독백이 많은 것도 특징적이다. 사실은 독백과 다이얼로그가 겹쳐져 있다. 사람은 먼저 기억 속에서 대화를 꺼내기 때문이다. ‘양’이 했던 얘기가 먼저 내 기억 속에서 플레이 되고 그 다음에 장면이 떠올라서 다이얼로그 전체가 펼쳐진다. 그래서 처음엔 같은 대사가 중첩된 느낌으로 전달된다. 단순한 메모리와 기억 자체를 소환해 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건 지식과 지성의 차이와 같다. 소설 원제처럼 ‘양에게 안녕이라고 말하기(Saying Goodbye to Yang)’라고 영화 제목을 붙였으면 훨씬 더 이해가 빨랐을 수도 있었을까. ‘양’이 안드로이드였다는 점을 알게 되고,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을까. 그보다는 ‘양’의 폐기 여부를 놓고 사람들이 벌어지는 논쟁 아닌 논쟁, 사유 아닌 사유들이 더 그럴 것이다. 오랜만에 뇌가 깨끗한 물로 씻겨 나가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영화는 종종 그렇게 쓰여야 한다. ‘애프터 양’이 그런 영화이다. 그래서 권하게 되는 영화이다.
‘범죄도시 2’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영화는 엄청나게 재미있다. 그러니 이 영화가 단기간에 천만 관객을 모은 것에 대해서도 하등의 불만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극중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아들과 납치된 남편의 여자 역(박지영)에 대해 일체의 말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좀 이상하게 생각한다. 박지영이 참 잘했다.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그런데 포커스는 마동석에게만 맞춰져 있다. 최귀화나 박지환 같은 배우 등등 남자 배우들에게만 맞춰져 있다. 그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극중 캐릭터나 배우들의 평가에서 불평등한 점이 있다는 얘기이고 다소 쏠림 현상이 보인다는 얘기이다. 뭐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범죄도시 2’의 매력은 양가적(兩價的), 곧 이중의 가치에서 찾아진다. 우파들은, 다소 폭력적이긴 해도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는 데다 후배들이나 자기 경찰서 식구들은 무조건 감싸고 보는 마초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에 매료될 것이다. 남자라면 역시 저렇게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며 침을 흘릴 것이다. 극중 주인공 형사 마석도(마동석)는 ‘수사권이 없으니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징징대는 베트남 영사관 직원에게 말한다. “아 그러면 우리 국민들은 우리가 보호해야지 누가 합니까?” 그는 자신의 상관이나 후배가 살인자에게 ‘칼침’을 맞자 한 마디로 눈이 돌아 버린다. 그리고 돌진한다. ‘범죄도시 2’에는 확실히 남성성과 맨스 플레인이 과도하게 흐른다. 좌파가 보기에도 이 영화는 정의감이 넘쳐서 좋아할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 마석두는 서장도 아니고 반장도 아니다. 그저 일개 형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불의와 싸운다. 세상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그는 묵묵히 끝까지 정의를 실현시키려 몸을 불사른다. 그 실천력이 대단하다. 그런 점들을 좋아할 것이다. 한마디로 ‘범죄 2’는 좌우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췄다. 이 영화가 천만을 넘긴 이유는 거기서 찾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천만’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공연한 심통이 아니다. 이 영화의 폭발적인 흥행에는 지난 25일 동안 좌석점유율을 평균 56.7% 이상 독식해 왔다. 물론 좌석판매율(객석 점유 대비 실제 관객 비율)은 27.1%였다. 시장 전체의 관객을 놓고 보는 시장점유율은 67.1%였다. 이 말은 곧, 천만으로 치솟는 정점일 때는 시장점유율이 70%를 훨씬 웃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극장 관계자들은 좌판율을 들어 이게 꼭 독과점의 힘을 빌은 흥행은 아니라고 입을 모을 것이다. 일응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영화 한 편이 스크린 10개 중에 최대 7개 이상 가져가고 나머지 영화 열몇 편이 스크린 두어 개로 교차상영화되는 상황을 놓고 보면 그 얘기가 꼭 예뻐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회가 공정해야 한다는 말은 다 거짓이다. 그거 다 수사학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부분이 있다면 이상(理想)을 현실화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에서는 기회 자체가 공정할 수 없다. 그건 사실 모두가 다 아는 얘기다. 다만, 그 기회의 불평등이 과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보수나 진보 모두 자본주의는 건전해야 한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작동해야 한다는 데에는 서로 간 불만이 없다.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문법(成文法)이 아니라 불문법(不文法)으로라도 일정한 룰이 관통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늘 경계돼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19가 끝나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없다로 논쟁이 많았다. ‘과거처럼’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봤다. 포스트 코로나, 뉴 노멀의 시대가 왔으니 새롭게 준비하라는 말이 즐비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가가 다시 천만의 시대를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도 적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놓고 보면 그 두 가지 모두 틀린 셈이 됐다. 일단 천만 시대가 보란 듯이 복구됐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회복될 것이라고 내다본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천만의 시대가 돌아가지 말아야 할 지점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뉴 노멀, 포스트 코로나의 역설적인 전진성(前進性)을 훼손시켰다. 일부 식자들은 뉴 노멀 시대의 과거의 복원은 어떤 지점으로 돌아가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지 무조건 ‘라떼에는’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해 왔다. 천만 시대의 가치는 독주의 천만보다는 동반의 천만 일 때 더 빛이 나는 법이다.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다시 이런 식이라면 독립영화, 예술영화, 작은 영화들은 더욱 더 숨이 막힐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면 그 상처의 골이 깊어지고 결국엔 비상업영화들은 궤멸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어떤 저널에서 이번 ‘범죄도시 2’의 천만 흥행을 두고 ‘보복관람’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깜짝 놀랐다. 이번 대선은 증오의 선거, 보복의 가치가 제1의 의미로 떠올랐고 그게 지금 정부의 탄생을 가져오게 하는 요인이었다. 선보다는 악이었다. 그렇다면 ‘범죄 2’의 흥행은 꽤나 시대적, 정치적 코드를 담고 있는 셈이다. 어째 불안 불안하다. 대통령이 빵을 사러 다니며 대대적으로 교통 통제를 한다고 한다. 대통령 부부가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배우 송강호와 박해일, 영화계 원로 김동호 옹(翁), 박기용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등을 용산 청사 잔디밭으로 불러 만찬을 즐겼다고 한다. 송강호와 윤석열 대통령이 악수를 나눌 때 부동자세로 서있는 박해일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어째, 다들, 불안 불안하다.
극장가에서 조용히 종영을 준비 중인 프랑스 영화 ‘파리, 13구’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하나는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 자크 오디아르의 작품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뜻밖에도, 꽤나 야한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된 모티프는 섹스이다. 영화 속 섹스가 이유가 없으면 그건 외설이자 포르노이다. 이 영화에서의 섹스는, 잘 들여다보면, 다들 이유가 있다. 섹스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 존재의 증명이자 관계의 증명이다. 영화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중국계 여성 에밀리(루시 장)에게 있어 섹스는 사랑의 강렬한 도구이다. 룸메이트인 흑인 남성 카미유(마키타 삼바)는 에밀리를 처음엔 그저 섹스 파트너로 생각한다. 그건 에밀리가 원한 것이기도 했다. 에밀리는 카미유를 사랑하기 때문인지, 섹스의 표현에 있어서 거침이 없다. “네 거를 빨고 싶어”, “뒤에서 박아줘” 등등의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에밀리는 보통 때도 옷을 잘 입고 있지 않는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도 에밀리는 옷을 홀딱 벗은 채 소파 위에 앉아 노래방 마이크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반면에 카미유는 비교적 점잔을 떠는 편이다. 그는 임시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그래서 밤과 낮이 좀 다르다. 카미유는 에밀리의 거침없는 성적 요구, 그런 표현들을 부담스러워한다. 그래서 단박에 판가름이 난다. 에밀리는 솔직하고, 카미유는 다소 위선적이다.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파리는 서울과 달리 20개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서울은 25개 구이다. 파리 13구라고 하면 이민자들이 많이 살되, 중산층과 중하층이 뒤섞여 살고 있는 곳이다. 중국계이면서도 이민 1세인 할머니가 살던 집인 덕에(할머니는 여느 아시아인처럼 악착같이 벌어 부동산에 돈을 묻었다) 룸메이트를 둘 만큼 넓은 집에 사는 에밀리가 나오는 것, 고등교육을 받은 아프리카 흑인계 카미유가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것, 그런데 그게 아주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13구라고 하는 공간이 주는 특성 때문이다. 공간은 의식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계급을 지배한다. 파리 13구는 우리로 보면 이태원이고,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해방촌 같은 곳이다. 카페도 많고 다닥다닥 붙어사는 편이지만 그리 궁색해 보이지 않는다. 문화가 꽤 다양하고 심도가 있어 보이는 것도 비슷한 느낌이다. 파리 13구는 어쩌면 프랑스 사회가 매우 하이브리드(hybrid)해졌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공간일 수 있다. 오랜 기간 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를 침략하며 제국주의적 면모의 역사를 지녀 왔던 프랑스에서, 과거 식민지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이제는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주류화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역(逆) 혼혈 사회이자 이종(異種) 사회가 된 셈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민자들의 값싼 노동력이 유럽의 중심이라는 프랑스 사회를 지켜 온 덕이 클 것이다. 어쨌든 그런 등등의 모습들이 그리 어색하지 않다. 매우 내추럴하다. 부끄럽게도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촌스러운 편견 가운데 하나는 검은 몸과 하얀 몸이 뒤섞이는 것을 낯설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흑인 남자와 백인 프랑스 여자의 섹스는 일반화됐다. 영화 ‘파리, 13구’는 프랑스 사회의 그런 속살을 보여주고 있는 얘기이기도 하다. 카미유는 에밀리와 헤어졌지만 임시교사 일도 오래 하지 못한다. 다 돈 때문이다. 그 와중에 그는 친구의 일을 떠안게 되는데, 부동산 소개 사무실을 대신 맡게 된 것이다. 카미유는 부동산 사업 전문가가 아니다. 당연히 파트너가 필요했고 이때 등장하는 것이 노라(노에미 멜랑)이다. 근데 이 여자, 여러 가지 사연이 많다. 서른을 훌쩍 넘긴 노라는 파리 1대학에 진학한다. 그녀는 파리 근교에서 삼촌을 도와 부동산 소개업을 했었다. 삼촌과는 10년 넘게 근친 관계를 맺어 왔고 그녀가 오랜 준비 끝에 대학에 온 것은 삼촌과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섹스는 여전히 일종의 족쇄와 같다. 노라는 대학 파티에 짧은 치마와 금발 가발을 쓰고 갔다가 온라인 섹스 채팅의 스타인 엠버 스위트(제니 베스)로 오인받는다. 교내 SNS에 ‘노라=포르노 배우’라는 가짜 뉴스가 삽시간에 퍼지고 그녀는 그렇게 속절없이 학교라는, 이기적이고 철없는 젊은이들의 커뮤니티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곧 부동산 소개소에 취업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카미유를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노라의 섹스 라이프는 에밀리처럼 당당하거나 공격적이지 못하다. 노라는 카미유와의 정사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카미유가 사정(射精)을 하고 일을 끝내면 후다닥 일어나 옷을 입고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식이다. 카미유는 노라가 지닌 감정의 벽을 뚫지 못한다. 섹스가 환희로 이어지려면 정서의 공유가 있어야 한다. 마음이 합쳐지지 않으면 섹스는 동력을 잃는다. 노라는 카미유와의 공허한 관계, 학교에서 당했던 성적 폭력(그녀를 포르노 배우로 몰았던 다수의 폭력도 엄연히 강간과 같은 일이다)의 트라우마로 혼란을 느낀다. 노라는 직접 엠버를 접촉하기 시작한다. 포르노 사이트에 들어가 엠버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노라는 기이한 평온함을 느끼게 된다. 일종의 동질감을 얻게 된다. 그녀는 서서히 엠버와의 섹스를 꿈꾸게 된다. 젊은 영혼들의 영혼이 건강해지려면 그 원시성과 생명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건 섹스가 한 방법일 수 있다. 몸으로 소통하지 못하면 젊은이들의 정신은 교감이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하게 된다.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남녀 간의, 혹은 남남 간의, 혹은 여여 간의 섹스가 활성화돼야 한다. 