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대공황 시절, 미국인들에게 무한한 희망을 전해준 말이 있다. 그 말의 이름은 ‘시비스킷’(Seabiscuit).
1933년 5월23일 모마 ‘스윙 온’과 20세기 최고의 명마인 ‘맨 오워’의 자마 ‘하드 택’ 사이에서 태어난 적갈색 숫말인 ‘시비스킷’은 망아지 시절엔 작은 몸집과 경주에 적합치 않은 체형에다 게을러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36년 찰스 하워드에게 8천 달러에 팔렸고 이후 톰 스미스 조교사와 레드 폴라드 기수를 만나게 된다.
자전거포 주인인 마주와 마주들에게 외면당한 조교사, 경제공황으로 실업자 신세였던 기수, 폐마 직전인 경주마는 누가 봐도 환상의 콤비는 아니지만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어 갔다.
그 해 시즌 마지막 8개 대회 중 2개 대회를 휩쓸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1937년 15회 출전, 11회를 우승해 미국에서 최고 상금을 기록한 말로 등극, 매번 뉴스에 올랐다.
그의 경주가 열리는 날이면 특별열차가 마련될 정도로 ‘시비스킷’은 대단한 스타였다.
그러나 이듬해 폴라드 기수가 사고를 당한 뒤 조지 울프 기수에게 맡겨지면서 하향곡선을 그리던 때 언론은 당시 최고의 경주마였던 ‘워 애드머러’와 ‘시비스킷’의 대결을 부추겼고 결국 1938년 11월1일, 운명적인 일전이 벌어졌다.
핌리코 경마장 관중석이 발 디딜 틈 없는 가운데 치러질 1천900m 경주의 예측은 ‘워 애드머러’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그러나 승부는 4마신 차로 이긴 ‘시비스킷’ 몫이 됐고 ‘시비스킷’은 그해 ‘올해의 명마’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다.
1939년 인대 부상을 입은 ‘시비스킷’과 다시 재기한 폴라드는 세 번째 컴백을 통해 경마팬들을 다시 감동시켰다. ‘시비스킷’이 세운 13개 경주 거리별 신기록 중 2개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108마리의 새끼를 낳은 그는 죽은 후에도 미국의 ‘희망의 아이콘’으로 남아 소설과 영화로 다시 되살아나 어려움에 처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