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경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레저산업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50년 동안 지속된 적자행진으로 빚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마사회는 해방 이후 재정상태 악화로 임원진이 교체되기도 하고, 60년대까지도 직원들이 집단 휴직의 공포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국민소득 수준 향상에 힘입어 마사회의 재정상황도 점차 나아졌다.
특히 1972년은 경마 역사상 처음으로 흑자를 내었던 뜻 깊은 해다.
이 해 여름 전국이 집중호우로 수해를 입었고 뚝섬 경마장도 물바다가 되어 9월 복구 개장할 때까지 경마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김동하 회장(15~16대)은 손해를 보전하기 위한 주4일 경마를 관철시켜 연간 시행일수 133일의 기록을 세우며 사상 최초로 1억4천만 원의 흑자를 달성했다.
이 해 입장인원은 26만 명이었으며 마권매출액은 35억9천만 원으로 사상 최고 금액이었다.
72년 흑자로 전환한 마사회는 그 동안 눈덩이처럼 쌓였던 부채를 계속 상환하며 재정의 건전성 확보에 주력했다.
시행일수는 74년 158일까지 늘어났으나 과열을 막기 위해 점차 하향 조정, 1976년에는 136일간 시행했다.
그 사이에도 매출은 계속 증가해 드디어 1976년 은행채무 1억4천만 원을 모두 상환했다. 마사회가 해방 이후 30년 만에 빚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처럼 마사회가 수십 년 동안 적자재정에 허덕이다 부채를 완전 상환하는 우량기업으로 ‘턴어라운드’하게 된 것은 당시의 우리나라 경제상황과도 관련이 있지만 마사회 자체적인 경영개선 노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동안 마사회는 불용 자산을 대거 매각하여 몸집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였고 입장객 유치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경마장 입장객들에게 냉장고, 세탁기, 자전거, TV 등 푸짐한 경품을 걸고 행운권 추첨행사를 자주 가졌는데 이것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1976년에는 그 해 미스코리아들이 전부 나와서 행운권 추첨을 했는데 대한민국 대표 미녀들을 구경하려는 팬들로 북새통을 이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