젊은이들의 섹스를 이어가지 못하면, 거기에 자꾸 편견과 억압이 끼어들면, 그 사회는 건강성을 잃는다. 시스템, 사회, 국가, 공정과 정의라는 말이 강조되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위선적이다. 젊은이들이 섹스가 됐든 무엇이 됐든 관계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묶이고 그런 연대를 통해 오히려 개별의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그들로 하여금 괜찮은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과정이야말로 젊은이들에게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후회 없는 개인의 인생이 모여야 사회가 후회를 하지 않게 된다. 정직한 욕망의 개인이 모여 둘과 셋이 되고 둘과 셋의 건강한 관계가 개인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것. 그 기초적 원동력은 바로 섹스와 같은 젊고 강렬한 원시적 생명력일 수 있다는 점이 70대의 자크 오디아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얘기하려는 것이다. 자크 오디아르가 파리, 13구에서 그 점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로 이민자의 후손들(흑인과 아시안)을 지목한 것 역시 프랑스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암시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영화 ‘파리, 13구’에는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 장면들이 많다. 영화 속 인물들의 다양한 섹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깨달음을 얻게 한다. ‘파리, 13구’가 최근 개봉된 극장 영화 중에서 연인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작품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어린이들을 다룬 일종의 아동영화들은, 놀랍게도 상당히 폭력적인 작품들이 많다. 벨기에 산(産) 영화 ‘플레이그라운드’는 특히 그렇다. 70분 남짓한 이 짧은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두 아이가 겪는 학교 폭력의 얘기를 다룬다. 사뭇 끔찍하고, 진실로 걱정되며, 어쩔 수 없이 반성의 기분을 갖게 만든다. 아이들의 문제란 결국 어른들이 만들어 냈거나 방치한 문제이고 따라서 어른들이 해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플레이그라운드’를 조금만 보다 보면 촬영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신예 감독 로라 완델의 카메라는 아이들의 머리 위 이상을 웬만해서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극중 성인 캐릭터는 대체로 웨스트 언더 숏(waist under shot)이다. 성인들은 도무지 허리 위가 나오지 않는다. 인물들을 롱 숏이나 풀 숏으로 담을 때도 성인 캐릭터는 포커스 아웃시켜서 흐리게 나오게 한다. 그들의 얼굴과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대사는 보이스 오프(voice off)로 처리되는 식이다. 목소리만 나온다는 얘기다. 성인 캐릭터의 얼굴이 나오는 것은 이들이 주인공 아이들에게 몸을 낮춰 대화를 할 때 만이다. 아빠가 등굣길에 아이와 눈을 맞출 때, 혹은 유일하게 주인공 노라를 이해해 주는 여자 선생님이 아이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때 카메라는 그제야 온전히 투 쇼트로 인물을 잡는다. 로라 완델은 철저히 아이들의 시선으로 아이들의 세계를 담아내겠다는 의도와 의지로 카메라 눈높이를 일관되게 낮춰 잡는다. 그 형식이 독특한 작품이다. 그건 마치 일본 고전영화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카메라를 일명 ‘다다미 쇼트’라 해서, 다다미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모습을 담을 요량으로 카메라 시선을 평상(平床) 높이로 낮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로라 완델의 카메라 워킹은 오즈 야스지로에서 배워 온 듯한 인상을 준다. ‘플레이그라운드’는 말 그대로 운동장이다. 운동장은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각적이고 다층적으로 쓰인다. 아이들이 뛰노는 운동장이 기본 개념이지만, 게임이 규칙이 적용되는 곳 같은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흔히들 선거 과정이나 정치 지형도를 얘기하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표현을 쓰는 것이 그 같은 맥락이다. 운동장은 평평하고 수평적이며 평등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깔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아이들의 것이 됐든, 어른들의 것이 됐든 운동장이 본연의 운동장이지 않을 때가 많다. 노라(마야 반데베크)와 아벨(군터 뒤레)은 전학을 왔다. 7살 노라는 오빠와 떨어지기를 싫어한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게 무섭기 때문이다. 노라는 첫 등굣길부터 오빠의 품에서 그리고 아빠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오빠 아벨은 아벨대로 문제가 많다. 아벨은 첫날부터 전학생 군기를 잡으려는 학교 일진 아이들 때문에 이러저리 차이고 쥐어 맞기 시작한다. 근데 그 심각성이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한다.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요, 화장실 변기에 얼굴이 처박히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거의 조폭 수준이다. 처음에 노라는 그 사실을 학교 선생님에게 알린다. 그러나 정작 오빠 아벨은 자신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여동생이 선생님한테 그걸 이르면 이를수록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정도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동생 노라도 점점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어쩌면 오빠를 위하는 길일 수 있다는, 그 복잡미묘한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 노라는 아빠에게도 오빠가 당하는 따돌림 폭력에 대해 고해바친다. 학교는 한바탕 시끄러워진다. 하지만 예상대로 오빠 아벨은 동생 노라를 따돌리기 시작한다. 아벨 본인도 이미 폭력의 세계로 접어들기 시작했는데, 그건 자신이 당하지 않기 위해 그 패거리에 들어갔음을 의미하고, 그건 또 스스로도 폭력을 사용하는 쪽의 편에 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이들 나름의 줄서기인 셈이지만 이제 노라는 오빠 아벨이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목격하는 처지가 됐다. 오빠와 여동생, 아이 둘은 이 폭력의 순환 고리를 끊어 낼 수 있을까. 둘은 온전히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보통은 아동의 세계, 초등학생의 세계가 가장 원칙적이고 공정하며 투명한 데다 순수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반대다. 어쩌면 가장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세계이다. 인간은 아주 일찍부터 인생과 세상, 사람 간 관계의 부당함, 부조리함을 배운다. 어쩌면 성인이 된다는 것은 어릴 때 배웠던 그 불협화(不協化)에 순응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순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의 부조리함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면서 오히려 둔화되는 것이지, 강화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어릴 때의 순수함을 잃은 결과로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지만, 원래 순수하지 않았던 세상을 그나마 이성적 논리를 구축해 나가고 발전시켜 나가면서 순수의 원형을 가까스로 개념화시킨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다 유치원에 있다’ 혹은 ‘초등학교에 있다’란 말은 그래서, 거꾸로 생각해야 하는 말이다. 우리는 부조리(不條理)를 어릴 적부터 배웠고, 오히려 그것을 조리(條理)로 바꾸는 중이다. 그 과정에 성공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반면에 그것에 실패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기묘한 것은 완벽하게 성공하기도 아주 실패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선과 악,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고, 매번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없고, 아주 나쁜 사람이 있을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 모든 판가름이 사실은 매우 어릴 때에, 진작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플레이그라운드’는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이지만 이해도의 측면에서는 18세 이상의 성인이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만큼 오묘한 진실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면 캐나다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만든 2007년작 ‘폭력의 역사’나 2015년작 ‘이스턴 프라미스’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둘 다 인간 폭력의 실체에 대해 해부하고 있는 작품인데 ‘플레이그라운드’가 가히 그에 못지않다. 인간 폭력의 기원이 아동들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 혹은 아이들 학교폭력의 문제를 어떻게든 교화해 보자, 뭐 그런 캠페인성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실체와 본질에 대해 깨닫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걸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아이들이 누구 하나를 따돌리기 시작하고 폭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일들이 일어 날 수 있는가. 비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엄연히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영화가 주는 비현실성의 현실성, 현실성의 비현실성인 셈이다. 아이 둘, 노라와 아벨 역의 두 어린이 배우의 연기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노라는 아벨이 사고를 쳤다는 얘기를 담임선생에게 듣고는 (말 그대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책상에 앉아 있는 노라의 얼굴에 맞추느라 한껏 다리를 낮춘 상태다. 여자 담임선생이 그런 아이에게 몸을 숙였다가 아예 옆자리에 앉는다. 카메라가 오랜만에 성인의 얼굴에 포커스를 맞춘다. 선생이 말한다. “아이들은 보통 다 그렇게 싸우고 그래.” 그러자 노라가 말한다. “이건 그냥 싸움이 아녜요.” 맞다. 아이들의 싸움도 그냥 싸움이 아니다. 거기에도 권력과 헤게모니 쟁탈이라는 본연의 속성이 끼어들어 있다. 여선생의 얼굴에 이해한다는 표정이 실린다. 카메라가 거의 처음으로 어른과 아이를 동등한 구도로 잡아낸다. 그냥 싸움이 아닌 것이다. 인간은 이미 어릴 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어릴 적부터 그 같은 부조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을 까먹었거나 까먹은 체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부당함과 세상의 폭력은 그 해결 방법이 의외로 쉬울 수가 있다. 어릴 때 어떻게 했는가를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선생이나 아빠한테 이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을까, 오빠나 형 말대로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나마 평화를 찾았던 것일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때가 틀리고 지금이 맞거나. 그 오묘한 정치를 기억해 내는 것, 그리고 복원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그것 참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 당신은 영화를 믿지 않겠지만 / 오동진 지음 / 썰물과밀물 / 320쪽 / 1만6000원 '세상을 반영하지 않은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이 새로운 평론집을 펴냈다. 책은 2016년 발간한 ‘작은 영화가 좋다’와 2020년에 나온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을 잇는 오동진의 인문극장 3권이다. ‘화양연화’, ‘안테벨룸’, ‘킹메이커’, ‘하우스 오브 구찌’ 등 총 63편의 영화 평론을 실었다. 이 책에서 오동진 평론가는 ‘세상을 반영하지 않은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어느 장르를 불문하고 사회 상황과 문제를 간과한 영화는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저자는 영화감독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를 타고 올라가다 가장 심각했던 과거에 눌러앉아 모색하는 모습, 역사적 필연성을 증명하는 모습을 포착해 인과 관계를 해석해 낸다. 특히, 책은 당대 최고의 화두라는 여성주의를 꺼내 들었다. 평론집을 통해 영화인이 가진 여성주의에 관한 생각과 미래 여성상 등을 알 수 있다. ‘레벤느망’은 임신한 학생이 낙태를 해야 하는 절박한 심정을 다룬다. 1964년 프랑스가 배경이다. 당시 학생은 낙태를 하면 감옥에 갔고, 낙태한 여성을 보호해 주는 사람도 감옥에 가는 상황인지라 한 임신한 여성이 세상과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이 전개된다. 오동진 평론가는 여성이 금기와 억압을 뚫고 해방으로 나간다는 것은 계급과 계층의 해방이라는 사회 운동과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계급 운동이고, 여성만을 해방하는 것이 아닌 남성과 연대해서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결국 여성의 해방은 세상의 해방이고, 세상의 자유는 여성의 자유라는 뜻이다. 오동진 평론의 강점은 영화가 설명하지 않은 역사적 배경을 앞뒤로 전제해 준다는 점이다. 영화가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낱낱이 첨가해서 그 맥락을 파악해 낸다. 이는 역사를 인지하고 있어야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취지이다. 평론가라면 그 정도 공은 들여야 한다는 그의 인식에서 영화에 대한 집념이 느껴진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
