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 구석구석 소통의 부재가 드러나고 있다. 특히나 미디어법과 관련하여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나라 전체가 폭력의 현장에 있는 듯 한 착각이 들며 내가 순간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어버린다. 개개인 갖고 있던 주된 관심사가 사회적인 합의를 거치며 제도화 되는 과정에서 들어난 갈등이 소통(疏通)되지 못하면 첨예한 갈등사안이 되어 정치의 핵심적인 쟁점이 되어 또다시 국회에서 만난다.
소통(疏通)의 사전적 의미는 왕래(往來)와 상통(相通)이다. 막히지 않고 서로 통한다는 것, 생각하는 바가 서로 통한다는 의미이다. 무엇이 소통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일까?
소통하는 과정에는 많은 절차가 필요하다. 최소한 절차가 보장 된 것 이라면 우리는 합리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여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장된 절차마저 지켜 지지 않은 것이라면 한쪽 일방의 의견을 관철하기위한 싸움판에 지나지 않는다. 싸움도 갈등을 해결하고 조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기도 하나 이미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사회적 비용 부담이 높아지며 어떤 경우에는 이미 갈등조정을 위한 시위를 떠난 경우도 많다. 이러한 싸움판은 대체적으로 힘이나 권력을 가진 쪽의 일방적인 밀어 붙이기에게 기인하는 경우이다.
힘이나 권력을 가진 일방이 밀어 붙이기를 하면서 얻어 내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진정 국민 다수의 행복과 권리를 위해서 라면 좀 더 절차와 내용을 보완하고 소통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특히 힘과 권력을 가진 쪽에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 국민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국민은 뒷전이고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많은 국민들이 현재의 상황에 대해 충분하게 소통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민들이 생각하는 바가 정책에 반영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정책은 고사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한탄을 쏟아놓는다. 갈등고조를 나타내는 지표 중에는 크게 3단계, 작게는 9단계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크게 1단계 승자 대 승자(긴장, 논쟁, 말보다 행동), 2단계는 승자 대 패자(편짜기, 체면깎기, 위협), 3단계는 패자 대 패자(피해주기, 죽이기, 너 죽고 나죽고)로 구분하며, 작게는 1단계 긴장, 2단계 논쟁, 3단계 말 보다 행동, 4단계 편짜기, 5단계 체면깎기, 6단계 위협, 7단계 피해주기, 8단계 죽이기, 9단계 너 죽고 나죽고의 단계를 거치며 갈등은 고조 되어 파경을 맞게 된다.
갈등고조를 나타내는 단계에는 예상되는 증후들이 있다. 갈등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사회적 비용은 높아가며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에 접한 이들은 벼랑 끝에 내 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갈등의 2단계 승자 대 패자(편짜기, 체면깎기, 위협)등에 이르면 갈등 본래의 이슈와는 다른 양상을 갖게 된다. 이때가 되면 갈등은 통제를 벗어나 자체동력으로 움직인다.
갈등이 조정되는 경우를 지켜보면, 한쪽 일방의 입장에서 정리되는 결과물 보다는 절차적인 진정성이 회복되고 의미를 경청하면서 사실관계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절충점과 해결방안이 도출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를 뒤로 미루는 경우도 있다. 하물며 국민의 안녕이 달린 문제라면 좀 더 신중하고 적극적인 소통의 노력을 해야 한다.
소통의 부제가 갈등을 부추기며 통제를 벗어나면 갈등 본연의 이슈는 사라지고 새로운 갈등의 이름으로 정치적 부메랑을 맞을 수 있다. 사회의 또 다른 변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고 애써 보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출혈이 너무 크다. 이러한 시기가 온다면 생각하기도 끔찍하다.
대산 주역강의 하경에 나오는 옛 성인의 지혜를 빌려 본다. ‘지야(止也) 시지즉지(時止則止)하고 시행즉행(時行則行)하야’ 그친다는(止) 것이 말뚝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행할 때 행해야 하고 그칠 때 그쳐야 하고 나아갈 때 나아가고, 물러날 때 물러나고, 입을 다물 때 다물고, 입을 열고 말할 때는 말해야 한다. 적당하고 정중해서 시중(時中)으로 늘 중을 행하는 것이 바로 그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