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4 (수)

  • 구름많음동두천 2.2℃
  • 흐림강릉 2.9℃
  • 구름많음서울 5.3℃
  • 맑음대전 5.6℃
  • 흐림대구 6.3℃
  • 맑음울산 5.1℃
  • 맑음광주 8.0℃
  • 맑음부산 6.1℃
  • 맑음고창 4.4℃
  • 흐림제주 10.1℃
  • 흐림강화 3.2℃
  • 구름많음보은 5.9℃
  • 맑음금산 5.9℃
  • 구름많음강진군 7.4℃
  • 흐림경주시 5.5℃
  • 맑음거제 5.7℃
기상청 제공

<19> 흰 참나무 숲

최 창 남 글

 

구름이 지난다. 구름이 내 곁을 지난다. 아무도 지난 것 같지 않던 깊은 가을의 숲길에 구름이 머문다. 나무도 풀도 나도 모두 구름 가운데 있다. 숲은 그대로 하늘이 되었다. 나무도 풀도 바람에 날리던 나뭇잎들도 나도 모두 하늘의 한가운데 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숲길도 그대로 맑고 깊기만 하던 하늘길이 되었다. 그러나 길도 보이지 않는다. 가만히 서서 하늘을 마음에 담을 뿐이다. 흐르는 구름을 몸으로 만지며 바람을 느낄 뿐이다.
바람이 불어오는가.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을 따라 구름이 흘러간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숲길인가 했더니 하늘길이고 하늘길인가 했더니 숲길이다.
나무들이 보인다. 나뭇가지들이 보인다. 나뭇잎들이 보인다. 깊어진 가을을 따라 제각기 제 몸 안에 감추고 있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타오르는 불길처럼 붉어진 잎들도 있고 타오른 불길처럼 샛노랗게 물든 잎들도 있다. 이미 다 타버려 재가 된 듯 갈색의 옷을 입은 잎들도 있다. 그 뿐인가. 아직은 지난 날들을 잊지 못하여 푸르름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잎들도 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모두들 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리라. 모두들 제 모습을 잃고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어찌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으랴. 그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으며 숲길을 걷는다. 걸음을 옮긴다. 멀리 새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새일까. 무슨 새가 저리도 아름답게 노래할까. 나는 언제나 새소리를 구별할 수 있을까. 아는 것이 너무나 없다.
새 소리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내 앞에 사슴이 나타났다. 아니 내 앞에 사슴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슴 앞에 내가 나타난 것이다. 새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내가 사슴을 보지 못한 것이다. 사슴은 제 집에 들어온 낯선 이를 그 맑고 순한 눈으로 바라본다. 뿔이 근사하게 달린 참으로 잘 생긴 놈이다. 어쩌면 저리도 순하게 생겼을까. 커다란 눈에서 금방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다. 순하고 선한 기운이 온 몸에 가득하다. 낯선 이라도 그다지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은 탓일까. 사슴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저녁 어스름에 나온 저녁 산책을 끝내고 들어가려는 듯 자연스럽다. 사슴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다시 걸음을 옮긴다. 바쁠 것도 없는 가을 산길을 마음 따라 걷는다.
새로운 길로 접어든다. 가문비나무,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자작나무, 회색자작나무 등이 질세라 서로를 다투며 서있다. 저마다 몸을 한껏 내민 모습이 깊은 산길을 지나는 낯선 이들에게라도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마음이라도 나누고 싶은가 보다.
외롭겠지. 저들도 외로우니 그렇겠지. 저들도 사람들처럼 외롭겠지.
깊은 가을 산 속에 있거나 산 아래 세상에 있거나 외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산 아래서도 살아가는 일이 외로운 법인데 어찌 깊은 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외롭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나 같은 낯선 이에게라도 제 마음을 주려는 듯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리라. 나뭇잎 흔들며 어서 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숲길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간다. 흰 참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다. 흰 참나무 숲이다. 장하다. 참으로 장한 모습이다. 키가 20~30미터는 되어 보이는 흰 참나무들이 숲을 가득 메우고 있다. 걸음을 멈춘다. 도토리들이 숲길마다 가득하다. 가을 숲길에 내려앉은 나뭇잎만큼이나 가득하다. 그런 때문일까. 흰 참나무 숲의 다람쥐들은 한결 여유로운 듯하다. 숲길을 지나는 낯선 이의 발걸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흰 참나무 숲에 선다.
100살은 넘었으리라. 아니, 최소한 200살은 넘었으리라. 300살이 넘은 것들도 있으리라.
그 모습이 참으로 의연하다. 고고하다. 홀로 제 삶을 살아가고 있으나 조금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흰 참나무들에 둘러싸여 흰 참나무들을 바라본다. 흰 참나무가 된 듯 선다. 그렇게 선다.
그래, 흰 참나무처럼 살아가는 것도 좋으리라.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좋으리라.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눈을 뜬다. 아무도 없다. 바람만이 흰 참나무들 사이를 지날 뿐이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다. 깊은 가을 숲이 만들어내는 많은 소리들 중 하나였으리라.
흰 참나무에 기대어 앉는다.
저녁 어스름이 조금씩 깊어진다. 그래서인가. 조금씩 어두워져서인가.
내가 흰 참나무에 기대어 앉은 것인지 흰 참나무가 내게 기댄 것인지 알 수 없어진다.
내 무릎 위로 다람쥐 한 마리 지나간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