일요일 꼭두새벽, 칸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과 배우 송강호 씨가 각각 《헤어질 결심》과 《브로커》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진부하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 마침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이틀째 사전투표를 마친 날이다. 한국은 정말 정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요원하다는 생각. 아마도 다들 비슷한 생각과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영화를 비롯해 한국 사람들의 개인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확대 발전하고 있는데 그 개인들의 역량을 담아낼 국가나 사회와 같은 체제의 용기(容器)는 매우 부실하다. 걱정은,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과연 이런 분위기가 오래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몇 번을 얘기하지만 아베 이후 일본 영화는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하마구치 류스케 같은 신성(新星)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오죽했으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같은 명장(名匠)이 한국에 와서 한국영화를 찍겠는가. 일본 자국(自國) 내 침체된 분위기를 넘어서고 싶다는 욕망이 읽히는 부분이다. 고레에다는 한국 영화사와 《브로커》를 찍었고 그 주인공이 송강호이며 송강호가 이번에 남우주연상을 탄 것이다. 한국영화와 한국의 배우가 아시아형 영화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데 있어 명실공히 대표 격 선수가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중국도 시진핑 이후 도무지 영화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다. 러시아 역시 푸틴 독재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미국도 트럼프가 만든 암흑의 시대 때문에 여전히 타격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한국의 영화가 나름 승승장구하고 있는 데는 과거 5년의, ‘열린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성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나 공적 시스템과는 애초부터 따로 가려는, 그렇게 별개의 능력을 지닌, 국민 개개인의 노력 덕이기도 하다. 국민들 한 명 한 명의 이 같은 놀라운 성취에 대해 한국이라는 국가와 사회와 그리고 정치는 대체 무엇을 해왔는지, 어떤 ‘백업’을 해왔는지 이제 좀 반성하고 성찰할 일이다. 심지어 한때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아티스트를 관리 통제하려 했고 그렇게 부당하고 끔찍했던 유산이 지금 다시 가동될 가능성이 높아 걱정하는 목소리가 잦아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박찬욱, 송강호 두 사람에게 축전을 보냈다는 소식이 다소 코미디처럼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지금의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 정당이 과거에 박찬욱을 블랙리스트에 올린 정당이다. 이 정당의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려면, 한 줄이라도 과거의 행태에 대해 유감의 뜻을 밝혔어야 옳았다. 그게 정무적으로 든 정치적으로 든 맞는 얘기다. 박찬욱은 대통령의 축전을 받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특유의 히죽, 하는 웃음을 흘리지 않았을까.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검열을 없애고 나서부터이다. 아주 오래된 얘기 같지만 얼마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영화에 대한 검열이 없어진 것은 1996년이고 그건 순전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이 크다. 사회가 열리면, 영화가 좋아진다. 닫힌 사회에서 영화는 주눅이 든다. 위에서 얘기했던 트럼프와 아베, 푸틴과 시진핑을 생각하면 된다. 영화를 보면, 그 나라의 ‘열린 사회와 적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가 있다. 축전을 보내는 대통령을 두고 뭐라 할 생각은 없다. 축전보다는 극장에서 영화를 찾아보는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 영화에 대해 한 마디 할 수 있는 사람, 그런 대통령이면 좋겠다. 아마도 윤석열 대통령은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술과 풍류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런데 그가 속한 정당은 그렇지가 않다. 그 문화적 이율배반을 그가 어떻게 헤쳐 나갈지가 개인적으로는 관심거리다. 박찬욱의 이번 영화 《헤어질 결심》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다는 평가다. 킴 노박이 나오는 영화, 제임스 스튜어트가 종탑 계단을 오르면서 고소공포증 때문에 현기증을 일으키고 그 바람에 여인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는 내용의 영화 《현기증》. 정치부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 대면 이런 얘기를 술술, 까지는 아니어도, 비록 더듬더듬거려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아는 대통령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언제 이런 대통령을 갖게 될 수 있을까. 박찬욱에게 보낸 축전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었을까. 청와대는 버렸는데 봉황은 바꾸지 않았을까. 칸에서의 수상 소식이 이상한 우울에 빠지게 하는 날이다. 역시 정치가 좋아야 영화가 신이 난다. 정치는 영화이고 영화는 정치이다.
핀란드 영화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이 칸영화제 등 여러 나라에서 수상한 가장 적극적인 이유는 이 영화가 표방하고 있는 고전주의 때문이다. 특히 신인 감독이 만든 작품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올리 마키’는 2016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대상을 탔다. 이 상은 그 해 가장 뛰어난 기량을 선보인 작품과 감독에게 주는 상이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2008년 19분짜리 단편 ‘로드마커스’로 칸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서 수상하며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던 감독이다. ‘올리 마키’는 사실상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영화제 관객과 비평가들이 주목했던 건 그의 형식주의다. ‘올리 마키’는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필름 카메라로 찍혔으며, 코닥 필름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되면 제작 과정이 매우 복잡해지는데, 필름으로 찍은 것을 다시 디지털로 전환해 가면서 작품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필름 촬영 – 현상 – 디지털 전환’의 과정이 필요한데, 이러기 위해서는 현상소가 있는 베를린과 디지털 작업을 위한 브뤼셀 등을 오가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필름을 구하기 위해 코닥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잔고 물품을 공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왜 꼭 그래야만 했을까. ‘올리 마키’는 1962년이 배경이다. 16㎜ 코닥 필름이 당시의 색감과 질감을 표현해 내는 데 가장 적합했던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 덕인지, 영화는 1962년을 겨냥해 현대에 찍은 것이 아니라, 아예 1962년에 찍힌 것을 지금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고전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고전으로 돌아간 셈이다. 프랑스 비평가들은 특히 이 ‘올리 마키’가 프랑스 누벨바그의 기수 프랑수와 트뤼포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줬던 것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칸은 특히, 고전에 대해, 누벨바그 시대에 대해, 존경과 존중을 바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다분히 유럽적이라는 얘기다. 특수성이 강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한국 관객들에게는 또 다른 무엇을 가지고 영화가 가져야 할 보편성을 채워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특수와 보편의 결합이며 형식과 내용이 같이 가는 변증법의 완성이다. 1960년대 누벨바그식 영화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됐든, 일반 관객이 보기에 이 영화가 재미있느냐, 혹은 지금 이 영화를 보는 시대적 유용성을 충족시키느냐의 측면에서 작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에서 올리 마키(야르코 라흐티)는 핀란드 코콜라의 제빵사 출신의 아마추어 복서다. 코콜라는 우리로 따지자면 통영쯤 해당되는 항구도시로 비교적 잘 사는 도시지만 시골은 시골이다. 여기서 아마추어 복서의 영웅이 된 올리 마키는 페더급 프로 타이틀 전에 나가게 되는데, 이게 대단한 일이다. 왜냐하면 페더급 챔피언인 데이비드 무어와 경기를 펼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기면 올리 마키의 권투 인생은 탄탄대로가 된다. 일찌감치 시합이 열리게 될 헬싱키로 넘어가 로드워크 중인 올리 마키는 정말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가장 행복한 날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뭔가가 조금씩 삐걱대기 시작한다. 특히 체중감량이 문제다. 페더급은 56.5kg이 경계다. 올리는 아직 60kg 대이다. 시합이 2주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3kg 이상을 감량해야 한다. 권투선수도 그렇고 일반인도 그렇지만 살을 빼야 할 때 유독 유혹이 많은 법이다. 게다가 코치(에로 밀로노프)는 프로모터를 겸하면서 그를 데리고 각종 파티에, 광고 촬영에, 훈련 외의 일정도 강행을 시킨다. 하지만 그런 건 사실 문제도 안 된다. 올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여자다. 코콜라에서 만난 라이야(우나 아이롤라) 때문에 그는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 올리는 권투와 연인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는 자신을 지금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한다. 타이틀전에서 이겨서 챔피언이 되는 것일까. 여인과 결혼에 골인하게 되는 것일까. 인생에서 쉬운 선택은 없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 ‘록키’와 프랑스 클로드 를루슈가 만든 멜로 영화 ‘남과 여’를 합해 놓은 것 같다. 단, 드라마틱한 요소는 다 빼고. 영화 ‘올리 마키’는 일상의 삶에 과장이란 눈곱만큼도 없다는 듯, 사랑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도 드라이하기가 이루 말할 게 없다. 1962년에 남녀의 사랑의 표현은 그렇게 폭발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상대의 나신(裸身)에 대해서는 눈길을 주지만(강가에서 수영하는 정도) 열렬히 키스하고, 섹스하고 등등은 그렇게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다. ‘올리 마키’에서 올리와 라이야의 연애가 딱 그 수준이다. 그래서 자극적이지 않다. 그런데 그 기이한 무해함이 이상하게도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저 커플은 깨지지 않을 것 같다는, 연인 사이가 오래갈 것 같다는 시선을 주게 한다. 올리가 라이야와의 사랑을 결혼으로까지 굳히게 되는 순간은 챔피언과의 공동 기자회견 때이다. 그는 기자들 너머에 있는 라이야의 시선을 찾는다. 두 연인은 눈길로 서로를 찾아 헤맨다. 연인들은 자기들만의 표정과 눈길을 교환하기 마련인데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의 카메라는 두 남녀의 얼굴 표정과 시선의 클로즈업 컷을 교차로 보여주며 이 순간이 결국 심상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일종의 ‘행복한 불안증’을 보여 준다. 사실 이 장면 이후 올리는 권투 자체에 난조를 보인다. 코치와의 갈등도 노정된다. 코치는 올리에게 '지금 연애질을 할 때냐'고 힐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는 자신의 사랑을 먼저 잡아야 한다고 느낀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행복한 결말을 맞을 때만이 아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꼭 행복한 결말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 과정 자체가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끝이 좋지 않으면 거기까지 이루어 온 모든 과정 자체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것도 일종의 할리우드 장르 영화가 만들어 놓은 가스라이팅 같은 것이다. 실제의 삶, 진실의 인생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올리 마키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실로 복합적이다. 세계 챔피언 타이틀 전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그 와중에 여자를 얻었던 것, 그 중층의 인생살이에서 경험과 성찰을 얻었던 것 등등. 인생의 화양연화는,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시절에 있었던 것이지, 해냈던 순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은 인생이란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형식주의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내용주의가 만나는 지점이 된다. 1960년대 초반의 삶은 밋밋했을지언정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도와 뭔가를 해내려고 했다. 사랑도, 차지하려는 욕심보다 같이 하고자 하는 소망이 더 강했을 법 하다. 지난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순수의 시대를 복원하자는 것만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에는 그 같은 뜻이 담겨 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다.
