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현장이나 갈등 당사자들을 만나면서 매번 느끼는 것들이 있다.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갈등 당사자가 실제로 처한 상황과 원하는 것이 다르거나 혹은 폭이 클수록 갈등의 정도가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갈등조정이라 하는 것은 각각의 이해당사자가 갖고 있는 현실과 바라는 바를 적절하게 조리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갈등 당사자들은 부부를 비롯한 가족일 수도 있고 개인 간의 관계와 이를 뛰어넘는 조직의 모습일 수도 있으며 좀 더 확장해보자면 사회구성 집단 간의 사회적 갈등의 형태를 보이기도 하며,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 있다면 국제적인 갈등의 형태로 이름지워진다.
이렇게 보면 개개인은 크고 작은 갈등과 관련되어 있으며 어떤 것은 피를 말리는 긴박한 사안으로 주체적인 대응을 하는가 하면 어떤 것은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개인 혹은 자신이 소속해 있는 조직이나 집단, 국가 임에도 불구하고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당사자들이 생각하는 내·외적 편차는 입장, 이해관계, 욕구 등의 이름으로 분리되어지며 분석되어진다.
천양지차로 갈라진 다양한 갈등 사안들은 이해관계에서 실리의 접점을 찾게 되며,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사표현을 드러내 서로의 명분을 갖게 되며, 욕구를 통해서는 내면의 감정과 감성을 추스르는 과정을 얻게 된다.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때 가장 이상적인 조정이라 하며 해원의 마음까지 얻었다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는 조정을 넘어 갈등을 통한 치료(?)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새로운 질적 변화를 이루어 냈다는 의미이며 기존 삶의 방식에서 좀 더 진화된 형태의 방식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동안 가정법원의 상담위원 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여러 쌍의 부부들을 보면 ‘협의이혼’ 과정에 오기까지, 부부가 겪었어야 하는 갈등은 온 몸과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곤 했다.
경직되어 있는 몸은 지쳐있고 얼굴 근육은 필요 이상의 움직임이 없다. 몇 마디의 예상된 질문과 대답이 오고가는 사이 심리적인 위안의 말이 건네어지면 대부분의 남성이든 여성이든 눈물을 흘리며 매우 힘겨웠음을 호소한다.
호소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원망이나 비난,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며 후회스럽다는 말로 마무리 하지만 가장 힘겨워 한 것은 자신의 감정을 이해받거나 위로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현재 내가 불편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하느냐를 반문한다.
이러한 내용은 조직에서나 집단에서도 마찬가지의 반응들을 보인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으로 들어가 보는 연습의 과정을 거쳐 보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상대방을 다시 보게 되는 기회를 얻는다.
윈-윈의 상생관계는 아니더라도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느껴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타인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의 과정이며, 이는 자신이 갖고 있는 실상(實像)과 허상(虛像)이 여실히 드러나는 기회이기도 하다.
본디 모습을 드러내는 실상과 실제와는 다르게 보이는 모습의 허상은 어쩌면 각자가 만들어낸 이미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각자는 깨닫는 바가 있게 되며 상대에 대해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갈등의 시점에 서 있다. ‘오늘 저녁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지극히 가벼운 갈등부터 죽고 싶을 만큼의 삶의 무게에 이르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다.
해원의 마음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를 한다면 상당 부분의 갈등은 해소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갈등에 대한 실상과 허상의 괴리가 크다는 것이다.
최근의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내가 갖고 있는 실상과 허상은 다시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얼마전 영면하신 김대중 대통령 묘소에 대한 훼손의 보도는 우리 사회 갈등의 실상과 허상이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만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르는 불교적 용어인 ‘실상(實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도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