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일제 치하, 경상도 진주에 국채보상운동, 3.1 만세 운동, 학교설립, 백정 해방운동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젊고 의로운 인물이 있었다. 백촌 강상호(1887년생) 선생이다. 국채보상운동 경남 책임을 맡았을 때, 스물 한 살이었다. 진주공립보통학교(진주초)의 학무위원이 된 건 스물 아홉. 그 무렵, 긴 가뭄과 대홍수가 지역사회를 초토화시켰다. 이웃들은 쌀독이 비어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백촌은 양친과 함께 곳간을 열었다. 그리고 동네의 가가호호에 부과되는 호세ㅡ주민세와 유사한ㅡ10년치를 대신 냈다. 거금이었다. 서른 살이었다. 4-50대 중견인사들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나 할 수 있는 일들을 그 나이에 농부들 벼 베듯 해낸 거다. 훗날 주민들이 백촌의 자당을 기려서 시덕불망비(施德不忘碑)를 세웠다.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다'는 착하고 아름다운 합창이다. "부족한 곳 누추한 마을 복전을 돌보아 농사짓게 해주시고, 천금을 바르게 쓰시어 많은 집이 돈을 얻으니 그 혜택이 산과 바다와 같으매 은덕이 높고 넓음을 돌에 새겨 잊지 않고 백세에 전하리라 1917년 가좌리 주민 일동" *복전(福田:복을 거두는 밭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가난한 사
지난 5월 말부터 6월 초에는 여자야구 아시안컵 대회가 있었다. 아시아 12개 나라가 출전한 이 대회에서 한국 야구 여자대표팀이 동메달을 획득했다. 덕분에 월드컵 그룹 예선에 출전할 자격을 얻었다. 남자 프로야구의 엄청난 인기를 생각하면, 야구 국가대표 대항전이라 꽤 화제가 될 법했다. 예상 외로 조용하게 지나갔다. 여자야구 아시안컵 1위는 압도적인 기량 차이를 보인 일본이었다. 세계 랭킹 1위의 벽은 높았다. 일본의 야구 수준이 한국보다 높은 걸로 정평이 나 있으니 이 정도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아쉬웠다. 언젠가부터 일본은 야구를 포함해서 다른 대부분의 구기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국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모든 종목에서 말이다. 축구 월드컵에서 한국이 16강 진출을 목표로 할 때, 일본은 16강은 기본이고 8강을 목표로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국 남자배구는 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일본은 올림픽 8강에 진출했다. 많은 종목에서 한국과 일본의 기량 차이가 보인다. 우리는 옆 나라와 이렇게까지 차이 나게 된 이유를 알고 있다. 일본은 방과 후 동아리 활동이 잘 구성되어 있다. 일본 중학생의 64%가, 고등학생
오래 전의 일이다. 분당에서 책모임 할 때 당시 대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들은 이른바 운동권 선배들을 좌파 꼰대로 지칭했다. 그들에게는 좌파나 우파나 한물 간 ‘올드 보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시각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 운동 세대라는 자부심이 무너져 내리면서 아리고 쓰라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긍하게 되었다. 몇 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80년대의 획일주의와는 정반대의 다원주의 사회가 들어섰다. 둘째, 어떤 현상이든 종합적으로 봐야하는 사회가 되었다. 민주주의나 정의 등 굵직한 개념도 사안별로 들여다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지난 시절의 지식은 달라진 시대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회과학도 많이 깊어지거나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물리학 등 인간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런데도 이른바 민주화 운동 시대의 산물인 586 정치인은 변화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실용주의 시대에 걸 맞는 어젠다 설정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살인적 양극화에 따른 불평등 해소에도 속수무책이었다. 케케묵은 민주 대 반민주 논리로만 일관한 것이다. 독
