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판매량이 증가한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공급자들이 매일같이 겪는 사정이다. 이 제품과 서비스에 소비자들의 98%가 만족해하면, 꽤 우수한 생산물이다. 불만을 표출하는 2%의 소비자. 2% 중 1%는 막무가내, 1%는 그래도 이유 있는 불평을 제기한다면, 공급자들은 이 2% 부족분을 채워나간다. 그럼으로써 조직은 발전해 나간다. 자본주의 이치다. 경제생활만이 아니다. 정치 분과에서도 소비자인 국민의 상당수가 통치와 행정행위에 만족해하면, 그 정권은 괜찮은 정부다. 그런데 1%나 2%가 아닌 20%, 30%, 혹은 6~70%의 국민이 정부정책에 만족해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무능한 정부, 혹은 소통이 안 되는 정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위험하다. 기업의 영역에선 1%, 2%의 소비자 불만족을 만족 향상으로 전환하기 위해 시스템을 점검한다. 초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이런 관점서 보면 공급자로서의 정부는 자본주의 체제에선 용납이 안 되는 조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다양한 국민 개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국가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요즘 정부의 행동을 보면, 참 불편하고 낯설다.
눈을 감습니다. 보다가 맙니다. 말았어도 본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본 것은 눈 바깥의 일이지만, 못 본 척 하는 것은 눈 안쪽의 일입니다. 눈 바깥이 세상이라면 눈 안쪽은 사람의 영역입니다. 사람의 영역에서는 생각이 으뜸입니다. 으뜸은 사람마다 서로 달라서, 보는 것에 대한 반응 또한 서로 다릅니다. 보이는 것은 하나인데, 보고 싶다거나 보기 싫다거나 못 본 척 시치미를 떼기도 합니다. 늙음 때문일까요. 아니면 낡음 때문일까요. 나는 자꾸 고개를 돌리고 맙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귀를 닫습니다. 겁먹은 하루가 안으로 돌아앉습니다. 안으로 돌아앉는다고 바깥의 일부가 아닐 순 없습니다. 시간은 안팎 어디서도 고르게 흐릅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시간 말입니다. 시간은 그 무엇보다 공평합니다. 사람이든 사람 아닌 것이든 시간 앞에 영원할 수 없습니다. 영원은,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수 없이 많은 신화(神話)가 만들어진 것도 그래서입니다. 상상으로 빚어낸 신화의 뿌리에는 사람의 욕망이 있습니다. 신화를 먹고 자라난 온갖 신(神)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있을 수 없는 영원처럼, 신화 속의 신(神)들 역시 우리가
아이가 어릴 적에 어른이 묻는 공통의 질문이 있는데, 이런 것도 있다. 너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할래?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다. 첫째, 실제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묻는다. 대통령부터 과학자, 선생님, 축구선수 그리고 유튜버가 되겠다는 답변처럼 미래의 모습을 설계해 보고 함께 상상해 보자는 취지다. 첫 번째 답변은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해야 하는 불가피성에 초점을 맞춘다. 두 번째 답변은 일할 의지를 강조한다.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어른 역할을 제대로 할 것이기 때문에 노력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더 많이 공부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커서 원하는 수익을 벌 만한 직업을 못 가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선호하게 한다. 일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는 것은 미리 준비하지 않았거나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 효과가 있다. 두 가지 답변 모두 의도가 무엇이었건 간에 일해야 먹고산다는 명제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일은 삶의 여러 활동 중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야 하는 것이 일이요, 노동이다. 그런데 일에 대한,
