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짧아지고 하루하루 수은주가 떨어지면서 겨울이 왔다. 첫눈이 탐스럽게 내려 온 세상을 설국으로 바꾸어 놓더니 동지팥죽과 손수 따온 도토리로 만든 귀한 묵까지 집으로 왔다. 우리 집은 겨울이면 노인 회관만큼 어르신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며칠을 두고 드나드시는 분들은 많은데 갑자기 몇 시간째 잠잠하게 방이 비워진다. 지난 장날 조그만 전단지를 들고 다니는 아주머니들이 보이고 우리 집에도 발길이 뜸하던 신발이 보이고 한 동안 들리지 않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두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 여닫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대문소리가 요란하다. 이쯤 되면 짐작 가는 일이 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집에서 가까운 상가에 합기도 도장이 이사를 가고 비어 있는 건물이 있다. 그 쪽으로 어르신들 행렬이 이어지고 일정한 시간이 되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며 지나가신다. 손에는 다 같이 알록달록한 상자가 들려 있다. 속칭 약장사라고 하는 장사꾼들이 온갖 감언이설과 노래와 춤으로 질이 떨어지는 상품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팔면서 어르신들 쌈짓돈을 노리고 찾아 온 것이다. 익숙한 인기척을 신호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리고 잠시 머뭇거리시며 가…
또 한 해의 마침표를 찍는다. 무술년 개띠의 해가 저문다. 마지막 잎새 같은 달력이 일 년 동안 쌓인 고통을 하얀 눈 속에 묻어 두는 세밑이다. 사람마다 감회가 다를 것이다. 세밑은 그저 하루가 지나가는 게 아니다. 혹자는 별 탈 없이 보낸 1년이 다행스럽다고 애기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죽을 고비를 넘긴 최악의 해였다고 화를 낼지 모른다. 희비는 늘 엇갈리는 법이다. 시린 계절 탓인지 끝이라는 세밑 탓인지 사람들의 마음도 보폭도 빨라진다. 한 해의 끝자락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나라안팎으로 부딪친 일들이 걱정을 더한다. ‘더’하는 것보다 ‘덜’한 게 좋으련만 우리를 에워싼 정황은 녹록치 못하다. 촛불의 힘으로 태어난 문재인 정부는 촛불에 담긴 소망대로 무언가 변화하고 새로워져 나라다운 나라로 가는 듯 하드니 여기저기서 엇박자가 나고 있다. 인사가 만사(萬事)인데 망사(亡事)이게 해서는 안 된다. 정부 인사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안전이 그렇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성, 노동, 교육 분야에서도 삐걱 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고공(高空)행진하던 지지도도 내리막이다. 물론 어느 정책이고 잘해보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겠지만 국민 눈높이와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그
경쾌한 노래 /폴 에뤼아르 나는 앞을 바라보았네 군중 속에서 그대를 보았고 밀밭 사이에서 그대를 보았고 나무 밑에서 그대를 보았네. 내 모든 여정의 끝에서 내 모든 고통의 밑바닥에서 물과 불에서 나와 내 모든 웃음소리가 굽이치는 곳에서 여름과 겨울에 그대를 보았고 내 집에서 그대를 보았고 내 두 팔 사이에서 그대를 보았고 내 꿈 속에서 그대를 보았네. 나 이제 그대를 떠나지 않으리. 폴 엘뤼아르는 전쟁을 치룬 폐허에서도 시를 쓰고, 두 아내를 잃은 시간 속에서도 시를 쓴 시인이다. 사회적인 개인적인 폭격을 체험한 주체가 비로소, 보인다는 것이다. 마음이 다시 가동 되고, 마음의 끝까지 시간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시선(示線)이 시작되었다는 것, 이것은 불가능의 끝에서 가능의 열림이다. 폴 엘뤼아르의 시각(視覺)을 사로잡는 것은, ‘모든 고통의 밑바닥에서’ 발견되는 리듬이다. 그러니 ‘경쾌한 리듬’은 죽음과 소멸을 증유한 리듬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그의 절친이었던 피카소가 전쟁의 참담함을 화폭에 그대로 묘사하여 ‘게르니카’를 완성하여 전시(展示)를 하듯, 1937년 게르니카가 폭격되었을 때,…
