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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단상] 부끄러운 고백

 

용기를 내서 대단히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겠다. 몇 년 전 지금처럼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 저녁으로 온기(溫氣)가 그리워질 때 중국 정주(鄭州:소림사로 유명한 곳)로 출장을 갔다.

그 지역의 상당 수준에 있는 시인, 화가 등 문화인들이 열 명 가량 참석한 만찬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공식적인 자리여서 통역도 배석했다.

처음엔 말도 통하지 않아 데면데면 할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중국식 술잔이 여러번 왔다갔다 하고 또 그네들의 독특한 주법(酒法), 어두최빈(魚頭最賓)이라고 회전판을 돌려 물고기 머리가 향하는 사람이 술을 마셔야 한다고 열 잔 남짓 교묘하게 술을 먹이는 탓에 꽤나 취했다.

서먹함을 깨트리기 위해 무슨 말을 하긴 해야겠고 마침 식탁에 깔린 종이에 여백(餘白)이 있었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나라는 망했건만 산과 강은 여전하고), 감시화천루(感時花淺淚-세월의 변천을 느껴 꽃만 봐도 눈물 흘린다). 유명한 두보의 춘망(春望)을 그 잘 쓰는(?) 글씨로 써 내려갔다. 중국 사람들과 주석(酒席)을 함께 해 보라, 얼마나 시끄러운지. 환담(歡談)도 성량(聲量)만 갖고 문 밖에서 판단하면 싸움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좌중이 조용해졌다. 나의 유식(有識)함에 놀란 듯 했다. 좌장(座長)되는 사람이 “어떻게 우리의 시성(詩聖)이라고 일컫는 두보(杜甫)의 시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우연한 기회에 접했는데 마음에 와 닿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존경하는 의미로 영화에서 황제에게 전하는 머리 위로 잔을 높이 들고 술을 삼배(三拜) 권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시구인데 어쩌다 외웠을 뿐이다.

이미 술에 취해 절제와 겸손의 미덕은 저쯤 도망가고... “계절이 가을입니다.” 소동파(蘇東坡)가 말한 “오동잎 떨어지면 가을이 올 줄 알아야지...” 이 말을 통역이 전하니 좌중에 있는 사람 모두가 줄을 서서 술을 권했다. 두보에 이어 소동파까지 꺼냈으니 참으로 내가 유식한 사람으로 비춰졌나 보다. 좌중의 분위기가 한국에서 대단히 유식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 같은 그네들의 분위기에 우쭐해졌다.

평소 주량을 훨씬 넘겨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눈을 부릅뜨고 화장실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토했다. 그러나 또 다시 시작된 술자리에서 한국의 지식인으로 점잔을 빼느라 수준에 어울리도록 목소리도 낮추고 품위있게 행동하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그 뒤에도 분위기가 있는 자리에서는 “소동파가 말하길 오동잎 떨어지면...” 운운했는데 얼마나 멋진 말인가? 쿵하면 담 밖의 호박 떨어지는 소리인줄 알아야지, 이런 말과는 근본적으로 품격이 다르지 않는가. 그런데 어느 자리에서 당시(唐詩)를 전공한 J교수가 “소동파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지적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반박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소동파가 그런 말 한 것의 출전(出典)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근거를 찾기 위해 관련서적을 상당히 읽어 소동파의 매력을 새삼 느끼게 한 계기는 됐지만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 뒤 소동파나 오동잎,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약간 성격이 다를지 몰라도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말이 있다.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걱정도 그 만큼 많다는 말이다.

얼마전 청와대 인사를 두고 모 매체가 대대적인 가을국정 변화를 암시하면서 “오동잎 떨어지면 가을이 온 줄 알아야지.” 이런 말을 했는데, 소동파가 했든 말든 간에 이 말의 함의(含意)는 가을이 오면 지나간 따스한 계절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뜻이지, 커다란 변화 즉 앞으로 다가오는 겨울을 경계(警戒)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 멋진 표현을 정치와 연결시키는 건 좀 무리란 생각이 든다.

문학적 표현이 돋보이기 때문에 고사 성어(故事成語)나 이런 시구(詩句)를 인용하는 건 좋지만 딱 맞아 떨어지는 표현을 염려해야 하겠다. 왜? 오동잎 떨어지면 가을이 온 줄 알아야지, 이 멋진 말을 소동파가 했다고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분작없이 이 자리 저 자리에 떠들었을까? 어딘가 근거는 있을 텐데...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평생을 함께 해야 할 나의 부끄러움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소동파가 한 말이란 근거를 가르쳐 주신 분에게는 정말로 후사(厚謝)를 하고 싶다.

혹시나 소동파 운운한 나를 유식한 사람으로 간주했던 사람은 뒤늦게라도 빨리 그 생각을 거둬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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