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필자가 속한 기관에서 갈등조정과 관련한 두 개의 공개 사례발표가 있었다. 가족분야에서 이혼과 관련된 갈등조정사례와 여러 조직이 관련되어 있는 조직갈등 사례발표를 차례로 들었다. 하루종일 안타깝다는 생각과 함께 일상에서 우리가 상대방의 마음을 알기 위해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해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끼게 한 하루였다.
갈등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보면 서로가 피해자와 가해자가 되어 자신의 갈등에 대한 입장을 이야기한다. 당사자들은 갈등에 대한 피해자로서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이로 인한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한다. 그러나 갈등은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다. 단지 ‘이해당사자’만 있을 뿐이다. 피해사실과 가해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갈등조정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면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갈등조정의 ‘이해당사자’로서 만남을 갖게 된다. 갈등조정이 시작되면 다양한 경로를 거치며 이해당사자들이 갖고 있는 입장, 이해관계, 욕구등을 파악하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조정이 이뤄 진다. ‘입장’은 대부분 이해당사자가 내세우는 명분이다.
표면적인 갈등의 이유이기도 한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상대방에게 바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해관계’는 당사자들이 갈등을 통해 얻는 각각의 손실을 뜻하며, ‘욕구’는 당사자들이 원하는 가장 기본적인 측면이며 숨겨진 갈등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과정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볼(觀)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자신 주변에 대한 변화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 등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혼과 관련한 조정에 있어서 당사자 모두 존중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욕구가 한순간에 좌절되어 이혼에 이르기 보다는 살아오면서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좌절되는 경험을 겪으며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날 조정사례는 실패한 사례였는데 결국 이해당사자인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인정받고자 했지만 상대를 어떻게 존중하고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안보였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부부가 갖고 있는 원가족 즉 친정과 시댁에서 자라온 환경적 요인을 적절하게 끊어내어 독립된 부부로서의 체계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지나치게 종속 된 것도 갈등조정을 하는데 어려움으로 작용한 듯하다.
조직갈등의 사례는 한동안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어서 관심있게 지켜 보았는데 결국 조직 속에서 개인이 갖고 있는 인정과 안전에 대한 욕구가 침해되면서 일어났다.
여러 정황과 환경이 결합되어 갈등이 증폭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사건의 내용으로 보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하나 갈등조정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을 보자면 갈등과 관련된 당사자와 조직 모두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결국 두 사례를 보며 개인이건 조직이건 소통하려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과 소통을 하면서 일어나는 미묘한 내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인데 말 처럼 쉽지 않다. 마음을 본다(觀)는 것은 갈등을 역동의 힘으로 재창조 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이기도 하다.
역사의 과정에서도 무수히 많은 사회적 갈등을 역동으로 바꿔 시대를 창조해낸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최근의 우리 근현대사가 이를 말해 주기도 한다. 올해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을 보내 드리며 또 한 번의 역동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꿈꿔 본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관(觀)하는 나로부터 다시 출발한다.
대산주역강의 풍지관(風地觀)괘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땅위에 바람이 불면 모두 움직이고, 움직이면 보는 것이라. 본다는 것은 눈으로도 보고, 귀로도 보고, 코로도 보고, 입으로도 보고, 형이상적으로도 보고, 형이하적으로도 보고, 내적으로도 보고, 외적으로도 보고, 정신적으로도 보고 육체적으로도 보는 등 안보는 것이 없이 다 보는 것이다. 즉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는 들어보고, 코로는 맡아보고, 입으로는 먹어보고, 손으로는 만져보고, 발로는 디뎌보는 등 안 보는 것 없이 다 보고 있는 것, 이것이 관(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