정부가 24일 국무회의에서 최저임금 산정기준을 담은 최저임금법 시행령 개정안 심의를 보류했다. 대신 최저임금을 산정할 때 주 40시간 근무하면 하루가 나오는 법정 주휴 시간(유급으로 처리되는 휴무시간)은 포함하고, 기업과 노조가 협약하는 약정 주휴 시간은 근로시간과 임금에서 모두 제외하는 수정안을 31일 재심의한다. 노사 단체협약으로 유급휴일을 이틀까지 인정하기도 하는 대기업에서 최저임금 기준을 맞추지 못하자 마련한 봉합책이다.경영계는 최저임금 계산 때 주휴 시간을 근로시간인 분모에만 넣으면 최저임금이 20% 이상 올라 1만원을 넘고 대기업조차 최저임금을 위반하게 된다고 주장해왔다. 대법원은 주휴 시간을 주당 근로시간에 포함하지 않아야 한다고 수차례 판결했다. 이런 미해결 쟁점이 있는데도 정부는 법정·약정 주휴 시간을 모두 최저임금 산정에 포함하는 시행령 개정을 강행했다. 그 결과 벼락치기 수정안을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재입법예고 기간을 거쳐 올해 마지막 날 다시 심의하게 됐다. 개정 시행령 적용이 당장 내년 1월 1일이다. 그간 정부가 한것이라곤 최저임금법 시행령 개정안 원안을 강행할 때 “주휴 시간을 최저임금 산정에 사용해온 그간의 행정 해석을 명문화한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가 심각하다. 플라스틱 폐기물을 외국에까지 보내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는데 이는 국내에서 소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중국이 올해 1월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을 중단한 후, 한국 등 세계 여러나라는 폐기물을 동남아시아 국가로 보냈다. 그러나 플라스틱 폐기물 수입 중단 또는 규제를 선언하는 나라들이 잇따르고 있다. 폐기물을 받아들인 나라의 국민 반발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필리핀이다. 쓰레기가 섞여 재활용이 불가능한 한국발 불법 플라스틱 쓰레기가 필리핀으로 수출됐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해 현지 환경단체들이 강력히 규탄했다. 현재 5천100톤에 이르는 컨테이너가 민다나오 국제 컨테이너항에 억류돼 있다. 그린피스를 비롯한 환경단체들은 불법 플라스틱 쓰레기를 한국 정부가 즉각 수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에도 5천여 톤의 한국 불법 혼합 폐기물이 현지 세관과 항만 당국의 명령으로 우리나라로 반송되는 일이 벌어져, 국제적 비난이 쇄도했는데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업자들의 비양심적인 작태가 문제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나라에서 플라스틱이 너무 많이 생산돼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플라스틱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연말이 되면, 가는 한 해를 잘 마무리 하고 새로 시작하는 2019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2019년 새해 첫날 떠오를 해는 어디서 맞이해야 2019년이 좀 더 복된 나날로 이어질까. 한 번쯤 생각해봤을 즈음이다. 그래서 오늘은 소원명당 삼막 마을로 여행을 떠나보자. 삼막 마을은 안양시 석수동에 해당한다. 삼막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자리한 정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마을의 수호신 나무가 2그루 있다. 바로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나무이다. 할아버지 나무는 노인정 앞에 자리하고 있는데, 500년이나 된 느티나무이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도 500년이었다며 이 나무는 ‘늙지 않는 나무’라고 재치 있는 이야기들을 한다. 군데군데 상처를 치유한 흔적에서 500년의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시원하게 쭉쭉 뻗은 가지들이 아직도 늠름한 모습을 자아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로 나뭇잎의 모습이 달라지면서 할아버지 나무의 모습도 사뭇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이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 할아버지나무’라고 불린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떠나 외지에 일을 보러갈 때나 또는 중요한 시험을 치르러 갈 때면 어
삶의 질이 나아진 지금, 식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꽃식물 몇 종은 집에서 가꿀 여유를 갖게 되었다. 오래전 죽어가는 난을 살리려고 열심히 물을 주다가 결국 죽인 일이 있다. 식물을 잘 키우려면 물만 자주 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 그러다간 오히려 뿌리가 썩어 죽게 된다. 그 식물의 원산지가 어디이고 물과 비료는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햇빛은 또 어느 정도 쬐어 줘야 하는지를 잘 알고 키워야 한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와 피로감을 풀고 싶다면 편안함을 주는 녹색의 식물을 키우는 것이 좋다. 컴퓨터나 TV 주변에 선인장이나 고무나무 등의 관엽식물을 놓아두면 전자파를 흡수하게 되고, 제라늄, 페퍼민트 등은 해충제거에 효과적이다. 자녀를 사랑할수록 엄하게 키우라는 말이 있다. 자녀에 대한 과보호나 지나친 사랑이 자녀를 약하게 만들고 자립을 방해하거나 망칠 수도 있다. 식물을 사랑한다고 너무 자주 물을 주면, 그 식물은 뿌리가 썩어 죽게 되듯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오냐오냐 키우면 버릇이 나빠져 할아버지의 수염마저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다. 자녀를 사랑할수록 제대로 된 기본교육, 가정교육이 필요하다. 얼마 전 노인대학 학장으로 계시는 존경하는 선배님께서 노인대학 학
