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전북 정읍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실천문학' 가을호에 소설 발표
2005년 장편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실천문학사)' 출간
정말 전쟁 같은 하루다. K는 그렇게 생각하며, 형사과장실 소파에 깊숙이 주저앉았다. 몸이 녹초다. 머리에는 열이 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소파에 앉은 그대로 잠이나 실컷 잤으면 싶다.
K는 ○○신문 기자였다. 년 수로는 6년 차였고, 사회부로 옮겨온 것은 두 달 전이었다. 정치부에서였다.
그는 사회부에 옮겨와서도 별 무리 없이 적응했다. 그것은 부서의 개별적 특성만큼이나 강한, 6년이라는 기자생활이 갖는 세월의 힘이었다. 6년쯤 버티다보면 어느 부서에 데려다 놔도 견딜 재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도 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행운은 하나씩 오고,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이 전혀 그릇되지 않게 느껴지는 형국인 것이다.
우선, 아침부터 부서회의에 늦어 부장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늦게 도착해 쭈뼛쭈뼛 자리를 찾아가는 그에게, 부장은 도대체 요즘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느냐고 단단히 화난 목소리로 핀잔을 줬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한 시민단체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았다. K가 기사를 편파적으로, 또 과장되게 썼다는 것이었다.
사실, K는 일주일 전부터 그 전화를 받아오고 있었다. 그 이유는 대략 이랬다. 그 시민단체는 주로 시의회를 감찰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K는 그 시민단체의 몇몇 회원들이 시의회에서 제공하는 기념품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고, 공히 시의회를 감찰하는 시민단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수수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기사를 썼으며, 그것이 그 시민단체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아마, 평소 같았다면, 그저 예예하고 넘겨버릴 수도 있었다. 6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그런 식의 항의 전화를 받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주일을 그렇게 버텨왔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만큼은 그도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민단체의 회원에게 내 기사가 왜 편파적이고 과장되었느냐 하고 따져물었고, 그것이 말다툼이 되어 고함까지 질러야 했다. 선배인 L이 제지 않았다면 그는 욕설이라도 퍼부었을 것이다.
그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것은 시민단체 회원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이 감정에 휩쓸려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로인해 선후배 기자들에게 민망함을 샀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는 그 민망함을 떨치기 위해 일부러 더 화가 난 채 하며 자리를 떴다. 그런데, 그 때 또 하필이면 아내에게서 좋지 못한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5개월 된 꼬마 녀석의 몸이 불덩어리라는 것이다. K는 다시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에 대고 매정하게 소리쳤다.
“그걸 왜 나한테 전화해? 병원에 가야지.”
사실, K가 아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에, 첫 아기인 만큼 매사에 서툴렀고, 그래서 겁부터 나 자신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짜증이 덧날대로 덧나 있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짜증부터 내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 그의 마음을 더 짜증나게 했다. 결국 그는 곧장 후회가 되면서도, 마음에도 없는 말로 애처럼 굴지 말라고, 자신이 그런 것 일일이 챙길 수 없다는 것 처음 알았냐고 또 다시 매정하게 말한 후에 휴대폰의 폴더를 닫아버렸다. 그리고 늦은 출근 때문에 아직 채 돌아보지 못한 각 구역의 경찰소며 지구대를 살펴보기 위해 신문사를 나섰다. 마음이 천근같았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신문사를 빠져나오다가 그만 잠시 정신을 놓았고, 그 바람에 신호등 앞에서 정차해 있던 그의 차가 역시 정차해 있던 앞차의 뒷범퍼를 들이밀었다.
‘될 대로 되라.’
그는 앞차의 차 주인이 차문을 열고나서는 것을 보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생각했다.
사실, K는 요즘 들어 슬럼프였다. 의욕은 사라지고, 긴장은 늦춰지고 마는 것이다. 마음을 다 잡아도 그렇다. 그래서 그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속으로는 내심 불안했었다. 이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말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불운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그는 그것이 슬럼프의 본격적인 서곡인 것 같아 초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그와 절친한 선배 L이 해줬던 수많은 충고도 이 경우에는 무용지물이었다.
K는 이제 시간을 살폈다. 오후 두시 삼십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K는 형사과장을 좀 더 기다려보나 어쩌나 하다가 결국, 소파에서 일어섰다. 어쨌거나 오후 세 시에는 취재보고를 해야 했고, 그 전에 낚을만한 기사거리가 있으면 하나라도 더 낚아야하는 것이다. 그는 끙하고 일어나 형사지원실로 갔다.