다큐멘터리는 종종 선동(煽動)을 한다. 그 안에 종종, 아니 자주 강한 주장을 넣는다. 마이클 무어 같은 감독이 그렇다. 옳고 그름이 정확하게 판단되지 않았을 때 더욱 그런 경향성을 보인다. 다큐멘터리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얘기는 다 헛소리이다. 다큐멘터리가 그렇지 못한 건 사람 자체가 편향적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계급성을 지니며 당연히 당파성을 지닌다. 다분히 진영논리를 추구한다. 다큐멘터리도 그렇다. 어느 한쪽의 입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려는 ‘내심의 선택’이 강하다. 좋은 다큐멘터리는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공정하다는 것, 이 말을 이 다큐에 대해 말할 때 쓰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 공정과 정의는 저잣거리의 쓰레기 같은 말이 돼버렸다. 이쪽, 저쪽 ‘이놈 저놈’이 함부로 막 갖다 쓰면서 공정은 가장 공정하지 않은 말이 돼버렸다. 오죽했으면 ‘공정주의자’란 말이 생겼고 선택적으로 공정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이 됐겠는가. 조국 다큐 ‘그대가 조국’은 태생부터 논란을 안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우파에서는 이를 자기변명을 위한 소모적인 정치 행위라고 비판한다. 한편 그 반대편에서는 일명 ‘조국 사태’가 얼마나 왜곡된 것이었는가를 밝히려 하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정당한 저항임을 밝히려 한다. 이래저래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이다. 그런데 정작 주목할 것은 이 다큐를 만든 감독이 바로 이승준이라는 것이다. 이승준은 일종의 정통 다큐멘터리스트이다. 그는 정공법으로 작품을 찍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승준은 ‘뻗치기’의 달인인데 며칠이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자신의 취재 대상 옆에 머물며 순수하게 기록하고 또 기록하고, 또 기록하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팩트가 중요하다. 이른바 ‘윤색의 윤리학’도 그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준은 사실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팩트의 높낮이를 달리한다든지, 팩트의 배열을 다르게 한다든지 하는 일조차 금기시하는 작가이다. 그의 전작들 ‘달팽이의 별’이 그랬고 ‘부재의 기억’이 그랬으며 ‘그림자꽃’이 그랬다. ‘달팽이의 별’은 2011년 세계 최대 다큐멘터리 영화제인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한국 최초로 대상을 수상했다. ‘그대가 조국’이 충격적(?)인 것은 조국 전 장관 스스로 이 다큐 오프닝 신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조국 다큐를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조국을 직접 목도하게 될 줄은, 약간 과장하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조국은 억울하게 전 가족이 탄압받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이미지화돼 있다. 언제부턴가 조국은 국민의 반으로부터 ‘내로남불’의 상징이 돼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구체가 아니라 추상이 됐다. 자연인 조국은 사라졌다. 그런데 다큐 첫 장면부터 사람들은 조국의 ‘실제’에 맞닥뜨린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다큐에서 조국은 넥타이를 매고 법정으로의 외출 준비를 하고 달걀 프라이를 해서 밥에 김을 얹혀 홀로 밥을 먹는다. 설거지를 하고 밥을 먹다가 딸과 통화를 하기도 한다. 전화는 딸 조민과 하는 것이다. 통화 말미에 그는 딸에게 말한다. “힘내!” 이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조민은 아직 ‘온전할’ 때이다. 사람들은 아비가 딸한테 하는 그 말 한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이승준이 조국을 ‘등판’시킨 것은 명료한 자기 판단이 있어서다. 이승준은 조국이, 자기방어권을 온전하게 얻지 못했으며 오히려 거의 완벽하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조국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되 그것을 과도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승준은 조국의 일상을 보여 주는 데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조국 스스로 자기방어권을 실현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상적인 것만큼 사람의 진실을 담아내는 행위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기법은 이승준의 전작인 ‘그림자 꽃’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탈북 여성 김련희 씨의 진심과 그녀를 둘러싼 진실을 보여 주기 위해 평양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남편과 딸아이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냥 둘이 마주 앉아 묵묵히 저녁밥을 먹고 있는 장면이다. 그 어떠한 주장이나 주의를 들려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세 명의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이, 하루빨리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대가 조국’에서 조국의 출연은 같은 맥락의 의미를 지닌다. 조국 개인 자체에 대한 판단을 어떤 의미에서는 새롭게 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 ‘그대가 조국’은 친(親) 조국이나 조국 수호자가 보기에는 다 아는 내용일 수 있다. 그러나 비(非) 조국 혹은 반(反) 조국이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새롭고 충격적인 내용일 수 있다. 어쩌면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 비 조국, 반 조국용 영화일 수 있다. ‘그대가 조국’은 직접적인 증거나 증좌를 보여주지 않는데 그건 상당이 의도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직접적인 증거나 증언의 나열은 다분히 정치적 쟁점에 불과하다고 이승준은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신 그는 방증을 보여주려 애쓴다. 외곽을 때려 정면을 향해 뚫고 가려고 한다. 이번 다큐에서 조국은 조연이다. 대신 장경욱 교수와 박준호라는 사람이 주연이다. 동양대에서 정경심 교수와 같이 근무했던 장경욱 교수는 ‘조국 사태’의 핵심인 표창장 위조 문제에 대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내고 법정에서 수없이 밝히려 했으며 언론에 그 사실을 무수하게 말했음에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못했음을 증언한다. 장경욱은 자신이 진실을 밝히는 일에 실패해서 정경심 교수가 4년형을 받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번 다큐에서 눈물을 흘린다. 글을 가지고는 얼마든지 거짓말을 하고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런데 면 대 면 인터뷰에서는,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는 그것이 되지 않는다. 일종의 아이 콘택트가 되기 때문이다. 증인이 거짓말을 하면 카메라는 그것을 포착해 낼 수 있다. 조국 동생 조권의 친구인 박준호는 검찰에서 ‘당한’일을 증언한다. 그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욕의 최고치를 경험했음을 증언한다. 검찰이 얼마나 짜 맞추기 수사를 하려 했는지에 대해 그는 그냥 온몸으로 밝히고 있는 셈이다. 장경욱, 박준호 두 사람의 증언은 조국이 직접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이상의, 그 백 배, 천 배 이상의 효과와 효능감을 보인다. 팩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팩트여도 조국이 직접 얘기하면 호도될 수 있다. 그러나 주변으로부터 파고 들어가는 식의 전법은 그 사실성을 훼손할 일이 거의 없다. ‘그대가 조국’이 진짜 충격인 것은 표창장 위조라는 검찰의 주장과 공소유지, 구형 언도의 행위가 모두 거짓이었을 수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직인 논란!, 장경욱 교수는 직인이 찍히게 되는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 표창장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음을 보여 주려 한다. 여직원의 증언이 덧붙여져 있기도 하다. 강사실 PC가 옮겨진 것이 아니라는 컴퓨터 전문가의 논리적, 이성적 증언과 증거도 보여 준다. 그럼에도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사법부에서는 판단의 고려조차 전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국 다큐 ‘그대가 조국’은 조국 사건을 둘러싼 진실 공방을 보여주려 한 작품만은 아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보다 이 다큐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 낸 집단의 광기를 보여주고 기록하려 한다. 그 광기가 작게는 한 개인과 한 가족을 어떻게 망가뜨렸으며 크게는 사회와 국가 전체를 되돌이킬 수 없는 거짓의 나락으로 빠뜨리게 했는지를 그려 낸다. 집단의 광기는 곧 파시즘이다. 우리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지난 3년간 뼈저리게 경험한 셈이다. 그 파시즘에 경도됐든 그렇지 않았든 우리 모두는 지난 3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날이 머지않아, 아주 짧은 기간 안에 도래할 것이다. ‘그대가 조국’은 바로 ‘그런 날’을 준비하는 요한계시록 같은 작품이다. ‘두려워할지니, 곧 심판의 날이 다가올지니’ 이승준의 속삭임이 담겨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심판의 날에 울고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
미국인 평론가 달시 파켓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지난 30년간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평론 일과 저널리스트 일, 무엇보다 한국영화 자막 번역가 일을 해 오고 있다. 그는 솔직히 한국말보다는 한글을 아주 정교하게 쓰고 사용하는 미국인이다. 한국말은 약간 어눌한데(30년을 살았음에도!) 글을 쓰는 데 있어 마침표 하나, 따옴표 하나 불필요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완벽하다. 그가 작업한 ‘기생충’ 영어 번역은 감독 봉준호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서는 데까지 큰 역할을 한 셈이다. 그는 보스턴에서 태어났으며 국적은 미국으로 한국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 강북 어디메쯤에서 산다. 그 역시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한국 아버지, 여느 부모와 다를 게 없다. 나는 그에게 늘, 너의 아이들을 하루라도 빨리(근데 이미 늦었다.) 부모가 살고 있는 보스턴 외곽으로 보내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한국에서의 입시가 다소 너무 강고(强固)하다고 생각하는 터라 미국인인 그마저 그걸 고스란히 떠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걸 한국에 살고 있는 미국인 특유의 특혜이자 특권이라고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이를 10년 넘게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이런저런 가족의 사유야 그 누구든 대 서사시에 해당할 만큼 철철 넘치겠지만 아무튼 우연찮은 계기로 아이를 초등학교 5학년 때 뉴욕으로 보내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까지 마치게 했다. 