이기적 염세주의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칸트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 이론을 펼친다며 당대의 인기 철학자들을 모조리 인정하지 않았지요. 특히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 인물인 헤겔(Hegel)을 싫어했는데, “정신병자의 철학을 늘어놓는 추악한 남자”라며 신랄하게 비판했어요. 그가 푸들 강아지 한 마리를 사서 이름을 ‘헤겔’이라고 짓고는 “이 멍청한 헤겔 새끼!”라고 구박하다가 화가 날 때면 개의 배를 걷어차기도 했다는 얘기는 놀라운 에피소드예요. 그런데, 극적 반전이 일어나지요. 쇼펜하우어는 그 개가 매우 충성스럽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름을 흰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인간 내면에 숨겨진 진아(眞我)를 뜻하는 ‘아트만(atman)’으로 바꾸었어요. 사람보다 개를 더 높이 평가하게 된 그는 개의 눈을 바라보면서 “세계의 영혼을 본다”고 말했대요. 반면 인간을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고슴도치에 비유하며 서로를 찌르는 욕망덩어리이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고통에 늘 시달리는 존재라고 여기게 되지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그렇게 발전돼간 듯해요. 짐승의 세계에서도 자주 볼 수 없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들이 속속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놓고 정치권은 물론 우리사회의 분열상이 도를 넘는 느낌이다. 여야 정치권의 이해득실 계산이 앞서다 보니 상반된 결론이 나오고 이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도 기대하기 어려운 듯하다. 생뚱맞게 후쿠시마 오염수와 북한 핵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핵 오염 수 방류에 그렇게 불안해하면서 북이 갖고 있는 핵무기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태연한 정치지도자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북한핵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지는 않는지, 대응책에는 문제가 없는지를 살펴보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함을 기본적 책무로 하는 정부의 기능에서 북한핵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은 최상의 위치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대통령의 발언이나 장차관인사에 임명되는 인물 성격 등을 볼 때 정부의 대북인식이나 정책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전임정부와의 차별성,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북한의 선의를 믿고 끌려 다니며 가짜평화로 국민들을 현혹시켰다’는 주장을 한다. 그럼 역으로 북이 악의를 품고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미국의 확장억제력, 전략자산으로 선제타격, 원점타격으로 북한을 붕괴시키면 된다고 주장할 것인가. 물론 한미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무대포로 나오는 배우가 “난 무조건 한 놈만 팬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비록 여러 상대에게 집단공격을 당할 수 있지만, 어느 놈이든지 걸리는 한 놈만 패면 누가 선택될지 몰라 여럿임에도 섣불리 공격하기가 어려워진다. 그게 무대포 정신이란다. 그런데 그 정신이 가장 잘 활용하는 곳이 최근의 우리 언론이다. 권력은 권력끼리 상호 견제와 균형(Check & balance)을 이루라는 삼권분립의 정신이 무너지자 국민으로부터 제4부로서의 권한을 위임받고 권력을 감시하라는 특권 속에서 언론은 탄생했다. 언론의 철저한 원칙은 공정 보도와 진실 찾기이다. 오늘의 민주주의가 실현되기까지 과(過)도 있었지만,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한 언론의 공도 크다. 그들이 감시할 권력은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로 나눠진 삼부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지나칠 정도로 권력 감시가 입법부에 집중되고 있다. 한 놈만 패고 나머지 권력과는 밀착하는 모습이다. 언론이 입법부의 구성원인 정치인들을 견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질적으로 국민의 삶의 문제와 직결되는 곳은 행정부와 사법부의 권력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들의 권력 이탈과 남용에 대해서는 단편적이고 표피
개화기(開化期)에 우리가 만난 민주주의는 서양의 데모크라시(democracy)를 일본이 번역한 정치용어다. 먼저 해외 문물(文物)을 받아들인 그들의 노고의 결과인 것이다. 철학(哲學 philosophy) 과학(科學) 자아(自我 ego) 신문(新聞) 방송(放送) 등 개념어들의 ‘출생’의 내역과도 같다. ‘선거로 뽑은 사람에게 정치를 맡기는 제도’인 데모크라시는 그렇게 우리의 ‘민주주의’가 됐다. 번역자(일본)는 멋을 좀 부려 민주주의(民主主義) 즉 시민(백성)이 주인인 제도라고 이름 매겼다. 비슷한 말 같지만 뉘앙스(어감)를, 그 차이를 살필 일이다. 우리 마음속 민주주의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데모크라시)에 대한 ‘뒤집어보기’겠다. 일부 신문이 정부발령 인사(人事)를 보며 ‘(모두) 윤심만 살피지 않겠나’고 지적한 것을 보고 ‘윤심민주주의’란 말을 떠올렸다. 정부 여당이 ‘윤심’만 좇는다면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의 실체)는 ‘윤심’이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민주주의나 정의를 세우기 위해 피땀 바친 선각(先覺)들의 그 ‘민주주의’는 앞에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비로소 의미가 되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닌, 절대적인 개