형사지원실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세 명의 경관이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K는 그들과 밋밋한 인사를 나눴다. 그 다음에는 경관 중 한 명에게 절도관련 구속 수사가 있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없는데? 왜 누가 절도했대?”
경관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도리어 물어왔다. 가끔은 부서별 보고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경관들보다 발로 뛰는 K가 훨씬 정보가 빠르기 때문이었다.
“강력 *팀에서 절도가 있었던데요. 아직 보고 안 올라왔어요?”
“우리는 아직 보고 받은 거 없어.”
경관은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K는 더 있어봐야 건질 것이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사건이 나면 연락을 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들어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경관들과 밋밋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곧장 교통사고 조사계로 지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교통사고 조사계 역시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그는 다시 강력 *팀에 들러봤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사십 여분의 다리품을 팔고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경찰서를 빠져나와야 했다.
그는 좀 허망해졌다. 그러자, 오전부터 그 때까지 눌러왔던 생각이 불쑥 고개를 디밀었다.
‘이 기회에 확 이직이나 해버릴까.’
K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과거에도 여러 번이었다. 그도그럴것이, 애초부터 그는 기자가 꿈이 아니었다. 그저 쓸만한 직장에 들어가 남들 일할 때 일하고, 남들 놀 때 놀고, 남들 돈 모을 때 돈을 모아 편안한 인생을 설계하고 싶었던 것이다. 기자라는 것은 그에게 그저 흥미로운, 별세계의 직업이었다. 그랬던 것이 첫 직장을 구하는 데 실패하고, 어디 한 번 하는 마음으로 ○○신문사의 수습기자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 일 이 년 하다 그만두려니 했던 것이 지금까지 와 버렸다. 처음부터 기자가 꿈이었고, 또 그만큼 제법 뚜렷한 언론관을 지닌 채 출발한 옆자리의 J나 P와는 다른 것이다.
만약, ○○신문사에 대한 자긍심이라도 높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의 언론구조라는 것이 그렇다. 중앙 일간지 외에는 제대로 된 신문 취급을 못 받는 게 현실이다. 중앙 일간지와 차별화된 기사를 쓰기위해 몇 배를 뛰고, 기사를 고치고 또 고치고, 일간지들이 주목하지 않는 지역민들의 처지에 애정을 가지고 덤벼들어도, 그래서 겨우 새벽에 원고를 마감해 넘기며, 이만하면 알아주겠지 하며 가슴 뿌듯해 해도, 시중에 깔리면 외면당하기 일쑤다. 중앙에서 아무리 좋은 기자를 끌어와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언젠가는 작은 동네에 사건이 나서 제일 먼저 달려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마을 주민들은 중앙일간지가 와야 한다, 주요방송사를 불러라 하고 취재 협조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중앙일간지도 주요방송사도 오지 않자 그제야 겨우 입을 뗐다.
신문기자라는 직업도 고달프기 그지없다. 일정부터가 꽉 짜여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여덟시 반부터는 각 부서회의가 있고, 아홉시부터는 부장회의가 시작된다. 이 때부터, 부장 미만의 기자들은 각자의 출입처로 떠난다. 그리고 기사를 쫓아 정신없이 현장을 누비고 다닌다. 점심을 넘길 때가 적지 않다. 그나마 꽤 괜찮은 기사거리가 있으면 공복감도 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기사도 흔하지는 않다. 더구나 중앙일간지와 차별화를 꾀하고, 한 발 앞서 도착해야 한다는 어쩔 수 없는 강박관념까지 더해지면 신경을 쉽게 늦출 수 없다.
오후 세 시에는 각 부장에게 취재보고가 들어간다. 이 시간에 기사 작성 여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된 기사를 두고, 오후 네 시에는 데스크 회의에 들어간다. 여기에는 편집국장과 각 부장들이 참여하며, 기사의 밸류와 주요 기사들을 선정한다. 이 때에 부장 미만 기자들은 신문사에 돌아가 기사를 작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취재가 신통치 못하면 기사 작성의 시간은 뒤로 미뤄진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자정 넘어서까지 기사 작성을 기약할 수 없다.
오후 여섯 시에는 편집부로 기사가 넘어간다. 그리고 이 때부터 편집부 직원들은 바빠진다. 하지만, 대개 오후 여섯 시에 기사를 넘기는 경우는 드물며, 그 이후 시간, 더 나아가 일명 데드라인 시간이라는 오후 여덟시 반까지 기사를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 역시 특별한 기사의 경우에는 쉽게 마감시간을 기약할 수 없다.
