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서판(身言書判). 중국 당나라 관리 ‘전선’이 한 말이다. 물론 중국 당나라 때 지금의 공무원 임용기준을 차용(借用)한 것인데...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몸집은 위풍당당하고, 말은 힘차고 정확하고 바르며, 글씨는 아름답되 힘있고, 판단력은 빼어날 것을 요구했다. 순서만 놓고 보면 어딘가 잘못됐다.
판·서·언·신이 아닐까? 그러나 요즘 관점에서 외모를 본다는 건 기회균등(機會均等)의 원칙에 위반될 수 있다. 혹시 외모만 반듯하고 말은 감언이설(甘言利說), 친일파 이완용의 글씨도 당대엔 명필이라 했거늘... 자칫 잘못하면 크게 실수한다.
외국 정치인들의 업적은 겨우 위인전을 통해 접했기에 깊이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개인적으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1874.11.30~1965.1.24)을 무진장 좋아한다. 우선 신언서판을 기준으로 평가해 보자.
신(身)-호랑이상을 연상케 하는 호쾌한 풍모에 중절모를 비스듬히 쓰고 시거를 입에 물고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야 출중한 사내다움을 갖추고 있으니 합격점수가 아무리 높더라도 넘었으면 넘었지 모자랄 게 없다. 언(言)-의사당에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는 연설은 아직까지 웅변교범(雄辯敎範)으로 남았으니 이 역시 만점이다. 서(書)-붓글씨가 아니고 타이프를 쳤기 때문에 글재주로 대체해야 하는데 노벨문학상(1953년)을 받았으니 이 것도 합당(合當)하고, 판(判)-아무도 경계하지 않았을 때 그는 이미 히틀러의 야욕을 꿰뚫어 보고 있었으니 이 보다 판단이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처칠 수상에게 별 다섯개 최상의 평점을 줄 수 밖에 없다. 또 있다.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풀 존슨은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목을 이렇게 내세웠다. 첫째 도덕적 용기. 둘째 판단력. 셋째 우선순위에 대한 감각. 넷째 힘의 배분. 다섯째 유머를 들었다.
참으로 좋은 기준이다. 그러나 너무 까다롭다. 혹시 이 양반, 정치인에게 신(神)의 능력을 희망한 건 아닐까? 이 기준에 처칠을 대입(代入)해 보라. 특히 유머는 내가 아는 한 정치인들 가운데 최고다. 고급스러운 유머의 기반은 넓은 식견과 인생을 관조(觀照)하는 자세와 그리고 유머의 생명은 품격있는 언어에 은유적(隱喩的)이어야 한다.
모두 들은 바 있겠지만 처칠의 몇 가지 유머를 정리해 보자. 정적(政敵)들이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고 게으른 정치인이라고 흉보자, “나 처럼 예쁜 마누라 데리고 살면 자연히 늦잠을 자는 법이요.” “내가 당신 아내라면 커피에 독약을 넣겠다.”는 말에 “당신이 내 마누라이면 당장 한 숨에 마셔버리겠소.”
어느날 노동당 당수가 화장실에 들어 오자 멀리 떨어지면서 “당신은 모든 걸 국유화(國有化)하려고 하니 겁이 나서...”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알몸을 루즈벨트에게 들키자, “각하! 영국 수상은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감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당황했다면 이 장면이 얼마나 어색했을까?
정치인은 각(角)이 있어야 매력이 있다. 그리고 욕을 많이 먹어야 큰다. 처칠 만큼 당대에 욕을 많이 얻어 먹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 우리 국민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철새정치인이다.
보수당, 자유당,다시 보수당, 이런 기준에서는 처칠도 자유스러울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불리한 상황을 유머 몇 마디로 희석(稀釋)을 시키는 기술, 이것은 도량(度量)에서 나올 수 있는 능력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逝去)했다.
모든 언론들이 정치 인생만 조명하는데,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지나치게 듣다보면 수다스러운 기분이 들고 공적(功績) 또한 작위적(作爲的)으로 느끼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의 유머를 한 대목 소개한다. 개그맨 심현섭씨가 김 전 대통령의 흉내로 한참 인기를 얻고 있었을 때, “저 사람 나 때문에 먹고 살면서 로열티도 한 푼 안주고 명절 때 과일 한 상자 안 보내더라.”
그리고 섭섭했던 건 부인 이 여사가 김 전 대통령이 병중에 생사를 드나들 때 기도한 내용이 “저 사람 살려 주십시오.”가 아니고 “모든 것을 하느님 뜻에 맡깁니다.”
유머가 풍부한 어른이라고 하던데 기억이 별로 안난다.
그런 면에서 정치적 공과(功過)도 중요하겠지만 김 전 대통령의 유머도 한번 조명해 봤으면...
생전에 유머가 귀했다면 그건 분명! 분명!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