잊지 못할 여행의 순간을 떠올려보자. 끝없이 펼쳐진 화려한 꽃밭에서 원피스를 팔랑이며 뛰어가는 모습. 감성적인 숙소 풀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장면. 시원한 폭포 앞에서 함께한 이들과 잡은 포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자. 그 장면은 1인칭일까, 3인칭일까? 이 시대의 기억은 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스마트폰에게, 사진에게, 영상에게, 그리고 sns에게. 기억은 짧지만 기록은 영원히 남고, 기억은 혼자 돌아볼 수밖에 없지만 공유한 기록은 타인의 반응을 이끌어 낸다. 기록이 기억의 대체를 넘어 세상을 장악하는 동안 사람들은 순식간에 시선을 잡아챌 수 있는 기록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되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혹은 누구와 함께였는지보다 중요한 건 여행에서 남긴 한 장의, 혹은 몇 분의 기록이다. 이왕이면 눈부시고 찬란하게, 순식간에 타인의 부러움과 감탄을 끌어낼 수 있게. 그러나 일부러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가슴 깊이 남아 불쑥불쑥 떠오르는 여행의 순간은 기록과 다른 방식으로 저장된다. 그 순간은 꽃밭을 걸을 때 귀 옆을 스치던 바람 한 자락일 수도, 비를 피해 들어간 처마 밑에서 맞잡은 손의 따스함일 수도 있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수능의 변별력을 구실로 전문가도 풀기 어려운 초고난도의 소위 ‘킬러 문항’이란 ‘약자인 우리 아이들 갖고 장난치는 것’이라고 하며 사교육 문제를 거론한 것은 타당했다. 수능의 변별력을 명분으로 공교육만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능 문제가 존재하는 한, 그것이 우리 사회의 대표적 고질병인 사교육 번성의 기반임은 분명하다. 낮은 임금에 아이를 키우며 주택 마련에 더해 사교육비에 허덕이는 맞벌이 부부를 생각해 보자. 킬러 문항을 못푸는 아이의 성적은 별도로, 친구 모두 학원에 가 버려 같이 놀 친구가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왕따로 전락하게 된다. 부모의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은 노후 빈곤과 이어지고, 이는 저출산이나 강남 부동산 가격 등 다양한 사회 문제 속에 반영된다. 공교육 현장의 교사들 역시 학생들과의 관계 형성이나 역할에 있어서 무기력에 빠지며, 아이는 아이대로 성적 경쟁 속에 건강한 인성 형성보다는 모든 것을 성적 서열로 판단하게 된다. 성적 때문에 자살하는 어린 학생들의 비극이 이미 낯설지 않게 된 우리 사회다. 과도한 사교육 현실 속의 일반 가정에서는 학생에게 부가 아니라 가난을 세습시키는 현실이다. 물론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발언
인간의 존엄성은 때로는 이성으로, 때로는 양심으로 불리는 우리의 영적 본원에 존재한다. 이 본원은 시공을 초월하여 의심할 나위 없는 진리와 영원 불변의 진실을 가진다. 그것은 불완전한 것 속에서 완전한 것을 본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공평하며 언제나 인성 속의 편파적이고 이기적인 것과 대립하고 있다. 이 본원은 우리들 각 개인에게 엄연히 우리의 이웃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귀중한 존재라는 것, 그들의 권리 또한 우리의 그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신성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또 우리에게 진리가 아무리 우리의 자존심에 거스르는 것일지라도 끝까지 진리를 받아들이라고 명령한다. 우리에게 공정하다는 것이 아무리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일지라도 언제나 공정하라고 명령한다. 이 영적 본원은 우리에게 그것이 어떤 사람 속에서 발견되더라도 아름답고 거룩하고 행복한 모든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라고 호소한다. 이 본원은 바로 인간 내부에 있는 신의 빛이다. (채닝) 사람들은 육체적인 생활 속에서 하늘의 기쁨을 얻고 법열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오직 선한 삶을 살고 싶은 바람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청정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지혜와 감정이 청정할 때 그들에게 신성이 계시된다.