이건 특혜일 수 있다. 남들 것을 뺏은 ‘약탈적’ 특혜는 아닐지언정, 어찌 됐든 남들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갖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초절정 경쟁사회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광범위한 의미의 특혜일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래서 한 톨의 자격도 없고 또 다른 부적격 사유가 넘치지만 이거 하나만으로도 가장 낮은 공복의 역할, 최하위급이라도 공직의 생활은 평생을 마다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산다. 아이에게도 평범하고 겸손하게 사회생활을 해나가도록 가르침에 가르침을 거듭하고 있다. 아이들 교육문제에 대해 적어도 내가 가지려고 하는 기본적인 태도, 자세는 쉽게 남을 판단하고 재단하거나 비난하고 비판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나 부모는 한국에 없다고 감히 생각하는 바이다. 법률적 원칙은 더더군다나 잘 모르는 영역이다. 아이들이 가혹한 입시의 등용문 과정을 거치는 경로에는 다양한 면이 있고 거기에는 정량적, 정성적 평가 외에 다양한 무엇, 관습적인 무엇이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상궤(常軌)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면 논란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이 시발(始發)로 작동하게 놔두면 안 될 일일 것이다. 자신만큼은 입 다물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한 ‘너 자신을 알라’의 철학이고 유교에서 무수하게 가르치는 겸양의 미덕일 것이다. 예수가 말한 대로 ‘죄 없는 자들만이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식의 영성의 가르침이다. 새 정부의 법무장관과 보건복지부 후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자녀의 입시비리 문제의 원천은 바로 거기에서 찾아진다. 비난해서는 안될 사람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난 시절 이른바 ‘조국 사태’에서 너무 쉽게 플래카드를 들고 피켓을 들었다. 그를 맹비난하고 그의 가족을 광기의 무덤에 파묻었다. 그 결과가 지금 현 정부의 조각(組閣)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참으로 면이 안 서게들 됐다. 이런저런 사례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X 팔린다. 이러고도 당신들이 한 가족을 파탄 나게 했는가. 조국 딸에게만 연구 부정 판결을 내리고 서민 교수의 논문 등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준 단국대 교수들은 대체 어떤 변명을 하고 있는가.(오마이뉴스, 5월 13일 자 기사,『단국대, ‘조국 딸만 부정 판정, ‘서민 교수’ 등 17건 면죄부』) 국민대는 왜 김건희 논문에 대한 판단을 계속 보류하는가. 이게 대학이고 이게 교수의 자세인가. 그러면서 왜 비난하고 비판했는가. 그러니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장관 후보들은 깨끗이 스스로 물러날 일이다. 그리고 이제 입시비리와 관련된 사회적 논란은 이쯤 해서 정돈하는 게 맞을 것이다. 적절한 원칙과 기준도 어느 정도 공유되고 합의된 터이다. 그러니 좀 적당히들 했어야 옳았다. 지나쳤다. 왜 스스로들 지나쳤음을 인정하지 않는가. 논란이 되고 있는 후보들 중에 그에 대한 솔직한 반성을 내비치고 사과했다면 수습이 됐을 수도 있는 일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자녀의 문제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한국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영화감독 홍상수는 단 한 줄로도 한국의 정치나 한국의 사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오히려 고도의 정치행위, 더욱더 적극적인 정치행위라고 생각한다.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한국 정치가 천박하고 구질구질하다며 빙글빙글 능멸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근데 세계가 좋아하는 홍상수의 영화들은 보고 살고 있을까, 그 수많은 장관 후보들은?
가수 정태춘은 멜로디도 멜로디지만 무엇보다 귀에 꽂히는 가사가 먼저 기억되는 인물이다. 진부한 표현으로 음유시인이란 소리를 하는데 그런 면에서 그는 거의 독보적이다. 정태춘만큼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이는 싱어송라이터는, 한국에 없다. 그의 초기작 ‘시인의 마을’의 가사는 일찍부터 그가 범상치 않은 뮤지션이라는 것을 알렸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테요’ 그렇게 시인처럼 등장했던 정태춘은 곧 세상과 시대를 노래하기 시작한다.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드메뇨(떠나가는 배)’,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92년 장마 종로에서)’가 그랬다. 그러나 ‘아치의 노래’와 ‘건너간다’라는 노래를 발표할 즈음인 2002년 이후 그는 파업과 농성의 현장에 자신을 더 투신했고 그렇게 대중에게서 잊혀 갔다. ‘건너간다’의 가사가 그걸 암시했다. ‘흔들리는 대로 눈 감고 라디오 소리에도 귀 막고/ 아, 검은 물결 강을 건너 아,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간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돌아왔다. 40여 년만의 일이다. 2019년에는 데뷔 40주년 기념 전국 투어를 다녔다. 데뷔 44년째인 올해는 다큐멘터리 ‘아치의 노래 정태춘’으로 대중 앞에 선다. 사람들은 그가 여전히, 우리의 뒤에서 꿋꿋하게 우리와 함께 동반해 왔음을 새삼 느낄 수 있게 됐다. 정태춘의 노래와 그의 노래 인생의 얘기를 그린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지난 40여 년간 그가 불렀던 주옥같은 노래들을 비교적 거의 온전히 다 들을 수 있는, 음악 다큐멘터리이다. 이런 류의 영화는 마치 3단 케이크를 먹는 일과 같아서, 세 가지의 케이크가 입안에 들어가는 형국이다. 그 하나는 노래이고, 다른 하나는 가수(의 인생)의 이야기이며, 마지막 하나는 세상·시대의 얘기다. 예컨대 말릭 벤젤룰이 만들어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상을 받은 ‘서칭 포 슈가맨’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 영화에는 미국 레이건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온 디트로이트 노동자 가수 시스토 로드리게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래·가수·시대라는 3단 케이크가 잘 구워져 있다. 음악 다큐의 최고봉이자 걸작이다. 그러나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서칭 포 슈가맨’보다는 베일리 월쉬가 만들었던 2013년작 ‘브루스 스프링스틴, 특별한 전설(Springsteen & I)’에 보다 가까운 작품이다. 노래·가수·시대라는 세 가지 요소 중 둘 다 노래에 주된 방점을 찍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건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 고영재의 정치(精緻)한 고민의 귀결일 수 있겠다. 정태춘의 인생과 그가 걷고, 살았던 시대는 어쩌면 그의 노래 가사에 모두 실려 있다. 정태춘은 노래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인생과 세상을 더불어 그려 나갈 수 있는 존재이다. 정태춘을 보고 있으면 노래하는 가수가 결국 세상을 향한 투사가 되는 것이지, 정치적 인물이 노래와 시를 읊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느끼게 해 준다. 그는 처음부터 가.수.였고 지금까지 여전히 가.수.이다. 다큐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 보여주려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정치가 모든 세상의 이슈를 덮고 모든 삶의 선행지수처럼 된 요즘, 정태춘의 다큐는 정치 이전에 먼저 노래를 부르고 시를 써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보다 정확하게는 가수 같은 사람, 시인 같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혁명 이전에, 서정적 감수성의 회복이 먼저이다. 혁명가가 시를 쓰는 것보다 시인이 혁명을 하는 것이 맞다. ‘아치의 노래, 정태춘’의 제목에 정태춘의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노래인 ‘아치의 노래’가 들어간 이유는 바로 그러한 점을 보여 준다. ‘아치의 노래’에서 ‘아치’는 양아치이다. 양아치는 원래 넝마주이를 뜻했다.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밀려나 있었던, 최극단의 존재들이었다. 정태춘은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그가 깊이 잠드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 가끔/ 한 쪽 다리씩 길게/ 기지개를 켜거나/ 깜빡 잠을 자는 것 말고는/ 그는 늘 그 안/ 막대기 정 가운데에/ 앉아서 노랠 부르고/ 또 가끔 깃털을 고르고/ 부릴 다듬고/ 또/ 물과 모이를 먹는다’. 감독 고영재는 이 노래의 가사만큼 정태춘이란 가수의 아우라 전체를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봤을 것이다. ‘아치의 노래’ 가사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하고 소외돼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루한 사람들의 인생을 얘기하는 노래는 없다. 이 노래만큼 서정적 혁명주의의 완결판은 없다. 감독 고영재가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꽤나, 아주아주 대단히, 혁명성을 지닌 작품이다. 의도한 것은 아닐지언정 이 영화가 갖는 시대적 휘발성은 감독 고영재와 주인공 정태춘 스스로의 소망과 달리 매우 폭발적일 수밖에 없다. 개봉 이후 관객들의 반응은 그런 식으로 모아질 것이다. 영화는 ‘서칭 포 슈가맨’보다 ‘브루스 스프링스틴, 특별한 전설’에 가깝지만 뮤지션으로 보면 정태춘은 스프링스틴보다 슈가맨의 시스토 로드리게스에 가깝다. 문학적인 면에서는 막심 고리끼이다. 정태춘의 노래와 삶 역시 그들처럼 ‘현장’에서 성장했다. 변혁의 과정에서 업그레이드됐다. 그것이 더욱더 그를 진솔하게 빛나게 만든다. 다큐는 바로 그 빛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이번 다큐에서 1998년에 발표된 그의 노래 ‘5.18’을 거의 전곡 그대로 들을 수 있게 한 것 역시 상당 부분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주려 했던 소산의 결과이다. 이 영화는 5월 18일에 개봉된다. 영화에서 정태춘이 지난해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마치 성명처럼 노랫말을 읊을 때, 관객 속 누군가가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 “정태춘 씨, 우리는 당신의 노래를 들으러 왔지, 이념을 들으러 온 게 아니오!” 서늘하다. 어쩌면 아주 짧은 그 장면 하나가 지금의 폭압적인, 윤석열 시대를 예고해 온 것이 아니냐는 무언의 설명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태춘은 무대에서 굴하지 않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마치 저런 사람은 늘 예상했다는 듯이 동요하지 않고 ‘5.18’을 부른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이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고영재 감독이 만든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 그 어느 영화, 그 어느 드라마, 그 어느 노래, 심지어 그 어느 집회, 그 어느 농성보다 더욱더 파장이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예상컨대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많이들 울 것이다. 정태춘의 서정(抒情)이 지닌 시대적 진심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게 할 것이다.
