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원 김용서 시장은 한국미술협회 수원지부가 주최한 제10회 나혜석미술대전 시상식에서 "민선 4기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수원의 자랑인 나혜석 선생의 기념관을 건립할 것을 약속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축사를 통해 김 시장은 "수원 출신인 나혜석 선생의 그림과 글, 업적 등을 모아 놓은 기념관이 건립돼야 할 필요성을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며 "2008년에는 나혜석 기념관에서 미술대전 시상식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해 나혜석 기념관 건립의 전망을 밝게 했다.
정월 나혜석, 그는 누구이기에 수원의 기념관 건립이 이야기되는 것인가.
나혜석 탄생 11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삶을 따라가본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1896∼1949).
친족들에 따르면 올해는 나혜석이 병술년에 만 50세로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흘러 110년을 맞았다.
세상을 떠난 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수원 출생의 그녀를 기리는 미술대전과 전시회, 심포지엄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매년 끊임없이 개최되고 있다.
현대인에게 '나혜석'이라는 존재가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화가이자 소설가였던, 그리고 여권신장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녀는 오히려 지금 묻는 듯 하다.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로서의 그녀.
정월(晶月) 나혜석은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1910년 수원삼일여학교를 졸업, 191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어 당시 낯선 미술 장르였던 유화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초창기에는 '이른 아침' 등의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고, 1922년부터 1932년까지 해외 여행을 떠났을 때를 빼고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과 특선 등의 수상 경력을 쌓기도 했다.
나혜석의 미술이 새롭게 발굴되고 조명받기 시작한 때는 1974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한 세대가 지나서야 묻혀있던 그녀의 그림들이 발굴되고 언론이 이를 주목하면서 나혜석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혜석의 회화는 시기별로 다른 화풍을 드러낸다.
동경유학 이후부터 세계일주 이전까지의 작품(1918-1926)은 일본에서 습득한 아카데미즘과 인상파가 절충된 느낌이다.
세계일주 및 유럽체류시기 작품(1927-1929)들의 경향은 인상파 화풍위에 야수파 화풍과 입체파 화풍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 특징.
귀국이후의 작품(1930-1935)은 인상파 화풍의 작품과 파리시절의 스케치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로 전반적으로 다양한 경향을 보인다.
1993년에는 미술연구소인 '여자미술학사'를 설립해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자화상', '스페인의 풍경', '파리풍경' 등이 꼽힌다.
# 여권신장을 글로 풀어낸 소설가로서의 나혜석.
미술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소질이 있던 그녀는 동경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근대적인 여권신장에 관한 글을 다수 발표했다.
나혜석의 문학은 비평에서 출발하는데 1914년 12월 '학지광'에 실은 '이상적부인'이 처음 발표한 글로써 여성비평에 해당할만 하다.
이후 1918년 '여자계'에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을 담은 여러 논설들과 신 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했다.
'경희' 이 작품은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일반적인 여성들이 택하는 결혼을 거부하는 혁신적인 모습을 담고 있으면서도 주인공의 이런 행동에 불안감을 느끼지 않게 되어있다.
주인공 경희의 한 장에 걸친 자기불안이 표현되도 독자는 오히려 그녀가 자신감을 가지고 그의 길을 가도록 독자들을 적극 지지하는 마음이 되는 것 또한 그러하다.
나혜석은 또한 '폐허' 동인을 구성해 김억, 오상순, 염상섭, 김일엽과 함께 문학 활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녀는 여권신장을 글로써 주장하며 몸소실천하기도 했는데, 1919년 3·1운동 때는 여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참가시키기 위해 김활란, 박인덕, 신준려, 김마리아 등과 함께 이화학당에서 비밀 회합을 가지기도 했다.
결국 그 죄로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중국 단둥에서 외교관 부인 신분을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비밀리에 지원한 민족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로 썼을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 해방의 사상가였던 것.
이혼의 시련을 겪은 이후 나혜석은 제10회 선전에서 '정원'으로 특선을 수상했고, 다음해에는 세계 일주 기행문인 '구미유기(歐美遊記)'를 '삼천리'지에 연재했다.
1년 뒤 그는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하면서 당시 여성의 억압철폐, 여성의 자유실현 등 기존의 인습을 강력히 비판하는데 앞장섰던 '신여성'으로 자리매김했다.
# 여성으로, 어머니로, 예술가로 쓸쓸하게 사라진 그.
일본 유학시절 좋은 혼처가 있으니 공부를 그만 두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했던 나혜석.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면서 당시 상황으로는 파격적으로 신문지상의 자신의 약혼식 발표를 하고, 결혼식 때는 예술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냈던 당찬 여성이었다.
외교관의 아내가 된 그녀는 3남매의 어머니로, 예술가로서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점차 남편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 자신의 예술세계를 반성하며 남편과 함께 1927년 3년간의 유럽과 미국 등 세계일주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 중 파리 등에서 나혜석은 서구 여성들의 좀 더 인간적인 삶을 목격하고 파리에서의 새로운 그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예술을 논할 수 있었던 남자 최린과 사랑에 빠졌고 귀국 후 아이들을 두고 이혼을 했다.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당시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이혼을 당하고 빈몸으로 쫓겨났던 그녀.
나예석의 두 남자는 멀쩡하게 생활을 영위하는 반면, 이후 개인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차가운 반응 등 불공평한 사회의 편견에 그녀는 점차 사라져갔다.
결국 그는 사회의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워 먹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고, 해방 후에는 서울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고 1948년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무덤도 마련되지 않은 채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한 인간의 삶만으로 따지고 보자면 너무나 쓸쓸하고 허무한 인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성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실천하는 예술가로서의 그녀는 지금 우리 세대에 분명 간과할 수 없는 화두를 꺼낸다.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가 보여주고자 했던 여성상 그리고 예술가상은 이미 기록돼 있는 것은 아닐까.
류설아기자 rsa@kg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