정치적 무관심이 영화적 무관심을 부른다. 이제 아무도 영화’판’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아무리 코로나19 탓이었다 해도 이제 극장가를 두고 수직계열화 문제니 스크린독과점 문제니 등등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특히 스크린 독과점 문제가 그렇다. ‘범죄도시3’가 개봉 초기 전국 2352개 스크린에 걸린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전국 스크린 수는 2700개 아래 수준이다. 그동안 돈을 못벌었으니, 뭣보다 극장가가 망하게 생겼으니, 한 영화만이라도 돈을 좀 번다는데 뭐 그리 잘못이겠느냐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적어도 생각을 해야 한다. ‘범죄3’가 그렇게 시장을 싹쓸이 하고 있을 때 지난 해 베를린영화제와 런던비평가협회에서 상을 탔으며 올해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작이었던 ‘말없는 소녀’는 전국 스크린 45개에 불과한 것에 대해 생각을 좀 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아무 것도 기대할 게 없는 정권이고 세상이라고 한다. 영화 따위 어떻게 된다 한들 이제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식이다. 심지어 정부가 영화진흥위원회를 지목해 혈세를 낭비했다며 곧 감사에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EBS가 ‘다큐멘터리K 대학혁신’이라는 타이틀의 5부작 프로그램을 통해 대학 혁신의 과제와 방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복기해주었다. 5월 17일 방영된 1부 ‘왜 대학은 달라져야 하는가’를 시작으로 ‘서울대 10개 만들기’, ‘최고의 대학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채용이 대학을 바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1일의 ‘대학, 창업의 중심이 되다’로 막을 내렸다. 1부에서는 대학이 달라져야 하는 이유로 자퇴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교수들이 수업을 부실하게 해 등록금이 아깝다는 것이다. 2부에서는 중앙대 김누리 교수와 경희대 김종영 교수가 혁신과 융합형 교육으로의 전환을 강조하면서 제기한 ‘서울대 10개 만들기’ 프로젝트를 주 의제로 다루었다. 3부에서는 새로운 지식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공간이 아니라 틀 안에 가두어 두고 창의력을 억누르며 ‘지식 답습’을 강제하는 대한민국 대학의 문제를 다루었고, 4부에서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무장한 인재를 요구하는 기업과 그에 부응하지 못하는 대학의 현실을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5부에서는 대학이 창업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리조나 대학과 가천대학의 사례에서 드러났듯이 혁신의 장애물은 학과 체제
쉰 살이 되면 인생에서 쉰내가 나는 것인가? 했었다. 쉰 살이 지나고 정년 한 지도 십 수년이 되었다. 우주적인 고독을 안고 홀로그리움과 두려움에 서서히 길들여지는 것일까.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했다. 처신에 있어서도 멧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며 삼갔다. 이 세상 ‘천재는 99%의 노력과 1% 재능이다.’고 생각하며 오로지 능력과 노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닦달하며 빈 틈 없이 살았다. 정다운 부모, 한 사람의 친형제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걸었다. 이제는 요즘 젊은 세대들의 개그 같이 성공은 ‘1%의 재능에 99%의 돈과 백으로 얻어진다.’는 말을 긍정하며 허허 허! 하고 웃는다. 새벽 다섯 시 반, 인간의 체온을 느끼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나면서 ‘오늘은 또? …’ 하는 생각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동물원 길을 가고 있었다.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30대 후반 젊은 부부가 간편한 복장으로 달리고 있다. 건강한 부부의 모습이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좀 더 가니 구청의 느린 청소차가 도로의 먼지를 흡입하여 포장도로를 깨끗이 닦아놓고 있다. 공원으로 가는 대학로 숲길은 오래된 플라타너스가 시골 동구 밖 느티나무를…
KBS가 뉴스의 중심에 섰다. 대통령실이 지난 5일 한전이 전기료와 통합 징수해 온 ’KBS 수신료를 분리 징수하도록 법령을 개정하라‘고 방송통신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부에 권고하자, 사흘 뒤 김의철 KBS 사장이 ’수신료 분리징수가 철회되면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대통령실 발표가 있자, 조선일보는 ‘KBS 수신료, 전기료와 분리 징수한다’고 확정된 것처럼 보도했다. ‘수신료는 사실상 국민세금···국민 불편 호소 반영’이라는 대통령실 입장만을 부각시켰다. 중앙은 ‘대통령실 KBS 수신료 분리징수 권고···개혁 신호탄?’이란 스트레이트 기사와 ‘대통령실 “KBS 수신료 통합징수, 국민 찬성 0.5%뿐”'이라는 제목으로 해설기사를 내보냈다. 두 신문은 분리징수가 ’개혁‘인지 ’개악‘인지에 대한 검증은 없었다. 동아는 ’대통령실 “KBS 수신료, 전기료와 분리징수를‘이란 제목으로 보도해 가치판단을 배제했다. 권고를 반영한 제목이었다. 해설기사도 대통령실이 제시한 국민 97%가 분리 징수를 찬성한다는 주장과 공영방송의 근간을 훼손한다는 KBS 입장을 균형 있게 반영했다. 한국·경향·한겨레는 첫 번째 사설로 KBS 수입의 45%를 차지하는 수신료 분리징수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