배우 강수연 영화인장 장례위원회는 오는 11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치르기로 했다고 8일 밝혔다. 장례위원회는 영결식을 영화진흥위원회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할 예정이다. 다만 조문을 비롯한 장례 절차는 취재진 등에 비공개로 진행할 계획이다. 장례위원회는 유족의 의사 등을 감안해 이렇게 결정했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현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이 위원장을 맡은 장례위원회에는 동료 영화인 49명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한다. 이창세 제작자와 배장수·오동진 평론가가 대외업무를 맡기로 했다. 다음은 장례위원 명단. ▲ 강우석 강제규 강혜정 권영락 김난숙 김한민 김호정 류승완 명계남 문성근 문소리 민규동 박광수(여성영화제) 박기용 박정범 방은진 배창호 변승민 변영주 봉준호 설경구 신철 심재명 양익준 예지원 원동연 유인택 유지태 윤제균 이광국 이용관 이은 이장호 이준동 이창동 이현승 전도연 장선우 정상진 정우성 주희 차승재 채윤희 최동훈 최재원 최정화 허문영 허민회 홍정인
우리는 언제까지 홍상수의 영화를 기록해야 하는가. 그 기록의 행위는 기쁨과 환희인가, 아니면 고통인가, 혹은 지루함인가. 이것도 저것도 모두 아니고 혹시 깨달음, 통찰 같은 것은 아닌가. 이번 신작 ‘소설가의 영화’는 통산 그의 32번째 작품(단편, 다큐 참여 포함)이고 그건 그가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해 26년간 거의 매년 한 편 혹은 두 편을 만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상수처럼 끊임없이 작품을 쏟아 내는 마에스트로급 감독은 한국에도 유럽에도 미국에도 없다. 그에게 있어 영화란 일종의 일기 같은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막 영화 한 편을 끝내고 회식 비슷한 자리에서도 갑자기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아, 영화 찍고 싶어”. ‘소설가의 영화’는 최근의 전작과 이어질 듯 말 듯 한다. 인물들이 그렇다. ‘소설가의 영화’의 주인공 준희(이혜영)는 바로 직전의 작품인 ‘당신얼굴 앞에서’에 나오는 상옥(이혜영)일 수 있다. 상옥은 오랜만에 귀국해 동생 정옥(조윤희)의 집에서 살아간다. 그녀는 그때 영화감독 재원(권해효)을 만나게 되는데, 감독은 그녀의 이런저런 삶의 얘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그녀에게 하루 조용히 여행을 다녀오자고 하는데, 그게 유혹인지 아니면 영화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을 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재원과 상옥은 술을 마신다. 하지만 감독은 다음 날 그녀에게 같이 어디 좀 다녀오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술이 취했을 때와 깼을 때의 마음은 다르기 마련이다. 재원도 갑자기 예상되는 혼외정사가 두려워졌을까. 남자가 이런저런 변명을 하는 전화를 받은 후 여자는 미친 듯이 깔깔댄다. ‘당신얼굴 앞에서’의 상옥과 재원은 ‘소설가의 영화’에서 준희와 박 감독으로 다시 만난다. 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인다. 하남시의 어느 타워 전망대에 간 준희(이혜영)를 박 감독의 와이프(조윤희)가 알아채고 말을 건다. 화장실 기둥 뒤에 숨어 있던 박 감독(권해효)은 마지못한 듯 준희, 와이프와 함께 전망대 통유리 앞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신다. 박 감독은 밖을 내다보는 준희에게 작은 망원경을 빌려준다. 준희는 그걸로 밑을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보니 저 밑 공원이 다 보이네”라고 말한다. 셋은 밑에 공원을 걸어 보기로 하고 내려갔다가 산책 중인 여배우 길수(김민희)와 우연히 부딪힌다. 준희는 박 감독이 배우 길수를 두고 하는 말 때문에 갑자기, 버럭 화를 낸다. 감독 부부는 약간 기분이 상해서 가고 준희와 길수만 남아 둘이 얘기를 나눈다. 얘기가 길어져 준희와 길수는 밥을 같이 먹는다. 그리고 둘 다 아는 사이인 북 카페 주인(서영화)과 시인 선배를 만나(기주봉) 막걸리를 마신다. 준희는 소설가이다. 근데 준희는 길수에게 같이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어떤 영화냐고 사람들이 묻고 시인 선배가 이런 얘기 어떠냐고 자신의 얘기를 하려고 하자 준희는 화를 내며, 김 빼지 말라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 줄거리를 언뜻 비친다. 그게 바로 홍상수의 또 다른 전작인 ‘도망친 여자’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그렇게 씨줄 날줄처럼 아닌 듯, 혹은 그런 듯, 서로 연결돼 있다. 이번 ‘소설가의 영화’에서 홍상수는 자신의 생각을 공격적으로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공원을 걸으려다 만나게 된 여배우 길수와 얘기를 나누다가 준희가 불같이 화를 내는 대목은, 박 감독이 길수더러 왜 영화 출연 활동을 안 하냐며 그건 너무 아까운 일이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준희가 소리친다. “뭐가 아깝다는 거지? 아까운 게 뭐지? 다 성인이잖아. 아깝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행동이 이미 잘못돼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거잖아”. 명백하게 이것은 배우 김민희가 자신과 혼외정사를 거쳐 동거인으로 살아가면서 홍상수 자신의 영화 외에는 그 어떤 활동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이런저런 ‘입방아’를 염두에 둔 공식적인 발언이다. 준희가 자신의 소설 작업에 대해 얘기하는 대목은 홍상수 스스로의 근황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준희는 시인 선배에게 말한다. “더 이상 글이 안 써져요. 이제 그만 글을 내려놓아야 하나 봐요”. 타워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밑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보니 다 보이네”라고 얘기하는 것도 (글이 써지든 안 써지든, 영화가 만들어지든 안 만들어지든)영화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란 게 늘 렌즈를 통해서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홍상수는 김민희에게 ‘영화적’으로 결혼식을 올려준다. 그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고 의외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영화가 얼마나 개인화할 수 있는가, 개인화하는 것이 맞는가, 가장 개인적인 것이 세상사의 보편과 어떻게 맞닿게 되는가. 근데 과연 그럴 수는 있는가. 영화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자유로워야 하는가. 그것도 뼛속 깊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홍상수 영화의 기본 핵심은 철저한 탈정치화이다. 그는 결코, 단 한마디도, 정치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이 ‘매우 정치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정치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음으로 현실 정치를 능멸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홍상수식 정치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정치가 쓰레기 같으면 한마디도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한 명의 여자에게, 하나의 일상적인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더 옳다’고 홍상수는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삶은 김민희에게 기울어져 있고, 그의 영화는 김민희와 관련된 사소한 이야기들이 모티프가 되고 있다. 근데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상한 통찰의 무엇을 준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끝없는 이중성과 위선, 그 안의 불안과 초조 사이에 삶과 세상의 진실이 숨어 있다고 홍상수는 얘기한다. 엉뚱한 사회정치 이론이나 현실에는 그 답이 없다는 것인바, 쓸 데 없는 짓 좀 그만하고 살라는 것이다. 너무나 세세한 개인사여서 미니멀리즘의 극단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홍상수 영화의 작은 구멍, 작은 망원경의 렌즈를 통해서는 세상이 좀 더 잘 보일 때가 많다. 사람들이 홍상수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일 수 있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소설가 준희는 이제 소설 대신 다른 작법을 지닌 영화를 택한 셈이 됐다. 이건 홍상수가 앞으로는 조금 다른 영화를 찍을 수도 있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실제로 그의 영화는 점점 ‘마일드’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 속 박 감독도 자신이 ‘좀 변한 것 같다’고 말한다. 일례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섹스가 사라졌다. 과도한 음주가 사라졌다. 홍상수 영화에 술과 섹스가 사라지는 건, 홍상수 스스로 삶의 날을 의도적으로 무디게 하려는 계획처럼 느껴진다. 대신 그의 영화는,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다소 지루해진 면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영화에 술과 섹스가 나오는 것이 좋다. 사람들마다 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한 편의 영화로 숱한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하게 되는 영화, 그게 바로 홍상수이다. 이번 영화도 그 범주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 길수와 준희가 밥을 먹을 때 왜 길수는 비빔밥을 먹고 준희는 라면을 먹을까. 둘이 밥을 먹을 때 창 밖에 서 있는 여자아이는 누구일까. 어떤 존재일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것 등등이다. 또 한 번 ‘홍상수 월드’를 경험해 보시기 바란다.