인간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정 친구의 숫자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국내에서 ‘발칙한 진화론’으로 번역된 책의 저자 옥스퍼드대 로빈 던바 교수는 “한 사람이 제대로 사귈 수 있는 친구의 수는 최대 150명”이라고 했다. 인맥이 아무리 넓어도 진짜 친구 수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고도 주장했다. 이른바 ‘던바의 법칙’이다. 그는 ‘친구 3배수 법칙’이란 것도 발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곤란한 상황이 닥쳤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진짜 절친은 5명, 그 다음 절친 15명, 좋은 친구 35명, 친구 150명, 아는 사람 500명, 알 것도 같은 사람 1천500명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국내 설문 조사에서도 ‘진짜 친구는 5명 이하’라는 응답이 70%를 차지한것을 보면 신뢰가 간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절친’을 꼽는데 주저한다. 어려울 때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는 ‘신뢰와 헌신’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공유한 인생 동반자인데도 막상 순위를 정하려면 여간 어렵지 않아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하다. 살다 보면 아는 사람은 많아 지지만 힘겨울 때 찾을 친구가 점점 없어져 그렇다. 최근 아주대병원이 70살 이상 노인 1천200 명을 조사한…
“2019년 새해 소망은 무엇인가요?” 통상 연말이 되면 다음 해를 생각한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 더 많은 수입, 승진, 자녀의 학업 등등 올해보다 더 나은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한 해 목표라는 것을 세운다. 여러분은 2018년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는가? 혹시 배우자가 올해 가졌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배우자는 당신의 올해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만약 자신의 목표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면 당연히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배우자가 그러지 못했다면 완전한 목표 달성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부부는 몸과 마음이 함께 하는 관계이다. 몸과 마음 중 하나라도 따로 움직인다면 부부 아포리아(난관)에 빠진다. 부부가 함께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 숙소에 도착하면 짐을 풀고 수영도 하고 근처 관광지도 살펴보기로 했다. 이동은 기차로 결정했다. 기차역에 도착한 부부는 기차표를 구매하기 위해 발권기 앞에 섰다. 남편은 부산행 티켓을, 아내는 경주행 티켓을 구매한다. 서로 가려고 했던 여행지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부부는 서로 다른 기차를 타고 각자 여행…
송광사 /김인구 불일암, 무소유길을 걷는다. 후박나무 그늘 아래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법정의 뒤안길 푸르른 하늘은 푸르른 하늘을 쏟아내고 뭉게구름은 뭉게구름을 따라 돌아가지. 순연의 초록은 흐드러지는 초록으로 남아 느릿, 느릿 바람도 뒤짐 지고 걷는 불일암. 문득 고개를 드니, 아주 높은 곳에 뭉게구름이 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하도 고요하고 깊어, 시인은 호수의 밑바닥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길섶에는 젖은 나무와 바위들이 짙은 가을에 흠뻑 취해 있다. 대나무도 온몸을 흔들며 늦은 가을의 서늘한 휘파람을 분다. 삼나무, 편백나무, 상수리나무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움켜쥐고 있다. 그런데 저기, 찻잎처럼 맑고 그윽한 후박나무 아래 법정의 묵언이 소스라치는 듯하다. “푸르른 하늘은 푸르른 하늘을 쏟아내고 // 뭉게구름은 뭉게구름을 따라 돌아가”야 하는 무소유의 실천이란 숲으로 향하는 목어의 강렬한 집중이 아닐까. 느릿느릿 바람이 불어오고, 순연의 초록이 목과 어깨를 감싼다. 시인은 겨우 불일암에 도착한다. 눈이라도 쏟아지면 차라리 그윽하다고 할 것인가. /박성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