상갓집에서 문상하고 오는 것만이 이별은 아니다. 김수영은 어느 날 잘 나가는 소설가와 탐탁지 않은 모습으로 헤어져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만나 세상을 떠났다. 시골 처녀가 도시의 공장으로 가서 돈을 벌기 위해 부모 몰래 가출한 것도 이별이고, 아르바이트해서라도 공부를 하겠다고 가족 곁을 떠나는 것도 이별이다. 그녀의 심장 수술 뒤, 저런 병이 있으니 내가 결혼하여 끝까지 지켜주는 게 사랑이라고 다짐했던 첫 직장 애인은 끝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 뒤 무심히 정들어 아흔 살까지는 살 것 같았던 가족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떠나는 이별도 경험했다. 주위에서 누가 아프다고 하면 며칠 밤을 설치게 된다. 후덕하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세월도 보낼 만큼 보냈다. 남 앞에서 수필창작을 위한 강의를 하면서 문학과 삶을 이야기하는 동안 가난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어쩌고… 하면서 인생 학위 논문이라도 지닌 듯 말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 모두가 이별하는 과정 속의 일이요 바람과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였으며, 잠시 머무는 형상이었다. 그런데도 영혼의 이웃 같고 인문학적 혈액형과 정서적인 칼라가 닮은 친구가 입원한다면 남의 일 같지 않다.…
세계에는 재미난 대회들이 많다. 핀란드의 ‘아내 업고 달리기 대회’, 호주의 ‘참치 멀리 던지기 대회’ , 독일의 ‘오피스 체어 레이스(사무실 바퀴의자 달리기 대회)와 익스트림 다림질 대회(수중 다림질, 절벽 다림질, 번지점프 다림질 등), 뉴질랜드의 ’어린이 대상, 길고양이 사냥대회‘ 등이 그 예다. 우리나라 ’멍 때리기 대회‘도 집어넣을 수 있을 듯 하고. 별나기로 최고인 듯싶은 대회는 슬로바키아의 ‘무덤 파기 대회’다. 지난 2016년, 장례 산업 발전을 위해 장례업체 직원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대회 규칙을 보면, 2인 1조를 이룰 것, 오직 삽과 곡괭이만 사용할 것, 무덤은 길이 200cm, 깊이 150cm, 폭 90cm의 규격을 맞출 것 등. 심사는 정확도, 스피드,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평가하는데, ‘아름다움’은 ‘얼마나 예쁘게 팠는가’를 본다고 한다. 이 이색행사 이야기를 듣다보면, 죽음이 멀고 두렵게 느껴지지만은 않다. 슬로바키아 여행하면 공동묘지가 마을에 속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풍경이 이 대회와 겹쳐 떠오른다. 죽음을 삶 가까이에 둔 슬로바키아 문화는 주변 강대국의 끊임없는 침탈로 피얼룩진 과거사와 유관할 듯싶다. 그 오욕의 역사…
보수와 진보가 대북정책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북한 정권에 대한 생각, 즉 망해서 없어져야 할 악마와 같은 존재로 상대할 필요 없이 억지력을 높이고 압박과 제재를 강화하면 북한정권은 붕괴할 것이라는 희망적 사고를 하는 보수와 그래도 함께 존재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교류와 협력의 화해정책을 지속한다면 북한정권도 변화의 계기를 갖게 될 것이라는데 방점을 둔 진보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북한 핵문제에서도 북한은 핵무기 보유가 목적이어서 북미간 핵협상은 핵개발을 위한 시간끌기이고 종국에 한반도를 적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핵무기를 개발 한다는 생각을 갖고 우리의 안전담보를 위해 한미동맹을 강화시켜 핵우산과 확장억제력을 높여야 한다는 보수의 주장과 북한의 핵개발 목적은 한미와의 군사력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격차로 인해 자신들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핵무기를 보유하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제재와 함께 대화와 설득을 병행해야 한다는, 나아가 핵문제 해결이 안 되는 근본 이유는 미국측의 미온적 태도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보는 진보의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각 진영 주장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은 별 의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