평소 영화를 잘 안 보는 사람들이라도 한 번은 들어 봤고 또 한 번 정도는 봤었을법한 영화가 홍콩 왕가위의 작품들이다. 그의 초기작 ‘열혈남아’와 ‘아비정전’, ‘중경삼림’과 ‘동사서독’ ‘타락천사, 또 ‘화양연화’와 ‘해피투게더’, ‘2046’을 거쳐 비교적 최근에 속하는 2013년작 ‘일대종사’ 까지, 왕가위의 영화들은 희대의 걸작들이다. ‘일대종사’ 이후 그는 연출을 하지 않고 있는데 풍문에 따르면 그 역시 TV 드라마를 시작하려 한다고 한다. 뭐라? 왕가위가? 사람들이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상실과 공허의 정서 때문이다. 왕가위의 영화들에는 늘 이별이 있고 사람들의 관계는 항상 이어지지 못한다. 사람들의 일상은 파편적이며 목적을 찾기가 힘든 모습들이다. 그저 실존의 아픔을 견디며 고독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반복해 간다. 그런 왕가위의 작품들을 보는 사람들은 영화가 주는 ‘작위적인 행복’ 보다 ‘리얼한 불행’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왕가위의 영화는 머리는 어둡되 가슴은 촉촉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왕가위의 지성은 늘 비관적이지만 의지는 그래도 약간이나마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다. 왕가위가 그렇게 된 데에는 홍콩의 역사와 정치가 깊이 연관돼 있다. 왕가위 영화 연출 인생의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된 작품은 ‘중경삼림’과 화양연화’ 그리고 ‘2046’이다. ‘중경삼림’은 1994년에 찍었는데 1997년에 홍콩이 영국에 반환되기 3년 전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나오는 모든 남녀는 늘 헤어진다. 그리고 모두들 어디론가 떠날 것을 늘 준비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이직(移職)도 쉽다. 주인공인 경찰 663(양조위)은 나중에 매점 주인이 된다. 원래 매점에서 일하던 페이(왕페이)는 스튜어디스가 돼 미국을 오가며 살아가게 된다. 매점에서는 끊임없이 마마스 앤 파파스의 1965년 노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큰 소리로 빵빵 터져 나온다. 영화 중간중간에는 아일랜드 록그룹 크랜베리스의 1992년 노래 ‘드림스의 왕페이 버전', 곧 광동어 버전이 흐른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1960년대와 1990년대를 오가며 그 시대적 흐름을 이어가려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1958년생으로 왕가위는 유년시절에 1967년의 홍콩 봉기 사태(홍콩 노동자들의 전국 쟁의로 영국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된다. 이때 노동자들을 도왔던 것은 중국 공산당이었지만 이후 2019년 홍콩 시위사태 때는 중국 공산당이 홍콩 시민과 대학생들을 탄압하고 영국과 서방이 이들을 돕는다.)를, 그 불안한 시대의 아우라를 직접 겪었다. 홍콩은 영국도 아니고 중국 대륙도 아니며, 홍콩 자신도 아니고 자신이 아닌 것도 아닌, 늘 경계의 존재임을 ‘생래(生來)적으로’ 알게 된 왕가위는 그 실존의 불안을 자신의 작품 속에 투영시킨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불륜의 두 남녀(그런데 이 불륜에는 기이한 정당성이 있다.)가 만나는 것은 1966년이다. 홍콩봉기 전야의 극도로 불안한 정정(政情)이 영화 전편에 흐른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 차우(양조위)는 신문사에서 일하지만 기자인지 아닌지 명확하지가 않다. 그는 늘 (모두들 시위 취재를 나간 듯이 보이는) 텅 빈 편집실에 거의 홀로 앉아 신문 무협 연재소설을 쓴다. 그렇게 해서 번, 약간의 돈을 그는 도박에 쓴다. 차우는 결국 불륜과 소설 쓰기에 매진하는데 여주인공 첸 부인(장만옥)은 그의 글의 감수(監收)를 본다. 그러기 위해서 두 남녀가 이용하는 곳이 바로 한 호텔의 2046호이다. 두 사람은 종종 이별 연습을 한다. 여자의 남편에게 둘 사이가 발각돼서, 혹은 그 반대여서, 그것도 아니면 불륜은 반드시 헤어져야 할 운명임으로, 미리미리 이별 연습을 하자는 식이다. 그런데 어느 날 첸 부인은 그 ‘리허설’에서 실제로 펑펑 운다. 차우는 그런 그녀를 안아 주며 ‘연습인데 왜 그러느냐’고 한다. '화양연화'는 2000년에 만들어졌고 이미 홍콩은 1997년에 반환됐지만 2046년에는 홍콩이 중국으로 완전히 귀속되기로 결정된 상황이었다. 이별 연습은 단순히 연습이 아닌 셈인 것이다. 1968년 캄보디아를 취재하러 갔다가 돌아온(이때는 베트남 전쟁이 이미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확산된 때였다.) 차우는 여전히 소설을 쓰고 그렇게 번 알량한 돈으로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신다. 당연히 여자 품을 전전한다. 캄보디아에서도 도박을 했고 그런 그에게 도박 빚을 꿔주며 잠깐 사랑에 빠진 여자가 우연찮게도 과거 홍콩에서 만났던 여자와 성이 같은, 수리 첸(공리)이다. 홍콩으로 돌아와서는 예전에 썼던 2046호에서 잠시 몸을 섞던 여인 미미(유가령)가 누군가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치우는 어쩔 수 없이 2047호에 들어오게 된다. 호텔 사장의 딸 왕징웬(왕페이)은 일본 남자 타쿠(기무라 타쿠야)를 사랑하다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정신병원 신세까지 진다. 남자 차우는 바이 링(장쯔이)을 만나 사랑하고 늘 격렬한 정사를 나누지만 섹스 후에 그는 여자에게 꼭 화대를 준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화를 내다가 곁을 떠난다. 목적 없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차우에게 호텔 주인의 딸 왕징웬은,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며 무협물보다는 정식의 소설을 쓰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2047호에 틀어 박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SF 판타지물인데 제목이 『2046』이다. 그 내용의 흐름이 바로 영화 ’2046’인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비교적 ‘깡그리’ 무시되는 시대를 코앞에 두고 살아가는 심정은 극히 괴롭고 고독할 것이다. 왕가위가‘중경삼림’을 만들고 ‘화양연화’와 ‘2046’을 만들었을 때가 그랬을 것이다. 1997년의 반환과 2046의 귀속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다. 곧 있을 새로운 5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이 그때의 왕가위와 비슷할 것이다. 존재 증명의 부정되거나 부인되고, 불안한 실존이 늘 흔들리는 일상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예술은 다다이즘에 빠질 것이다. 왕가위의 마지막 연출작‘일대종사’에서 여주인공 궁이(장쯔이)는 엽문(양조위)과 헤어지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인생에서 후회가 없다는 건 다 하는 얘기예요.” 그리고 언젠가 이런 얘기도 했다. “무예인에게는 3단계가 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고 중생을 보라고요. 난 마지막 길을 가지 못하니 나 대신 당신이 가줘요.” 궁이는 지금 죽어 가는 중이다. 맞다. 지금의 우리 상황을 보니 궁이 처럼 후회할 일이 천지다. 무엇보다 자신도 보지 못했고 세상도 보지 못했다. 중생은 더욱더 보지 못했다. 지금 누군가 여기서, 영화를 찍으면 ‘중경삼림’ 이상의 걸작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과연 기뻐할 일일 것인가, 슬퍼할 일일 것인가.
호주에서 온 영화 ‘드라이, The Dry’는 가물고 건조한 내용의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상당 부분이 호주의 말라붙은 땅을 그려내는 데 주력한다. 키와라(가상 도시)라는 지방에 320여 일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다. 계곡과 들판 모두가 다 말라붙었다. 사람들도 그렇다. 모두들 대체로 삐쩍 마른 데다 영혼마저 건조해졌다(실제로 호주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극심한 가뭄과 엄청난 홍수를 반복하는 기후변화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제인 하퍼의 동명 원작 소설은 2016년에 나왔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물이 흐르지 않는다. 다들 고립돼, 무미하고 건조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터진다. 루크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자신의 아내인 카렌과 아들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다. 멜버른에 있는 루크의 친구이자 민완형사인 주인공 애론(에릭 바나)은 장례식에 와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루크의 아버지는 애론에게 “루크는 내게 거짓말을 했어. 너도 내게 거짓말을 했어”라는 묘한 내용의 쪽지를 보낸다. 진실 역시 말라붙었다. 계곡 사이로 흘러야 할 진실의 강은 메마른 지 오래다. 사건 현장을 지나친 것으로 알려져 용의자 취급을 받는 마을의 한 남자는 애론에게 말한다. “이런 곳에서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애론은 자신이 얽힌 과거의 사건 때문에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건 이미 짐작했던 일이다. 20년 전 애론과 루크는 여학생 엘리, 그레첸과 단짝이었다. 넷은 자주 계곡으로 가 수영을 즐기며 어울린다. 그러다 엘리가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벌어지고, 애론이 엘리를 살해했다는 오해를 받는다. 루크와 그레첸도 이 사건 후 헤어지게 됐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루크는 카렌과 결혼을 했고, 그레첸은 누군지 알 수 없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애를 하나 낳아 싱글맘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후 루크와 가족이 석연찮은 이유로 몰살당하게 되자 애론은 오랜 연정의 복수심이 그레첸으로 하여금 루크와 카렌 부부를 살해하게 한 것 아닐까라는 의심을 갖게 된다. 오랜 친구이자 새롭게 애인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던 애론과 그레첸은 이 한 가닥 ‘의심’으로 서로를 급격하게 외면한다. 그런 심리적 줄다리기를 겪으면서까지 애론은 루크 가족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20년 전 벌어진 엘리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지 알아내려 분투한다. 진실은 비록 20년 지난 후에라도, 그렇게 시간이 엄청나게 흘러간 후에라도 결국 밝혀지기 마련이다. 만고의 진리다. 문제는 그 시간의 흐름 동안 진실의 실체가 왜곡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를 비틀어 놓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 개개인의 마음속에 황폐한 어두움을 드리운다는 것이다. 모두들 밝혀지지 않는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그 트라우마에 허덕이며 살게 된다. 과거의 비밀은 현재의 사건과 연결돼 있다. 현재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건 속에서 그 열쇠를 찾아야 한다. 과거는 현재이고 현재는 과거이다. 어떤 누구도 그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영화 ‘드라이’는 비밀의 껍질에 휩싸이는 순간 인간은 끝없이 약해지고 동시에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해와 억측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인간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 공동체의 삶은 평안해지지 않는다.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늘 고독한 법이고, 문제는 그게 꼭 속 시원한 결론을 도출하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진실은 때론 상대적인 것이어서 전모를 밝히기보다는, 일부를 끝내 묻어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진실이 모두를 다 살려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인생은 늘 최선보다는 차선을,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하게 한다. 그 부조리가 못내 견디기 힘들게 하지만, 삶이라는 것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일종의 통찰의 순간에 해당한다. 영화 ‘드라이’의 주인공 애론도 어느 순간 모든 비밀을 꿰뚫게 된다. 영화는 사실 중간중간 애론이 찾아내는 실마리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펼쳐 놓긴 한다. 그런데 그게 너무 신중해서 사건의 실체를 깨닫고 진범을 알아내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게 한다. 영화는 나름 의외의 반전을 보여 주는데, 여기서 반전이라고 하는 이유는 처음엔 좀 더 그럴듯한 원인, 조금 덜 세속적인 배경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죽은 루크와 그의 죽음을 수사하는 애론은, 옛 여자친구인 엘리의 죽음에 어떻게든 관여가 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자신들의 알리바이를 함께 조작해 공유하고 있는 사이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루크의 죽음은 당초, 과거의 원죄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다분히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이유 때문인 것으로 짐작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예상의 궤도를 타지 않는다. 극 후반 사건이 전개되는 롤러코스터 같은 분위기는 역설적으로 오히려 다소 진부하게 느껴진다. 키와라라는 호주의 시골 마을은 어쩌면 호주 전체, 더 나아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전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신에 가득 차 있고 대체로 다들 고립돼 살아가며, 상대를 존중하거나 배려하려는 태도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오로지 자기변명들만 가득한 삶들이고, 오로지 자신 혼자만을 위한 생존 본능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키와라 마을 사람들은, 우리들 자신의 자화상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행복하지가 않다. 이들의 관계를 복원하는 건, 현재의 이슈를 해결하고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과거의 문제는 과거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문제는 결국 현재를 뛰어넘어 과거가 된다. 과거와 현재는 그렇게 공감각적으로 만나게 된다. 과거와 현재, 어느 하나를 해결하지 않는 한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그중 어느 하나만 해결한다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애론은 정말 엘리의 죽음과 관계 있는 것일까. 그의 친구 루크는 왜 아내와 아들을 쏴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그리고 그게 ‘팩트’일까. 두 사건은 어떻게 연결돼 있는가. 주인공 애론은 과거와 현재의 연관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애론은 과거의 사건으로 마을 사람 모두에게서 받는 오해와 냉대를 풀기 위해선, 현재의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다. 개인의 문제는 결국 전체의 문제이고, 내 안의 마음의 문제는 내 바깥에서 벌어지는 세상사의 문제이다. 안은 밖이고 밖은 안이다. 그 둘은 늘 연결돼 있다. 호주라는 곳, 특히 키와라라는 가상공간이 상상하게 하는 호주 빅토리아주의 모습은 광대함 그 자체이다. 영화는 그 광활함이 갖는 격리의 느낌을 물리적으로 보여주고 또 강조하기 위해 오프닝 신부터 줄곧 풀 숏과 부감 숏의 구도를 보여준다. 인간은 저 거대한 자연 속에서 한낱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고 공간에 의해 철저하게 규정되는 존재임을 느끼게 해 준다. 저렇게 어마어마한 황야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유추하게 한다. 때문에 저럴수록, 저렇게 점점이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물리적 환경이라면 더더욱, 가족적 유대와 따뜻한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연대의식은 애초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훈련되는 것이다. 그 교육에 소홀하면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인간 스스로도 망가진다. 같이 살 수 없는 인간 사회는 인간 개개인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영화 ‘드라이’는 물 한 방울 스며있지 않은 마른 광야를 통해 메마를 대로 메말라진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그가 그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보다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의심에 더 비중을 두며 살아간다. 서로 간의 유대가 무너진 사회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서로가 서로를 잠재적 범인으로 간주한다. 인간은 선한 길보다는 악할 길을 택한다. 그 비극의 땅에는 대체로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법이다. 파멸은 그렇게 온다. 영화가 기이하고 불길한 느낌에 휩싸여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어둡고, 무엇보다 극도로 건조한 작품이다.
