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을 전공한 K교수와 가까이 지냈다. 훤칠한 키에 인물 훤하고 성격마저 털털해서 주위에 항상 사람이 모였다.
예술하는 양반들 가운데 평소엔 그냥 그런데 개성이 강한 탓인지 가끔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괴팍스런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꽤 오랫동안 교제를 했음에도 K교수는 그런 부분이 전혀 없는 둥글둥글한 분이다. 제자들에게도 자상(仔詳)해서 아주 인기가 높았다.
스스로 인격수양을 했든지 세월에, 아니면 환경에 마모(磨耗)되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원만한 분이다.
특히 소주잔을 걸치다 노래방에라도 가면 해바라기가 부른 ‘사랑이여’를 얼마나 열창(熱唱)하는지. 주위에서 딱 한곡만 부탁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하면서 마이크를 잡고... 또 앙코르를 하면 받아 준다.
의사(醫師)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네들만 아는 전문 용어를 써서 자기 직업을 은연중에 표시 내지는 과시(誇示)하려는 사람도 많고 또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구속(拘束)이니,수감(收監)이니 하면서 자기 직업 이야기 위주로 화제를 끌고 가서 결과적으로 주위 사람들을 겁나게 한다. 어찌됐든 소위 사(士)자 돌림의 사람들에게 이런 현상이 두르러지는데... K교수는 그렇지 않아서 더욱 돋보였다.
그가 일 년 남짓 교환 교수로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하다 귀국했는데, 환영 자리에서 모두 아연(啞然)해졌다.
안구(眼球)가 안경에 붙어 있는 것 아닌가. 본인이야 태연한 척 했지만 남의 말에 곧 잘 수긍도 하고 또 모르는 게 있으면 질문을 던지고 어느 모임에 가더라도 적당히 모임의 중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위치에 있었는데...
그날 분명 자기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외자(局外者)였다. 웃음도 억지로 웃는 것 같고 가급적 그 자리를 빨리 마치고 싶은 표정이 역력했다.
무겁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성악을 하는 사람들은 고음(高音)을 내기 때문에 어깨에 근육이 뭉쳐 있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풀어 줘야 하는데 안마로 풉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탈리아 안마사가 힘을 줘 시신경을 다쳤습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 우연찮게 사람의 운명을 갈라 버렸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우리가 평소 신체의 하찮은 곳에 더욱 신경을 쏟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여름 휴가철이 되면 자동차 점검을 하고 떠나라고 각종 매스컴에서 주의를 줍니다. 타이어 공기압과 브레이크 등을 필수적으로 점검하라고 하지만, 자동차 와이퍼의 경우 어느 누구든지 관심을 가지라고 충고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비 오는 날 자동차 와이퍼가 고장 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을 못합니다. 만약 이 충고를 무시했다가는 큰 일 납니다. 제가 그런 경우입니다.”
참 이치에 와 닿는 충고였다. 이구동성으로 위로를 했다. 곧 회복이 될 것이라고. 그러나 건성으로 듣는 것이 역력했다.
확인되지 않은 소식, 풍문(風聞)이지만 학교를 옮긴 뒤 가정도 온전치 못하고 술 때문에 실수도 많이 한단다.
더욱이 마음 아픈 건 전에 잊고 지내던 사람들을 일부러 무안(無顔)을 주기까지 해서 피한다고 한다. 솔직히 그 무안을 이길 용기가 없어 아직까지 연락을 미루고 있다.
요즘 내 스스로 눈(眼) 때문에 병원 신세를 톡톡히 지고 있다.
그처럼 K교수가 절실하게 충고를 하고 큰 변화가 없으면 그의 인생의 끝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음에도 아직도 친구와 아내의 따가운 충고를 잔소리로 듣고 짜증스러워 한다.
건강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兩)이라고 하는데, 독자 제위께서도 평소 새끼손가락에도 관심을 쏟으시길...
참고로 K교수가 애창했던 노래는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에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었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 팔자 길들이기 나름인데, 왜 하필 이런 노래 제목을 즐겨 불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