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는 있을 수 없지만, 당연한 권위는 인정돼야 한다. 전 직장에 근무할 때 ‘이런 인생 저런 인생’이란 프로그램을 연출한 적이 있다. ‘성공한 분들의 회고(回顧)를 들어 보면서 그들의 성공 바탕이 무엇이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은 어떤 게 있을까’를 조명한 것이다.
하여간 거창한 기획의도로 제작된 50분짜리 인물다큐 프로그램이었다. 참으로 다양한 직업을 만났다. 외교관, 장관, 대기업 회장, 장군, 정치인, 원로연예인... 아쉬운 점은 진작 이런 어른들을 만났다면 현재의 ‘나’보다는 훨씬 그럴듯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시인의 잠언집이 생각났다.
힘든 점은 시청률을 높이자면 비슷한 직업군을 지루하지 않게 배열하는 것 이었다. 이번 주가 정치인이면 다음 주는 기업인... 어려웠던 점은 이 분들은 연세가 있는지라 재미난 질문도 평범하게 답변하고 그 대신 크게 흉이 될 것 같지 않은 실수도 대충 얼버무리고...
국영기업체 가운데 비교적 소규모 공기업 사장을 인터뷰했다. 이 분은 ROTC로 임관한 뒤 육군 소장으로 퇴임했다. 정치에 뜻을 두고 국회의원에 출마해 낙선한 전력도 있다. 워낙 경력이 다양한지라 인터뷰 전에 반드시 묻는 말이 있는데 “호칭을 뭐라고 해야 좋을런지요?”
“장군이란 호칭에 애정이 갑니다”, “알겠습니다. 장군님...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아직도 정치에 미련이 있습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몸서리가 납니다. 선거 빚 다 갚자면 아직 멀었습니다.”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는데 문 입구에 있던 비서가 메모를 전하려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메모를 받자마자 황급히 옆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한 10분쯤 됐을까,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채로 나왔다.
조금전까지 아주 조리있게 답변하던 분이 완전히 동문서답(東問西答)이었다. 다음날 아침은 국회의원 공천(公薦)이 결정되는 날이었다.
감이 잡히는 게 있어 “아주 높은 분 전화인 모양이지요?” 한참 침묵하더니만 “각하 전화였습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군인의 자세로 돌아갔다.
“출마하라고 합니까?” 사실 그 분의 지역구가 경상도인데 낙선될 게 뻔했다.(당시 김대중 대통령)
“어쩌려고 합니까?”, “각하의 명령인데... 다른 방법이 없지요. 통수권자의 말씀인데요.”
손사례를 치면서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하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자세도 말투도 장군으로 돌아갔다.
결과는 낙선하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예전보다 훨씬 규모가 큰 공기업 사장으로 갔다. 이를 두고 계산된 장렬(壯烈)한 전사라고 해야 하나?
또 한 분 있다. 쓰리스타 장군, 브라질 대사를 역임한 분인데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의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에 구대장을 지냈다. 구대장이란 초등학교의 담임선생 역할이라고 한다. 전·노 전직 대통령을 빗대 “어떻게 가르쳤길래...” 하는 식의 힐난을 받을 때면 씁쓸했다고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꺼냈다. 후배들에게 신망받는 장군은 옷을 벗겨 브라질 대사로 보낸다고 했다. 국내에 두면 거추장스럽기 때문인데, 왜 브라질이냐 하면 우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신경 덜 쓰여 좋고 교민을 통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쉬워 그 쪽으로 보낸다며 월남전 영웅 채명신 장군을 예로 들면서 당신도 훌륭한 장군임을 은연중에 자랑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한 역사와 연애를 지극히 자기중심으로 풀이한다더니... 벽에 장식된 오색수술이 달린 칼에 대해 설명했다.
“저것은 삼정검(三精劍)이라고 하는데 육·해·공 3군이 일치단결하라는 뜻과 함께 호국·통일·번영의 세가지 정신을 달성하라는 뜻이 담겨있는데 검에는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必死卽生)-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충무공의 뜻이 새겨져 있습니다. 직접 각하께서 하사(下賜)하신 것 입니다.”
하사란 말 자체가 임금만이 쓸 수 있는 용어다. 개인은 별로지만 대통령직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이 담겨져 있다. 자유분망한 미군들이 성조기가 게양(揭揚)될 때의 엄숙함, 그리고 대통령 전용기(에어포스 원-공군 1호기)를 탈 때 도열한 군인들의 절도있는 자세와 경례, 장엄함마저 느낀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못할까? 대통령이 꼭 마음에 들어서일까? 당연한 권위는 인정돼야 한다. 요즘은 좀 지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