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총각과 멸치 처녀가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었다. 둘은 혼인을 하려고 양가를 번갈아 방문했다. 오징어 가문에서는 “멸치가 체구는 작아도 뼈대는 있는 집안이니 그 집 규수를 한번 얻어 보자”며 환영했다. 그런데 멸치 문중에서는 “예로부터 뼈대 없는 집안 사람들은 지조가 없어요”라며 반대했다. 거절당한 오징어 집안은 그래도 자신들은 먹 글씨 쓸 먹통도 있는 선비 집안이라며 애써 멸치 집안을 무시한다. 소설가 한승원의 동화 ‘뼈대 있는 집안, 뼈대 없는 집안’에 나오는 이야기다. 흔히 세상에서 공부깨나 한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먹물 좀 먹었다는 말로 빗대곤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뼈대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먹물 좀 먹은 자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며 서민보다 우월적 지위에 놓여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입만 열면 애국 애족을 말하고 국방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석연찮은 이유로 자신과 자식들의 병역은 면제받은 자들이고 대부분 미국 영주권자들이 많다. 민족의 자존과 역사의 심판을 거론하지만 친일 행위와 역사 왜곡을 정당화하는 자들, 모두 먹물 좀 드신 분들이다. 인간은 오징어보다는 멸치에 가까운 존재라고 한다. 어류, 양서류, 파충류
일생동안 풍경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던 드가는 1889년에서 1992년 사이 갑자기 수십 점의 풍경화를 완성했다. 눈을 쉬게 하려고 떠난 기차 여행길에서 그토록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모로코, 부르고뉴, 볼로냐 등을 여행했으며, 풍경화들은 모두 파스텔로 그려졌다. 작가의 시력이 너무나 많이 손상되어 유화작업이 어렵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대상의 정확한 묘사를 중요하게 여겼던 그간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산천들은 완만하게 그려졌고 둥글둥글한 덩어리처럼 포현되었으며, 그러면서도 색은 더욱더 빛을 발하였다. 그것은 마치 추상화처럼 보인다. 시력의 손상은 화가에게 너무나 치명적인 시련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가는 다시 한 번 새롭게 도전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세잔은 엑상 프로방스의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며 실험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저 사실적인 회화보다는 대상으로부터 그 안에 숨어있는 더욱 견고한 그 무엇을 끄집어내길 원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목표는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회화적 노선은 전혀 달랐다고 봐야 맞는데, 세잔의 경우 좀 더 일찍부터, 그리고 보다…
발효되는 그늘 /김휼 떫고 단단한 불화를 그늘에 들여놓네 말랑말랑 분이 생겨 단맛을 더할 무렵 그늘을 즐겨 먹던 어머니는 그늘이 되었네 말이 없는 자리에서 나오는 숨 같은 그늘로 한없이 어루만져주고 싶은 보드라운 것들이 몸을 맡겼네 다툼 없이 이룩해 놓은 살가운 영역으로 정처가 없는 구름도 제 몸을 부려왔네 그런 날은 괴이한 슬픔이 안쪽으로 고였네 잎이 넓어질수록 깊어지는 그늘에 어머니는 젖어 있던 웃음을 내어 말렸네 젖무덤 같기도 하였던 당신의 그늘 눈을 뜨니 그늘 밖에 내가 있네 ‘떫고 단단한 불화’를 ‘말랑말랑 분이 생겨 단맛’을 더해주는 것으로 발효시켜주는 그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고 부끄럽다. 그런데 그런 ‘그늘을 즐겨 먹던’ 분이 바로 ‘어머니’라는 사실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 그늘은 ‘말이 없는 자리에서 나오는 숨 같은’ 것이었고 그 그늘에는 ‘한없이 어루만져주고 싶은 보드라운 것들이 몸을 맡겼’다. ‘정처가 없는 구름도 제 몸을 부려’오는 그늘은 어머니가 ‘다툼 없이 이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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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니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 비만으로 여러 질병에 시달렸던 세종의 한탄이다. 숙종은 “느긋하지 못한 성격으로 노심초사하며 식사도 때를 어겨 노췌하고 현기증이 있다”고 말했다. 늙음과 질병의 고통과 안타까움은 왕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역대 조선의 왕들을 살펴보면 더욱 실감난다. 태종은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추정되는 풍질로 고통을 받았고, 오랜 전쟁에 시달린 선조는 편두통으로 고생했다. 조선 왕들에게 가장 흔하면서도 위험한 질병은 손을 안 씻는 데서 오는 종기였다고 한다. 화병, 상심 등 스트레스성 질환도 빠질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태조·정종·태종이 뇌출혈(중풍), 세종·숙종이 당뇨병, 선조·영조는 폐렴, 문종·성종·순조는 패혈증, 연산군·현종·경종은 전염병에 시달렸다. 그리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최고의 의료와 식생활을 누렸던 조선 왕들의 평균수명이 47세라는 기록과 세상을 떠나는 원인 중 가장 많은 것이 ‘질병’이라는 진리를 남긴 채. 질병에서 자유롭지 못함은 현대인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세상이 변하며 질병의 종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더하다. 어제 통계청이 발표한 ‘사망원인통계’를 보아도…
