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뇌물 등 8가지 주요 범죄 사건 피고인들의 선고 형량 범위를 제시한 양형 기준이 처음으로 마련됐다. 이에 따라 같은 유형의 범죄 사건에서 법관에 따른 선고 형량 편차에서 비롯된 ‘고무줄 판결’이나 ‘유전무죄’ 논란이 상당부분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 기준이 도입되면 범행동기와 성장 과정, 재산 상태 등 각종 양형 인자의 자료를 수집해 재판부에 제출하는 양형조사관제 도입이 불가피해 지면서 일선 변호사들은 피고인에게 불필요한 조사 부담 등을 우려하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 양형기준 마련=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달 24일 사법 불신의 원인으로 지적되는 법관별 양형 편차 논란을 없애기 위해 8가지 주요 범죄의 양형기준을 확정했다.
양형위는 또 확정된 양형 기준을 올 하반기 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이번에 양형 기준이 마련된 대상 범죄는 살인, 뇌물죄 외에 성범죄, 강도, 횡령, 배임, 위증, 무고죄다.
양형위는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로 제시한 양형기준을 통해 범죄별 특성에 따른 사건 유형을 분류한 뒤 유형별로 세분화한 형량 범위를 제시했다.
또 양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의 경중에 따라 특별·일반 및 가중·감형 양형인자로 구분해 형량을 결정할 때 고려하도록 했다.
양형위는 특히 뇌물이나 성범죄의 경우 엄중한 처벌이 이뤄질 수있도록 형량 범위를 일률적으로 높이고, 횡령 배임죄에 대해서는 형평성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더 엄격한 통일 기준을 제시했다.
◇양형기준 어떤 내용 담았나=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2년여간의 연구 작업을 거쳐 확정한 양형기준은 8개 주요 범죄를 유형별로 나눈 뒤 각각의 형량을 제시한 것이 특징이다. 또 법관이 형량을 산정할 때 고려해야할 재범 여부나 가담 정도, 범행 동기 같은 양형인자를 선정해 경중과 성격에 탄력적으로 적용하도록 했다.
살인죄는 범행동기에 따라 3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제1유형은 장기간 지속적으로 피해를 당하다가 범행한 경우로 범행동기의 정상이 참작될때 적용된다. 기본 형량은 4~6년으로 정해졌다.
제2유형은 보통 살인으로 기본 형량이 8~11년이고, 제3유형은 묻지마 살인이나 청부살인과 같이 특별히 비난할 사유가 있는 경우로 기본 형량이 10~13년에 맞춰졌다. 뇌물은 수수 액수에 따라 1천만원미만, 1천만~3천만원, 3천만~5천만원, 5천만~1억원, 1억~5억원, 5억원 이상 6개 유형으로 나눴다.
성범죄는 피해자 연령과 범죄 수범 등을 기준으로 개별 양형기준을 마련했고, 강도는 상해 또는 사망의 결과가 발생한 경우와 상습·누범강도 범죄에 대해 별도의 양형기준을 제시했다. 특히 유전무죄 논란을 불신시키기 위해 횡령 배임에 대한 양형기준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렸다. 또 위증 범죄를 위반위증과 모해위증(꾀를 써서 다른 사람을 해칠 목적으로 하는 허위진술)으로 구분했다.
◇통일된 양형기준 이렇게 적용된다= 정부부처 과장이 업무청탁 명목으로 7천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면 수수액수가 5천만원~1억원이어서 뇌물 제4유형에 해당한다.
특별한 가중·감경 요소가 없기 때문에 기본 형량의 적용을 받아 5~7년을 선고받게 된다.
성범죄의 경우 만약 피고인이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12세 여학생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술을 먹이고 성폭행했다면 제3유형에 해당해 5~7년을 선고받는다.
또 술에 취한 피고인이 심야에 식당에 침입, 자는 식당 여주인을 성폭행한 경우 주거침입 등 강간에 해당돼 제2유형으로 징역 4~6년을 선고받게 된다.
강도의 경우 새벽 3시 20대 초반의 여성 피해자를 흉기로 위협한 뒤 휴대전화와 가방 등 70만원 상당의 물품을 훔치고 전치 3주 상당의 상해를 입힌 경우에는 특수강도 유형에 해당해 기본 형량이 4~7년이다.
그러나 서로 합의 했다면 징역 3~6년으로 형량이 감경될 수있다.
반면 심야에 여성이 혼자 있는 약국이나 미용실 등에 침입해 흉기로 위협한 뒤 6차례에 걸쳐 강도 행각을 벌인 사건은 형량이 8~12년에 달한다. 기본 형량은 6~10년 이지만 범행 횟수가 5차례 이상이어서 형량이 가중되는 것이다.
◇양형 조사관제 도입 불만= 양형기준이 도입되면 범행 동기와 성장과정, 재산 상태 등 각종 양형 인자의 자료를 수집해 재판부에 제출하는 양형조사관제 도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일선 변호사들은 양형조사관제가 도입되면 현행 형사소송 구조하에서는 불필요할 뿐아니라 피고인에게 불필요한 조사 절차를 부담시키고 신속한 재판을 저해한다며 이 제도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양형조사관은 양형기준제가 시행되면 범행 동기와 성장과정, 재산상태 등 각종 양형인자의 자료를 수집해 재판부에 제출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는 전문가다.
수원의 한 변호사는 “기소이후 또다시 법원 소속 직원에게 양형 관련 조사를 받게하는 것은 피고인에게 육체적, 심리적 부담을 줄 것이 뻔한 일이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다른 변호사도 “굳이 제도를 도입한다면 양형 조사관을 법무부 소속으로 둬 양형기준의 적용실태를 지속적으로 파악 분석해 양형기준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있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