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은 정신적 마비상태에 있는 우리로 하여금 하루 아침에 주의사상과 이해관계가 양극으로 상반된 민주, 공산 양 진영의 대립과 모순이 자아내는 강한 폭풍의 세례를 받게 하였다. 온겨례가 하나로 뭉쳐 통일된 조국의 독립을 이루어야 할 우리는 홍수와 같이 밀려든 외세의 사상과 문화에 휩쓸려 주체를 차릴 수 없이 되었고, 좌우로 사분오열되는 비극을 막아낼 수 없었다.(중략) 싸우는 적이 주장하는 주의사상과 문화라 하여 그 나쁜 면만을 확대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요, 자기 편이 신봉하는 주의사상이나 국정 현실이라 하여 과장망대(誇長妄大)하여 내세울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라도 장점은 취하며, 자기 것이라도 허물은 버리고 고쳐 올바른 길을 택하는 것이 승리하는 요체가 될 것이다.”(하략)
인용이 길어졌지만 위 글은 1951년 9월에 첫 선을 보였던 ‘사상(思想)’의 창간사 일부이다. ‘사상’은 부산 피난 시절 장준하가 기획해 창간했던 잡지로, 1953년 4월 창간된 ‘사상계(思想界)’와는 다른 잡지다.
그러나 광복군 시절 ‘등불’, ‘제단’ 등을 발간했던 장준하가 간여한 만큼 이 잡지를 ‘사상계’의 시작품(試作品)으로 봐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발행인 이승교 명의의 창간사는 당시 ‘사상’지 편집을 담당했던 서영훈 씨(대한적십자사 총재 역임)가 쓴 것이었다. 이같은 대필 사실은 서영훈 씨가 그의 ‘도원일기(道原日記)’에서 밝힌 것인데 장준하가 마감을 앞두고 어느날 급히 쓰라고 해서 힘겨운 작업을 했노라고 회고하고 있다.
대필은 고대부터 있어 왔다. 최고 권력자의 구술(口述)을 받아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발언자의 의중을 헤아려 대변하는 것이 상례이다. 오늘날에는 청와대, 내각, 그룹 총수 밑에 대변인과 대필가가 있다. 하나는 입, 하나는 붓으로 보좌하는데 대필가는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흠이다. 하지만 자신을 내세우는 일없이 묵묵히 글을 써주는 대필가가 있기에 세상에는 희망과 기대가 공존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