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름에 대한 기억은 참으로 특이하다.
스쳐 지나간 사람의 이름도 평생 잊어버리지 않고 그 사람과 조그맣게 연관된 일이 있을 때 마다 뚜렷하게 떠오르는 경우도 있는 반면, 아무리 유명한 사람의 성명도 중간과 끝을 바꿔 부르는 경우도 있다.
‘나 돌아가리라, 소풍 마치는 날 돌아가서 재미있었노라...’ 저 유명한 귀천(歸天)의 시인 천상병(千祥炳)을 조심하지 않으면, 천병상으로 바꾸어 불러 주위 사람들로부터 핀잔을 받는다.
천상병, 천상병 하면서 외워보지만 정작 말할 때는 천병상으로...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가까운 친구중에 병상이란 이름이 있긴 한데...
양치상씨, 얼굴도 힐끗 본 적 밖에 없으니 그 사람도 나를 기억할리 만무하지만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얼마전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종합우승을 했다는 낭보와 함께 양치상이란 이름 석자가 또렷하게 떠올려지는 것 아닌가. 1968년 국제기능올림픽 대회 때 양복 부분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다.
당시만 해도 그 해 열린 멕시코 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사람은 한명도 없었고, 겨우 복싱에서 지영주 선수가 은메달을 따서 국민들의 영웅으로 등장했지만 TV가 많이 보급되지 않은 실정이라 경기장면이 중계되지 않았기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때는 스포츠 올림픽에서 메달 가망성이 없으니 신문에는 온통 기능올림픽이 관심의 대상이 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공업입국(工業立國) 슬로건을 내걸어 공고(工高)학생들을 우대했는데 지금의 특목고등학교(特目高等學校)보다 훨씬 입학경쟁이 치열했다.
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사람에게는 훈장증(勳章證)과 함께 병역(兵役)혜택도 주워졌는데 카퍼레이드에 출신학교는 그 영광을 현수막으로 알리는 등 요즘의 올림픽 금메달 선수 못지 않게 대접했다.
양치상씨를 얼핏 본 건 대구의 동성로(서울로 치면 명동)에서 세련된 무개차가 아닌 군용지프 뚜껑을 벗긴 지프차 위에서 목에 꽃다발을 걸고 만면에 웃음을 띠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면서 카퍼레이드를 할 때 훌쩍 지나친 게 인연의 전부이다.
그 뒤 사회생활을 할 때 지방에서 가장 중앙통(中央通)에 양치상 양복점, 그리고 옆에 기능올림픽 금메달 수상, 이렇게 간판이 붙어 있었지만 마음은 굴뚝 같아도 원체 유명하고 고급스럽고 비싼집이라고 소문이 나 양복 맞출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양치상씨에 대해 수소문을 해 보았더니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었고 또 시인(詩人)으로도 등단(登壇)했다고 한다.
아직도 현업에서 활약하고 있다는데 50년 전통을 자랑하면서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품격있는 신사복을 만드는 곳이라고 주위의 찬사를 받고 있단다.
참으로 기뻤다. 따로 교육없이 외할아버지 밑에서 동냥으로 배운 양복기술을 밤새도록 독학(獨學)했단다.
기능올림픽 금메달을 따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산업훈장증과 격려금을 받았는데 그 격려금이 보통액수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것을 종자돈으로 양복점을 개업했는데 최정상을 달렸지만 만족하지 않고 독일로 유학을 가고... 자기 관리를 참 잘한 사람이다. 어쨌든 그는 한 분야의 장인이다.
장(匠)이란 말을 풀이하면 궁리나 가르침을 뜻한다.
결국 장인이란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속담에 ‘장어요리 장인이 되는데 4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껍질 벗기는데 십년, 꼬치 꼽는데 십년, 양념장 바르는데 십년, 굽는데 십년. 얄밉지만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요즘 기능올림픽 종합우승도 옛날처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어 앞으로 종합우승이 힘들다는 예측도 있다.
카퍼레이드, 병역 특례는 커녕 조간신문 한 귀퉁이에 단체로 찍은 사진 한 장이 전부다.
25차례 참가해서 16번 종합우승의 기록은 좀처럼 깨뜨리기 힘든, 기능강국(機能强國)의 표상(表象)이다.
산업화가 끝나고 다들 먹고 살만해졌는지 기능인들이 흘린 땀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일수록 제2, 제3의 양치상씨가 계속 나와야 하는데... 아무리 비싸더라도 맏이 놈 장가 갈 때는 양치상씨를 찾아 양복 한 벌을 해 볼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