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게는 세 가지 자랑이 있었다.
첫째 남자로 태어난 것. 둘째 자유국가 아테네에 태어난 것. 셋째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은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이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여러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선생이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참스승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북주서(北周書)는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은 얻기 쉬워도 인격 수양을 가르치는 스승은 얻기 어렵다”라고 적고 있다.
우리 현대 교육사에서 김교신은 참스승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1901년 함남 함흥 사포리에서 태어나 1927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여자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양정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교단에 섰다. 어느날 한 학생이 시험 시간에 커닝하는 것을 본 그는 그 학생의 장래를 걱정하며 그 자리에서 흐느껴 울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학생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는 너의 고향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근면하다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했을 때 이에 따르지 않았고, 출석부를 읽을 때도 본디 성명을 조선말로 불렀는데 일본 배석장교가 이를 문제삼자 아예 출석부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 신자였지만 무교회주의자였다. 미국식 기독교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면 기독교인이 되기를 포기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그는 ‘조산산 기독교’를 주창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때 그는 양정을 떠나 송도고보로 옮겨갔다. 이 때 그는 ‘성서조선(聖書朝鮮)’ 158호에 ‘조와(弔蛙)’라는 제목의 권두언을 썼다. 추운 겨울에 모든 개구리가 죽은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몇 마리가 살아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애국자는 살아남는다는 뜻이었다. 필화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그는 1944년 흥남의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징용 당해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도 독립의 날을 기다렸는데 1945년 4월 발진티브스에 걸려 이승을 등지니 그의 나이 45세였다. 김교신은 참스승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