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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 고당 조만식

이창식 주필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이 작고한지 올해로 59년째가 된다.

고당은 1883년 평양에서 아버지 경학(景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1908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 공부를 했고 1910년 메이지 명지(明治)대학 법학부에서 수학했다.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시작된 1913년 귀국하여 오산학교 교사로 교단에 섰다가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동교 교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교장에서 물러나 독립운동을 펼치다 평양 감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오산학교 교장에 복직했지만 그도 잠시 상정현교회 장로,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연정회 발기, 신간회 결성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했다. 1932년 조선일보 사장으로 언론 창달에 힘쓰고, 1943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면서 조선군 사령관 이다가키 세이시로(板恒征四郞)가 면담을 요청했지만 단호히 거절하는 바람에 구금 당했다. 광복이 되고 나서 평양으로 간 그는 평양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해 질서 유지와 국민 계도에 앞장 섰다. 이 때 소련 군정청이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했지만 거부했다. 그해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 반탁운동을 전개하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대동강변 내무성 정치보위부에서 한규만 소좌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당은 일제의 제국주위와 소련의 공산주의 모두를 배격하고, 오로지 조선의 남북 통일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신사(神社) 참배에 반대하던 1935년 무렵 조선 청년들에게 네가지 당부를 했었다. 첫째 생의 의식을 굳게 가져라. 둘째 절제생활을 하라. 셋째 직업을 가져라. 넷째 봉사에 충성하라였다. 어리석은 것 같으면서도 현철(賢哲)하게 살고, 허영과 향락은 붕정만리(鵬程萬里)의 전도가 있는 청년에게는 금물이며, 생활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되 직업을 갖기 위해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된다. 사회에 조금만한 공헌과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희생하여 봉사하되 남의 비웃음에 용기를 잃지 말라하였다. 어른 말씀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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