인기 작가 천명관이 ‘용감하게’ 감독한 영화 ‘뜨거운 피’는 안타깝게도 극장에서 홀대를 받고 있다. 그의 데뷔는 처절할 만큼 천대받고 있다. 그런데 꼭 그럴 작품은 아니다. 물론 솔직하게 얘기하면 ‘뜨거운 피’는 썩 잘 만든 작품은 아니다. 할리우드 갱스터 무비, 일본의 야쿠자 영화들에게서 느껴지는 ‘어깨 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소설가 출신이어서인지(이야기꾼의 수다가 많아서인지) 영화가 전체적으로 불균질한 느낌을 준다. 그건 그가 워낙 서사에 ‘미련’이 많고, 그러다 보니 에피소드를 층층이 쌓을 수밖에 없었고, 또 그러다 보니 캐릭터들이 지나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복잡하다. 아주아주 복잡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중간에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형국의 이야기야’라고 볼멘소리를 할 법도 하다. 예컨대 주인공 희수(정우)와 동거녀인 인숙(윤지혜)의 관계 같은 것이다. 희수는 인숙을 연모한다. 인숙은 한때 원룸을 다니며 몸을 팔았고 그 와중에 애를 낳았다. 그녀의 문제 많은 아들이자, 희수에게 의사(擬似) 부자 관계를 갖게 하는 양아치 건달인 아미(이홍내)는 끊임없이 전체 이야기 속으로 들락날락한다. 아미야말로 사실은 희수가 영화 전체에서 겪고, 일으키는 모든 사건의 단초가 된다. 그래서 중요한 인물이다. 이 캐릭터를 버리거나 줄일 수가 없다. 그런데 조금은 스타카토 식으로 갔으면 좋았을 법했다. 아미 때문에 너무 사건이 복잡해진다. 무엇보다 희수의 심사가 복잡해진다. 희수는 알고 볼 것도 없이 깡패이고 건달이다. 그래서 자기 여자에게조차 “나는 너를 평생토록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어!”라는 말을 듣는 존재에 불과함에도 이 양아들 아미 때문에 살짝 멋있어진다. 그래서 그의 행동 동기가 흐트러진다. 천명관 감독이 그 부분을 좀 다듬었어야 했다고 본다. 마틴 스콜세즈가 만든 ‘좋은 친구들, GoodFellas’의 위대한 점은 거기에 나오는 인간들은 돈과 여자 앞에서 모두가 사악한 동기만을 갖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만약 그들 중에 하나가 영웅적 행동을 하거나 인간미를 갖추면 그건 진짜로 그냥 영화가 되는 것이다. 진짜 현실은 아닌 것이 된다. 갱스터 무비는 그 점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다 알고 나면 그럴 것도 없지만 영화란 늘 다 알기 위해 이야기를 계속 앞으로 전진해가야 하는 운명인 만큼, 중간에 살짝 ‘저게 어떻게 된 거지’라는 우물거림만 생겨도 전체 그림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뜨거운 피’는 인물을 좀 줄였어야 했다. 깡패들이 너무 많다. 그냥 숫자가 많은 게 아니고 종류가 너무 많다. 그런 점이 좀 따라가기가 힘들다. 전체 이야기 구조를 구암 포구의 이권을 둘러싼 남 회장(김종구)과 손 영감(김갑수)의 대립 구도로 좀 더 강하게 틀어쥐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여기에 남 회장의 수족 최철진(지승현)과 주인공 희수의 오랜 관계가 얹히고, 양동(김해곤)이 벌이는 바다이야기류의 불법사업, 미친개 용강(최무성)이 저지르는 극악무도한 청부폭력, 희수가 5000만 원 이상의 빚을 지고 있는 불법 도박 하우스 사장(윤제문)까지. 그리고 남 회장 밑에서 ‘여자 장사’를 해서 포주로 불리는 중간 보스급 남자(정호빈)의 존재 등등 인물들이 겹겹이 얹힌다. 이런 정도의 인물 수라면 2시간 분량의 영화가 아니라 요즘 유행처럼 8부작 수준의 드라마로 만들었어야 했다. 극장용 영화로서는 아무래도 그 지나친 부피감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가 꽤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건 영화 전편에 흐르는 부산 사투리의 밀도감과(그것 때문에 종종 대사가 정확하게 들리지 않는 점도 있었으나) 차진 대사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 희수가 포주男에게 하는 이런 대사다. “세상은 멋있는 놈이 차지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세상은 결국… 최고로 XX놈이 갖더라고요”. 이걸 부산 억양의 사투리로 상상해 보시길 바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최고로 XX놈’이란 말이 잊히지가 않는다. 영화의 배경은 구암 포구다. 가상의 공간이다. 부산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이 공간에 대한 느낌 때문에라도 영화가 낯설 수 있다. 짐작건대 영화 속 구암은 부산 서구와 중구의 접점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것도 못 알아들을 것 같으면 그냥 구암을 중구 남포동 자갈치 시장의 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 마디로 변두리라는 얘기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구암 같은 곳’이 왜 깡패들의 소굴이 되고, 더더군다나 이 보잘 것 없는 곳을 차지하려고 그렇게들 난리굿을 펴는지(사람이 몇이나 죽어 나가는지 모를 만큼)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다. 열쇠는 남 회장과 손 영감의 대사이다. 근데 그 부분이 좋다. 그리고 그 대사야말로 영화 ‘뜨거운 피’의 핵심 테마이다. 남 회장은 정확한 대사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말한다. “구암은 별 볼일 없는 동네지. 시골이지. 근데 거기를 차지해야 딴 데를 먹어. 그래서 중요한 거야”. 손 영감의 대사도 비슷하다. “이 못 사는 구암을 차지하려면 꼭 피를 봐야 해. 피바람이 불어야 하는 거지”. 그 순간 영화에 대해 ‘아하’ 하는 깨달음이 온다. 그건 마치 류승완이 ‘짝패’라는 영화를 만들면서 온성이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이 세상이 얼마나 약육강식의 폭력으로 물들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구암은 지금의 세상이다. 큰 세상을 차지하려는 자, 작은 세상에 눈독을 들인다. 작은 파도가 큰 파도를 만든다. 천명관 감독과 이 영화의 원작을 쓴 소설가 김언수의 생각이 그러했을 것이다. 작은 포구 구암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세상의 폭력과 인간의 야만성을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뜨거운 피’는 꽤나 큰 유의미성을 지닌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이 영화에 비교적 높은 평점을 주고 싶어진다. 관객들이 그 진정성을 너무 못 알아주고 있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두 가지의 단점을 지나치면 이 영화는 곰곰이 들여다볼 대목이 참으로 많은 작품인 것이다. 영화는 다소 ‘오버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끊임없이 칼로 찔러대고 쑤셔댄다. 특히 옥 사장(차순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잔혹성은 마음 약한 관객들은 다소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들이야말로 이 영화가 취하려는 ‘폭력의 미학’의 목표일 수 있다. 영화는 종종 고도(高度)의 폭력을 전시함으로써 폭력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한다. 캐나다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아예 ‘폭력의 역사’라는 영화를, 그리고 ‘이스턴 프라미스’라는 제목의 폭력적인 영화를 찍었다. 미국의 샘 페킨파는 ‘와일드 번치’란 영화로, 한국의 박찬욱은 ‘복수는 나의 것’ 등 이른바 복수 3부작으로 그 점을 설파한 적이 있다. ‘뜨거운 피’는 그 계보를 이을 만하다. 배우들의 연기가 최고급이다. 정우의 연기는 이제 한 지점을 통과했다. 김해곤, 최무성의 연기도 일품급이다. 김갑수 옹(?)은 말할 것도 없다. 윤제문은 다소 분량이 아까울 정도다. 도박 안 한다고 자른 손가락, 마약 안 한다고 자른 손가락을 보여주며 징징대는 비루한 옥 사장 역을 한 차순배는 조연 연기의 최고봉이다. 어디서 이런 배우들을 끌어모았을까. 여성들이 끼어들 틈이 없는 만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는 다른 측면에서 논의할 만한 영화다. 그런 논쟁이 기대되는 바이다. 근데 지금 세상에서 최고의 XX놈은 누구일까. 각자가 찾아보시기들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