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요즘 세상은 붉은 띠 동여매고, 주먹을 불끈 쥔 채 핏대를 올리며 저주하듯 구호를 토해내는 데모로 시작해 데모로 끝나는 느낌이 든다. 용산과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사태만 하더라도 너무 오래, 너무 격렬하다 보니 섬뜩한 감정이 들고, 그만 끝낼 수는 없을까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집회와 시위를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없었던 왜정 때도 시위는 있었다. 그러나 그때 시위는 지금과 달랐다. 1919년 3·1운동 때 서울 장안은 물론 지방의 상가가 대부분 철시하고 만세운동에 동참함으로써 일제 폭정에 항거했다. 일본 경찰은 점포 문을 열 것을 강요했지만 상인들은 4월 중순까지 철시를 계속했다. 1920년 미국 의원단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도 독립당이 시장 철시를 요구하는 격문을 게시하자 상인들이 동조했다. 1926년 4월에는 순종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종로와 북촌 일대 상가가 철시했고, 순종의 인산 날인 6월10일에도 철시하고, 가무음곡을 삼가했다. 1931년 수원에서는 전국 최초의 신여(神轝)시위가 있었다. 이날 시위는 상권을 지키려는 수원 상인 중심의 ‘수원소매상연맹’과 이에 반대하는 일본인 소비자 중심의 ‘수원소비조합’ 간의 충돌로 빚어졌는데 수원소매상연맹 측은 시신을 실어 나르는 신여를 들쳐 메고 거리 행진을 벌였다. “조합을 해체하라”며 신여 시위대가 소비조합 앞에 이르렀을 때 과격한 연맹 회원이 소비조합 사무실에 돌을 던져 유리창 대여섯 장을 깨고 말았다. 경찰은 연맹 측 관계자인 일본인 와다나베(渡邊) 등 5명에게 20원씩의 벌금형을 내렸으나, 이에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1932년 2월3일 수원지방재판소는 와다나베 등 4명에게 20원씩의 벌금형, 나머지 2명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에는 조선인도 가담했었는데 처벌받은 것은 일본 상인들 뿐이었다. 밥그릇 싸움에는 동족도 별 볼일 없었다. 이 사건 이후 시위는 계속되고 있지만 신여 시위는 아직 재현된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