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8년, 재위 22년째를 맞은 정조가 농업을 권장한다는 뜻에서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綸音.임금의 말씀)을 발표하자 당시 영평현령 박제가(朴齊家.1750-1805)는 이런 말이 담긴 글을 올린다.
"이제 (성상께서) 농업을 장려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농업에 해가 되는 것을 제거하시고 그 다음에 다른 조치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유생을 도태시켜야 합니다."
주자 성리학 절대 이데올로기 사회에서 박제가는 실로 담대하게도 그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생 도태를 제안하고 있다.
혁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런 담대한 제안을 내놓은 이유는 유생입네 행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본업인 농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 한 번 치르는데 시험장에 모인 자가 10만명이나 된다고 묘사한다. 물론 10만명 운운은 과장일 터이지만 박제가는 "이 무리들(유생집단)이 나라 인구 절반을 차지한 지가 현재 100년이나 된다"면서 유생을 도태시켜 농사를 짓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박제가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서출이었다. 서출은 출세가 지극해 제한됐었지만 정조를 만나 같은 서자 출신들인 이덕무.유득공 등과 함께 정조에게 발탁돼 관직에 진출했다.
어떻든 박제가가 이 때 정조에게 올린 글을 '진소본 북학의'(進疏本 北學議)라고 하는데 박제가라는 이름을 조선사에 우뚝하게 자리매김케 한 「북학의」(北學議)의 축쇄판이다.
'북학의'란 북쪽 학문을 배우자는 뜻으로 「맹자」에서 따온 제목인데 여기서 북학은 당시 많은 조선사대부가 '되놈'이라고 비난한 청나라와 그 문물이다.
당시 조선지배층의 만주족 청에 대한 시각이 어떠했는지는 연암 박지원이 「북학의」에 기고한 다음과 같은 서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잘못을 깨달아 제대로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중국을 제쳐두고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나 저들(조선 사대부)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중국을 통치하는 자는 오랑캐다. 그들에게 학문을 배운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렇게 말하며 중국의 떳떳한 옛날 제도까지 싸잡아서 천시하여 오랑캐의 것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이런 시대 조류에서 사신으로 중국을 네 번이나 다녀온 박제가는 "이용(利用)과 후생(厚生) 중 하나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위로 바른 덕(正德)을 해치는 폐단을 낳는다"는 슬로건 아래 청나라 문물에 대한 과감한 도입을 주장하고 나섰다.
18세기 후반 조선을 옥죄고 있던 사회병리를 치유하기 위해 박제가는 상업과 유통을 중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수레와 배.벽돌의 이용, 도로망 확충, 기술과 기계 도입 강조, 도량형 표준화, 사회 개방 등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꿈은 그 후견인인 정조가 급서하면서 허망하게 무너졌고 박제가 또한 옥사에 연루돼 유배생활까지 하는 곤욕을 치른 뒤 죽었다.
영남대 한문교육과 안대회 교수가 정밀하게 완역한 「북학의」(돌베개刊)는 '조선의 근대를 꿈꾼 혁명가의 개혁개방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기존 다른 번역의 성과를 섭렵하는 한편 오류를 바로잡았다. 304쪽. 1만2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