일정이 이렇다보니,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자정 가까운 시간에야 퇴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부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까닭에, K는 처음부터 어떤 본능처럼 적극적인 기자이기를 기피했다. 말하자면, 샐러리맨 형 기자로 적당히 기사거리나 몇 줄 취재해 쓰고 월급이나 받아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만큼만 해도 일반 기업체나 관공서 직원들 못지않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투덜거렸다.
그런 그에게 J나 P는 좀 별난 종자들이었다. 더 나아가, 이제 막 차장이 된 선배 L도 그랬다.
L은 올해 12년차 기자로, K는 물론 함께 입사한 J나 P의 실질적인 사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무척이나 근성강한 기자였다. 또한 기자상이며 언론관이 무척이나 확고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후진을 모르는 탱크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 그가 술만 취하면 하는 말은, 제 3의 사회적 정의니, 시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기자니 하는 것이었다. J나 P는 무척 진지하게, 또 심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시 샐러리맨 형 기자였던 K가 보기에는 허울 좋은 명분이거나 그럴싸한 사탕발림에 다름 아니었다. 그 까닭에 K와 L은 초기에 마찰도 심했다. K는 K대로 L이 버겁고, L은 L대로 눈치나 보고 요령으로 기사 몇 줄 작성하려는 K가 못미더웠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L은 K에게 무슨 최후통첩이라도 하듯이 이런 말을 했었다.
“네 놈은 아직 모르겠지만, 네 놈도 싹수라는 게 있으면 힘들 때 오기가 생길거구. 그러다보면 내가 말한 게 필요할 거다.”
그 당시 K는 그 말을 비웃었었다. 가뜩이나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에 L의 말이 귓전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6년.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가 힘들 때, 그래서 이 놈의 기자라는 직책을 두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을 때, 묘하게 어떤 오기가 샘솟으며, 또 그 때마다 그가 조롱해 마지않던 그 놈의 올바른 기자상이니 언론관이니 하는 것이 머리와 양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나는 기자다 이래봬도 기자다라는 어떤 각오로 어금니를 물게 하고 새벽에 출근하고, 새벽에 퇴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이제는 그가 수습기자들로부터 탱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슬럼프에 빠졌다 해도 그렇다. 정말이지, 아이러니이다.
지금도 그는 그랬다. 이 기회에 확 이직이나 해버릴까하고 생각한 순간에, 터무니없게도 나는 지금 기자이고, 그러니 내 손에서 펜을 놓는 순간까지는 기자이다라고 비논리적인, 그리고 오기섞인 비약을 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6년 동안 그가 새긴 기사의 글자들 ― 타인들에게는 딱딱하고 건조하지만, 그의 손끝에서만큼은 느낄 수는 있는 어떤 고뇌와 희열의 순간들이 교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사실은 그가 어떠한 명분이나 합리적인 사고로도 도달할 수 없는,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고 체력과 정신력이 다할 때까지 기자쟁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 농사를 지은 농부가 두 손에 박힌 옹이를 쉽게 제거할 수 없듯 쉽게 제거할 수도 없다.
‘어쩌다 여기까지 와버렸나 그래.’
그는 마음속으로 푸념 아닌 푸념을 했다. 그리고 그 때 그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그는 울적한 기분에서 깨어나 마지못한 심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시간은 벌써 열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K는 헤드라이트를 켜둔 채, 산기슭 공터로 갔다. 수습기자 두 달째인 H가 뒤따랐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K와 H, 그리고 공터를 비추고 있었다.
“여기가 정말로 쓰레기 매립지 맞아요?”
H가 물었다. 대답대신 K는 쭈그려 앉아 공터를 살펴보았다. 공터는 풀 없는 운동장처럼 잘 다져져 있었고, 군데군데 쓰레기들이 눈에 띄었다. 외형상으로 보면, 쓰레기 매립지로 의심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땅을 파봐야 알 수 있다.
쓰레기 매립지에 대한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다고 전해준 사람은 선배 L이었다. 그가 경찰서에 나와 기진맥진해 있을 때였다.
“그 곳에 공단에서 나온 불법 쓰레기가 꽤 묻혀 있다는 거야.”
그는 말했다.
