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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단상] 고향 단상 (斷想)

김기한 교촌F&B(주) 부회장/전 방송인

 

좀 유식한 난센스 퀴즈가 있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어느 쪽으로 둘까?

동·서·남·북이 아니다. 정답은 고향 쪽으로...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응용한 것이다. 짐승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고향을 향하는 마음은 끝이 없다. 계절 좋은 봄, 가을. 한번 우이동에 가 보시라. 여기저기 한 무더기씩 모여 자기네 진한 고향 사투리로 “아재요! 선배님! 족장(族長)어른!” 하면서 떠들썩하게 정을 나누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내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安東)이다. 중앙선 종착지인 청량리역 앞엔 안동이란 지명을 붙인 상호가 많이 있다. 안동식당, 안동이발소, 하다못해 안동이란 지명(地名)을 붙인 점집도 있다. 이런 상호를 보면 우선 마음이 푸근해진다.

도대체 고향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대통령 다음의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의 회고록에 여러 직함중 가장 영광스러운 게 향우회장(鄕友會長)과 종친회장(宗親會長)이라고 했다. 하기야 도덕적, 경제적, 사회적 존경없이 언감생심(焉敢生心) 넘겨 볼 자리가 아니다.

안동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풍산(豊山·하회)이란 곳을 자랑스러워한다. 국가의 운명을 미리 예측하고 지금껏 부국강병의 교과서인 ‘징비록(懲毖錄)’을 쓰신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 선생의 안태(安胎) 고향이시다. ‘별신굿’으로도 유명한데, 소위 상놈들이 양반을 놀리는 우스개로 구성된 놀이를 신분구별 없이 한자리에서 함께 웃으면서 보았다고 하니 신분은 달라도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 아량(雅量)깊은 인간적인 마을로도 표현될 수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유홍준 著)’에 나오는 이야기다. 안동 풍산 사람들이 전라도 지방의 호남평야에 갔더란다. 비옥함과 광대함에 깜짝 놀랐지만 기죽기 싫어 “풍산 뜰보다 조금 넓구먼.” 이것도 남을 인정하지 않고 매사 우월적(優越的) 지위(地位)를 누리는데 익숙한 건 아닌지? 그래서 요즘 의식있는 안동 사람은 양반이란 표현을 가급적 피하고 선비란 말을 즐겨 사용한다.

안동 출신 기업은 별로 우뚝한 게 없다. 그래서 안동 사람들은 ‘풍산’이란 기업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몇 년 전 주식회사 풍산 회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회장실이 서너평 남짓, 참으로 소박했다. 아무런 치장(治粧)도 없이 응접용 의자만 달랑 몇 개. 참으로 검소했다.

재계에서 골고루 존경을 받던 선대회장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수성(守成)이 창업(創業)보다 훨씬 힘들다던데... 아직도 건물이 셋방살이란다. 그보다 순위가 훨씬 처지는 회사들도 높은 빌딩을 세워 위세(威勢)를 하고 있는데... 외화내빈이 아닌 외빈내화(外貧內華)!

또 세월이 흘러 간간히 풍산 소식을 듣는다. 풍산 장학재단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에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바쁜 방한(訪韓) 일정 속에 짬을 내어 방문해 강연을 하고 기념식수도 하고... 하고 많은 곳을 제쳐두고 왜 시골의 사립학교를 이 처럼 배려했을까? 회장과 개인적인 인연 때문이란다. 두터운 신뢰 없이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몇일 전 풍산의 안강공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솔직히 꽃동네를 방문하는 것과는 좀 다른 감정이었다. 폭탄과 총알을 만드는 곳인줄 알았는데 첨단항공 우주분야까지 도전하고 있었다.

부회장께서 직접 안내에 나섰다. 평소 존경하는 분이다. 자투리 시간이 남아 “젊은 회장을 모시느라 힘들지 않습니까?”하고 이런 질문을 드렸더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만 “재벌의 가장 큰 덕목은 바로 겸손과 절약입니다”. 아마 회장의 그런 매력 때문에 세월을 잊고 일선에서 활약하는지 모른다.

노장청(老壯靑)의 조화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했는데, 나이 많은 분의 경험을 간섭으로 생각하지 않고 또 말끝마다 “우리 회장께서는...”. 하여간 기업의 가장 큰 덕목도 인화(人和)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휴일 공식행사는 하루를 손해보는 듯 해서 매우 억울한데, 벌써 과거가 돼 버린 지난주 토요일은 매우 즐거운 고향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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