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을 나오는데 장님 한 분이 길을 물었다. 친절한 수위가 길을 설명하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직접 모시고 갔다. 어머니는 장애인 중에서 장님이 제일 안됐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곤 했다. 우리가 외부세계와 소통하는 통로는 소위 오감(五感)이라고 하는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이상 다섯 가지이다. 어머니 말씀은 그 중 시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리라. 사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시각에 의지하고 있는 바는 엄청나다. 그러나 망막에 비친 사물은 과연 진실인가? 우리의 시각은 믿을 만한가?
바야흐로 영상(비주얼) 시대이다. 19세기 이후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로서 영상매체가 다른 매체보다 훨씬 발달했다. 아울러 거대해진 세계로부터 엄청난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판에 일일이 활자를 읽거나 얘기로 듣는 것보다 영상으로 전달하고 습득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 되었다. 라디오 중계로 운동경기를 듣던 시절, 신동파 선수가 농구에서 얼마나 골을 잘 넣는지 우리는 아나운서의 쉰 목소리를 듣고 애타게 추측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승엽의 홈런을 즉석에서 두 눈으로 확인하고 감동한다. 이제 상품의 우수성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단 몇 초의 영상으로 눈앞에 증명해 보인다. 비참한 상황을 구구절절 나열하는 것보다 사진 한 장이 훨씬 강렬한 효과를 미치기도 한다. 영상시대에 이르러 머릿속에 스스로 이미지를 그려야 하는 활자문화가 서서히 밀려나고 아예 이미지 자체를 전달하는 영상이 외부세계와 소통하는 우리의 방식을 지배하고 있다.
영상이 생활방식까지 지배
더 나아가 요즘은 사람을 평가할 때 얼굴의 생김새를 평가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예쁘다, 잘 생겼다 같은 평가를 예전보다 훨씬 더 스스럼 없이(!)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결정짓는 가장 큰 매체가 텔레비전 드라마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배우를 섭외하는 단 하나 기준은 이미지, 곧 인상이다. 하지만 이 기준을 보면 하나같이 상투적이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부자, 가난한 자, 강한 사람, 약한 사람 등등. 우리는 모두 이 기준에 이미 세뇌되어 있어 굳이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미지·인상의 기준을 우리 현실과 대비시켜보면 얼마나 그릇된 편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예쁜 외모의 여자는 모두 착한가? 드라마에서 그런 여자들은 또 박해를 받는다. 예쁜 외모에 대한 우리의 호감은 더욱 자극받고 편견은 확고해진다. 사실 예쁜 외모가 행복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옛날에 어느 대기업 회장은 사원을 채용할 때 관상쟁이를 대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본 관상하고 오늘날 유행처럼 되어버린 인상은 다르길 바란다.
검찰청 입구에서 양팔을 옆에 끼우고 사진 찍히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인상이 아주 좋다.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배우 섭외 기준이 사실과 정반대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모든 경우에 적용시킬 수 없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기준은 전반적인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쳐 아주 중요한 선거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사실인가?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사진도 거짓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바 있다. 그는 나치 정권이 사진 자체를 하나도 조작하지 않고 사실을 왜곡할 수 있음을 사진마다 간단한 언급을 달아 고발한 바 있다.
시각 자극에 마음의 눈 마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자기의 운명을 보지 못하다가 장님이 된 다음 자기의 존재를 알아본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리어가 미친 후에야 제대로 인간다운 말을 하듯이 글로스터 역시 장님이 된 후에야 누가 충실한 아들인지 알아본다. 독일의 극작가 하이너 뮐러는 희곡 “사중주”에서 “장님의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사랑이다”고 외쳤다. 어두운 밤 사랑을 나누는 데 시각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어린 왕자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다만 껍질에 불과할 뿐,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진실을 아는 자’(예언자)는 항상 장님으로 나타난다.
정말이지 역설적으로 눈이 우리를 세상에 대해 눈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시각적 자극으로 인해 우리의 다른 눈, 마음의 눈이 마비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오이디푸스는 그것을 통찰하고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른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