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시인이면서 사학자인 노산(鷺山) 이은상 선생이 타계한지 올해로 17년째가 된다. 그가 생존에 남긴 수필 가운데 ‘한 눈 없는 어머니’라는 작품이 있다.
이 글은 한 후배 젊은이가 찾아와 담소를 나누던 끝에 호주머니에서 돌아가신 어머님 사진을 꺼내더니 선생님이 잘 아시는 아무개 화가에게 부탁해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간청을 받고 나서 답장삼아 쓴 것이다.
젊은이의 부탁은 이런 것이었다. 어머니는 일찍이 한쪽 눈을 실명해 평생 동안 힘겹게 사셨다.
그래서 이번에 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 두 눈을 다 완전하게 그려 주면 보수는 넉넉히 치루겠다는 것이다. 노산은 처음 돌아가신 어머님 사진을 내보이며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도와달라는 말에 효심이 대단하구나 싶어 감동했는데 나중에 실명된 눈을 온전하게 그려 달라는 말을 듣고 나서는 아무 말도 못했는데 그 답을 글로 옮긴 것이다. 글 내용은 이렇다.
‘그 즉석에서 나는 아무 말도 못했지만, 나의 열리지 않던 입에서 분명히 듣고 간 것이 있을 것이오, 말없던 나의 입에서 듣고 간 것이 없소? 만일 없다면, 이제라도 한 마디 들어주오. 그러니 내 말을 듣기 전에, 그대는 먼저 그대의 품속에서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오. 상하신 한쪽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자세히 보오. 눈물 가진 눈으로 보오, 김군. (중략) 그대 어머니의 상하신 눈을 업신여겨 저버린다 말이오. 그대에게 한 눈 가지신 어머니는 계셨어도 두 눈 가지신 어머니는 없소. 온 세상이 다 불구라 비웃더라도 그대에겐 그 분보다 더 고마우신 분이 또 누구이겠소? 한 눈이 아니라 두 눈이 다 없을지라도 내 어머닌 내 어머니요.
내가 다른 이의 아들이 될 수 없는 법이오. 그림으로 그려 어머니를 모시려한 착한 김군. 그런 김군이 어떻게 두 눈 가진 여인을 그려 걸고 어머니로 섬기려 했단 말이오. 그대는 지금 곧 한 눈 없는 어머니의 영원한 사랑의 품속으로 돌아가시오. 그리하여 평생 눈물 괴었던 그 상하신 눈에 다시는 더 눈물이 괴지 않도록 하오. 이만 줄이오.’ 작품 속의 김군이 어찌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