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의 대부 홍남순 변호사가 지난 14일 향년 93세로 영면했다. 광주와 전남 지방을 주요 활동무대로 삼아 민주화운동을 주도했으며,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영어의 몸이 된 젊은이들을 무료로 변론하면서 그 활동을 전국으로 확대한 고인은 태풍이 불어와도 꺾이지 않은 거목이요 대인이었다. 고인은 1913년 전남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벽촌에서 태어나 능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일본 아카마야상공학교를 졸업한 뒤 돌아와 48년 2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한국전쟁 뒤 광주지법·광주고법·대전지법 등의 판사로서 활동했지만 1963년 사직하고 광주시 동구 궁동 자택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면서 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했다.
홍 변호사는 1960~70년대에 한-일 회담 반대, 3선 개헌 반대, 유신헌법 개정 등 반독재 투쟁에 몸을 던지는 한편 3·1 구국선언, 전남대 교육지표 선언 등 60여 건의 시국사건을 주도한 양심수들을 무료로 변론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는 5월26일 수습위원 16명과 함께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저지하려는 ‘죽음의 행진’에 나섰다가 내란수괴 혐의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년7개월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그는 “어둠의 시대에는 법보다는 양심이 앞선다”는 소신처럼 어둠을 밝히는 양심의 횃불로 일관했다.
그러나 고인은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유지했던 김대중씨가 야권을 분열하면서 대통령에 출마하여 실패한 시점에 그와 소원해지면서 자택을 찾는 사람들이 뜸해지면서 외로운 입장이 되었으며, 2001년 11월에는 뇌출혈로 쓰러진 뒤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전남대병원 등을 전전하며 5년간 투병하는 등 말년에 고통을 받기도 했다.
90여 년이라는 긴 생애를 살면서 단 한 번도 훼절하지 않았고, 자신의 명예와 영달을 위해 발벗고 나서지 않았으며, 인권운동의 후배들에게는 맏형이 되었고, 어두운 시절에 자신의 자택 겸 변호사 사무실을 완전히 개방하여 정의로운 사람들이 찾아와 토론의 장으로 활용하도록 했으며, 5·18 민주화운동의 보상금 수령을 거부함으로써 민주화의 대의를 돈으로 환급받으려 하지 않은 인물이 홍 변호사 말고 어디에 또 있겠는가.
우리는 고인의 이러한 발자취가 어설픈 민주화 운동 경력을 발판으로 득세하기 위해 혈안이 된 출세지향주의자들, 집권자와 코드가 맞다는 백그라운드를 이용해 자기와 의견이 다른 지난날의 동료들을 모조리 ‘수구 꼴통’으로 매도하는 경거망동자들, 말과 행동이 다른 표리부동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함을 안다. 고인이여, 저 세상에서도 고고하고 아름답게 지내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