살짝 덜 익은 김치 한 접시, 고명으로 치장한 잡채, 말쑥하게 구워진 소고기 몇 점. 따끈따끈한 미역국에 마지막으로 병아리 콩 다닥다닥 엉겨 붙은 찰진 고봉밥이 차려진다. “우리 딸 생일 축하해. 맛있게 먹고 오늘도 행복하자” 평소에는 먹지도 않던 아침밥을 오늘은 이것저것 먹어보며 ‘맛있다, 맛있다’ 고봉밥을 받아 안고 수다 삼매경에 빠진 저 아이, 얼굴이 환하다. 어쩌면 내 고봉밥이 피워 올리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 고봉밥은 숙성된 사랑이다. 육남매가 북적대던 어린 시절, 특별히 내가 대접받을 수 있었던 날은 일 년에 딱 하루, 생일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생일 축하한다며 시끌벅적 시작되던 아침, 그 특별한 생일상 위에 당당하게 앉아 있던 나만을 위한 고봉밥 한 그릇. 아침, 점심, 저녁까지 뽀얗게 찰진 고봉밥 한 그릇을 나누어 먹으며 독차지한 그 하루만큼의 따끈따끈한 사랑. 그것은 지금까지도 푹 익어 숙성된 어머니가 물려주신 고봉밥 한 그릇의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밥공기 안의 양보다 밥공기 밖의 양이 더 많기도 한 고봉밥은 때로 숱한 사람들에게 힘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딱히 먹거리가 많지 않…
평가에 관한 유명한 카툰이 있다. 교육자로 보이는 늙은이가 쓸데없이 큰 책상 앞에 여유만만한 자세로 앉아 있다. 절대복종과 암기, 주입식 교육밖에 모르는 김나지움의 권위적 교사가 군대 중위 같았다고 한 아인슈타인이 본다면 혐오하고도 남을 인물이다. 과연! 늙은이 앞에는 새, 원숭이, 펭귄, 코끼리, 물고기(수조 속), 바다표범, 개가 한 마리씩 일렬횡대로 정렬해 있고 그 뒤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늙은이가 이렇게 말한다. “공정한 선발을 위해 너희들은 같은 시험을 봐야만 한다. 모두들 저 나무에 올라가라.” 선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공정한 경쟁이었는지, 불평한 수험생은 없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그림 아래에 ‘우리의 교육 시스템’이란 제목의 간단한 해설이 보인다. “모든 이가 다 천재다. 그렇지만 나무를 오르는 능력으로 물고기를 판단한다면 그 물고기는 끝까지 자신을 멍청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아인슈타인) 2022학년도에 적용될 대학입학전형제도가 대학별로 정시를 30% 이상으로 늘이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선택과목을 대폭 확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신발이거나 아니거나 /박명숙 저것은 구름이라, 한 켤레 먹구름이라 허둥지둥 달아나다 벗겨진 시간이랴 흐르는 만경창파에 사로잡힌 나막신이라 혼비백산 내던져진, 다시는 신지 못할 문수도 잴 수 없는 헌신짝 같은 섬이라 누구도 닿을 수 없는 한 켤레 먹구름이라 이 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 모두 반듯하게 배열을 하고 정형의 미학을 모범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3단의 구성을 취하면서 그려지는 이미지는 각각 구름처럼 부유하는 필부필부들의 인생과 살아온 날에 대한 회고이다. 박명숙의 시조는 운도 깔끔해서 시조 정신이 곧고 굳다. 이것을 바느질에 비유하자면 한 땀 한 땀 매끈하여 바느질 자국도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이 시조에서 구름 이미지는 신발이 되었다가 외딴 섬으로 바뀐다. 여기에 ‘허둥지둥 달아나다 벗겨진 시간’ 즉 우왕좌왕 하는 시간의식이 더해지고 ‘혼비백산 내던져진, 다시는 신지 못할’이라는 표현이 합세하여 이리저리 얽혀 살다가 죽는 군상이 연상된다.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놀라서 넋을 잃을 정도일까. ‘헌신짝 같은 섬’으로 뻗어나가는 상상력은 전환을 이루면서 선연한 이미지에 여운이 강하다. /박…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9일 비핵화와 미·북 대화,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 완화 조치 등에 대해 합의를 이룬 뒤 평양선언을 발표했다. 남북 정상은 이날 백화원 영빈관에서 정상회담을 마치고 서명한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 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진전을 조속히 이뤄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또 선언에는 “북측은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우선 영구적으로 폐기”하는 등의 추가 조치를 계속 취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약 5개월 전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채택한 4·27 판문점선언에는 전체 3개 항 가운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관련 대목에 3개 문장으로 남북의 비핵화 의지와 국제사회를 향한 선언적 의미가 담겼다면 이번 9월 평양공동선언은 양뿐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 남북 간 비핵화 논의에 진전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이번 선언은 판문점선언이라는 기반 위에 5·26 제2차 남북정상회담, 6·12 북미정상회담, 북미 간 비핵화 협상 등 지난 5개월간의 성과를 토대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며 실
김두관 국회의원(김포시갑)이 최근 더불어민주당 ‘참좋은 지방정부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공동위원장은 광역단체장 대표로 최문순 현 강원도지사, 기초단체장은 황명선 현 논산시장이 맡았다. 김 위원장은 “대한민국에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된 지 25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지방자치와 균형발전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혔다. 중앙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하고, 지방 재정자립이 실현될 수 있도록 강력한 재정분권, 공공기관의 지방이전과 지방 균형발전을 위해 적극 앞장서겠다는 의지도 천명했다. 사실 김 위원장은 이 일에 제격인 인물이다. 그의 경력만 봐도 그렇다. 1988년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이장부터 시작, 38~39대 남해군수에 당선됐다. 길진 않았지만 행정자치부 장관도 지냈으며, 2010년부터 제34대 경상남도 도지사도 역임했다. 오랫동안 지역 언론인 남해신문 대표이사 사장, 발행인, 편집인도 맡았으며 2005년엔 자치분권전국연대 상임고문으로도 활동했으니 이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특히 대통령 소속 자치분권위원회가 11일 발표한 ‘자치분권 종합계획’이 지방정부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