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우리의 화두는 단연 ‘소통’이었다. 그렇게 소통이 강조돼 오면서도 여전히 그 소통의 대상들은 불통의 그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소통에 대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소통은 소수의 지식층 또는 전문 학자들의 것이 아니다. 아랫것, 윗것을 막론하고 서로 통하였느냐 하는 그야말로 소통의 문제다. 따라서 워낙 벽창호로 막혀있는 우리사회에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오히려 갈등이 증폭되고 반목이 창궐하고 불신만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소통이란 단어가 우리사회에 핵심단어로 자리잡게 된 것 자체가 현재의 우리사회가 동맥경화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얘기도 될 수 있다. 소통의 기본은 뭐니 뭐니 해도 서로를 인정하는 ‘상대에 대한 배려’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대화도 통할 수가 없고 그 어떤 믿음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는 한 겉치레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다. 오직 자신에 대한 이해관계를 앞세우다 보니 그야말로 맞닿을 수 있는 길이 없다. 자신의 마음은 닫아 놓고 상대의 솔직한 마음을 요구하는 것으로는 소통의 창구를 열 수 없다. 또 솔직하다고 해서 상대의 상처를 건드리거나 그 솔직함으로 인해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것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소통은 쌍방향이 돼야 한다. 상대의 목소리를 경험하고 진솔하게 수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대화의 창구는 열리게 될 것이다.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행간에는 이러한 쌍방향 소통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민의 투표로 당선이 되고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서 정책을 만들었다 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는 될 일이 없다. 그 안에 녹아있는 국민적 정서에 부합하는 반응을 읽을 줄 알아야 하며 그 후에 성과여부를 측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과는 다른 말이지만 그보다 더 위력적인 무관심이란 말이 있다. 무관심은 상대를 무시하고 상처를 주는 가장 잔인한 방법이다. 칼로 낸 상처보다 말로 낸 상처가 더 아프고, 말로써 생긴 상처보다 더 아픈 것이 무관심의 상처라고 했다. 소통을 잊은 불통의 시간이 오래가면 그 다음 단계는 무관심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무관심은 모든 사회적 현상에 대한 등 돌림이다. 가·부를 따지지 않고 아예 차가운 냉소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됐건 경제가 됐건 아예 관심이 없으니, 등이 터지고 머리가 깨지던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무서운 무반응인 것이다. 여기까지 이른 사회는 그야말로 병든 사회, 죽은 사회가 된다. 소통에서 무관심까지 이르는 사회적 현상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