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서거한 노무현(盧武鉉·63)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씨(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씨(李順禮) 사이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의 형제자매로는 큰형 영현씨(英鉉)와 둘째형 건평씨(建平·구속), 누나 명자(明子)씨, 여동생 영옥씨(英玉)가 있다. 그의 두 형은 1967·1968년 각각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세무공무원이 됐다.
어릴 적부터 학업에 두각을 나타낼 정도로 비상한 두뇌를 지녔지만 김해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그는 진학의 꿈을 일찌감치 접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1968년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당시 강원도 원주에 있는 육군 1군사령부에서 부관부 행정병으로 복무·만기제대한 노 전 대통령은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부인 권양숙 여사와 1973년 결혼해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를 낳았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 세상에 큰 뜻을 펼치고픈 야망은 고교 졸업 후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를 법조인의 길로 이끌었다.
수차례의 고배를 마신 끝에 1975년 나이 서른에 유일한 고졸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 판사의 길을 걷다 “적성에 맞지 않아” 7개월 만에 그만두고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잠시 안락한 삶을 살던 그는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혐의로 대학생 20여명을 기소해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으로 알려진 부림사건(釜林事件) 변론은 노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학생, 노동자 등이 연루된 각종 인권사건에 뛰어들어 점차 인권변호사로 인식된 노 전 대통령은 소외받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편에 서서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사건에 연루돼 제3자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기에 이른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부산에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측의 권유로통일 출마해 5공 실세였던 허삼수 후보를 꺾고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초선의원 시절인 1989년 국회 5공청문회에서는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져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으나 90년 1월 3당 합당 때 김영삼 총재의 손을 뿌리치고 합류를 거부한 뒤 14대 총선(1992년), 부산광역시장 선거(1995년), 15대 총선(1996년)에서 지역주의의 벽에 막혀 낙선을 거듭하는 등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이어 1998년 서울 종로 재보선에서 국회 재입성에 성공했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종로가 아닌 부산에 다시 출마해 패배했으나 당시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안락한 지역구를 버리고 대의를 좇아 ‘바보 노무현’의 애칭을 얻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노 전 대통령은 2000~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민주화 세력을 기반으로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노풍’을 일으켰다.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이변 등 호남에서 시작된 ‘노풍’은 ‘이인제 대세론’을 함몰시켰고, 전라도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경상도 출신 후보로 나서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당시 투표 하루 전날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일방적인 지지철회로 후보 단일화는 깨졌지만 당시 ‘노사모’ 등 팬클럽의 지지를 얻어 화제가 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순탄치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판사출신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한 뒤 검찰의 불만을 받자 검사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평검사와의 대화를 마련했지만 오히려 불신이 깊어졌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은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16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04년 3월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14일까지 63일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지만, 메가톤급 역풍을 불렀고, 결국 제3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의회 독주에 제동을 걸며 과반을 차지하는 제2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재임기간 중에도 최고의 뉴스메이커였지만 퇴임 후 불거진 박연차 뇌물 게이트는 노 전 대통령의 대표적 자산이었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히며 굴곡의 나락으로 몰고 갔다.
인생행로를 함께 걸은 진보진영 정치인들과 젊은 386들, 특히 인생의 버팀목이었던 친형 건평씨와 부인 권양숙씨, 아들 건호씨마저 수뢰 혐의로 검찰에 줄줄이 소환되는 불명예를 남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받아 피의자 신분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출석했다.
이후 조만간 검찰의 재소환을 앞두고 23일 오전 6시50분경 경남 김해 봉하마을 사저가 내려다 보이는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해 서거하면서 63년 영욕의 세월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