K는 그 때 워낙 기진맥진해 있던 터라, 또 하루 종일 짜증에 시달려 모든 것이 마뜩지 않던 터라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원고 작성이 끝이 나자, 무엇엔가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이 곳으로 향했다. 천상 기사거리나 쓰다 죽을 놈이라며 스스로에게 자학하듯 투덜거리면서도 그랬다.
“과장님 돌아갑시다. 내일 해두 될 걸 무슨 고생입니까? 내일 해요. 게다가, 여기 쓰레기가 묻혀 있다는 것도 확실치 않잖아요.”
H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K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담배를 입에 물며 헤드라이트 불빛에 드러난 공터를 바라보았다. H는 계속 투덜거렸다. K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 바닥을 떠나지 못한다면, 자기처럼 대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게다가, H의 말이 그른 것도 아니었다. 내일 확인해도 늦었다고는 볼 수 없다. 또, 이 곳에 정말 쓰레기가 묻혀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 하지만, 역시 어떤 본능과 같은 습성이 그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기자라면 제보에 가장 민첩하게 행동해야 하고, 그것에서 한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떨쳐버릴 수 없다. 몇 시간 전의 환멸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제보라고 다 믿을 것은 못된다. 특히 익명의 제보는. 잘 판단하고 해.”
그가 H를 달고 ○○신문사를 나서려고 할 때, L은 말했다.
K는 L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똑같은 경우를 당해봤기 때문이었다. 사년 전, K가 정치부 기자였을 때, L은 한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쓰레기 매립에 대한 제보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 가서 사비까지 들여 포크레인을 부른 다음 3미터 가량을 파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거짓 제보였던 것이다.
“헛고생 할 수도 있어. 가뜩이나 너는 요즘 슬럼프잖아. 헛심쓰지 마.”
L은 다시 말했다.
그 때, K는 자신도 모르게 만약에 차장님이 나라면 어떡하겠어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L은 잠시 K를 바라보더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야 무조건 가서 땅부터 파고 봐. 땅이야 메우면 되니까.”
이제 K는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쭈그려 앉은 채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야, H야, 가서 삽하고 곡괭이 좀 사와라. 돈은 내가 나중에 처리해줄게.”
그러자, H는 발뺌하듯 말했다.
“이 밤에 어디 가서 그런 것을 사요.”
K는 H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L이 그에게 그랬듯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럼, 집에 있는 걸 가져오던가. 어쨌거나 가져와봐.”
H는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얼마나 파시게요?”
K는 공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혼잣말하듯 말했다.
“딱 1미터만 파본다.”
H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과장님하고 나하고 둘이서요?”
“그럼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냐?”
H는 궁시렁댔다. 궁시렁대는 소리를 들으니, 자신은 노가다 뛰려고 신문사에 입사한 것은 아닌데 뭐 이런 내용이었다. K는 어쩐지 그런 투덜거림이 좋았다. 6년 전의 자신도 그랬다. 그는 농담하듯 말했다.
“임마, 징징대지 마. 정의사회 구현 모르냐? 우리가 1미터를 파면, 정의사회도 1미터 깊어지는 거야.”
그러자, H는 빈정거리듯 대꾸했다.
“오늘은 술 안드시구도 그 놈의 정의라는 말씀 잘 하시네요?”
K는 나무라지 않았다. 대신 다시 농담처럼 말했다.
“네 놈은 아직 모르겠지만, 네 놈도 싹수라는 게 있으면 힘들 때 오기가 생길거구. 그러다보면 내가 말한 게 필요할 거다.”
그 말은 오래 전 선배 L이 자신에게 해 준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을 이해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 H도 그럴 것이다. 그는 묘한 감회에 젖어들었다.
“그런 것 다 필요없구요. 보너스나 좀 두둑이 올려달라고 건의하세요. 그럼 내가 이런 일 몇 백번이라도 하지.”
H는 또 다시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좀 전처럼 이 밤에 어디 가서 삽이며 곡괭이를 구하느냐고 궁시렁대며 곧장 헤드라이트가 켜 있는 자동차로 돌아갔다. 잠시 후,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고, 자동차의 엔진음이 멀어졌다. 그러자, 어둠과 달빛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K는 여전히 공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두 시간 전 전화를 걸어와 화를 내다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던 아내를 떠올리며, 전화를 한 번 해보나 어쩌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내일도 슬럼프가 오겠지만, 나는 기자이고 펜을 놓기까지 기자이다 라고 터무니없는 논리로 어금니를 깨무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