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 박은식(1859-1925)이 타계한지 84년째가 된다. 그는 애국계몽가, 언론인, 민족사학가, 교육가, 독립운동가로서 일제강점기 내내 나라와 겨레를 위해 구국운동을 펼친 애국투사였다. 그는 서당 훈장 박용호의 아들로 황해도에서 태어났는데 일명 박인식이다.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할 때는 박기정, 태백광노(太白狂奴) 또는 무치생(無恥生)이란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70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것도 남다르다.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고, 한성사범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황성신문사 사장 등을 지내면서 민족항일운둥에 앞장섰다.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최남선과 더불어 서울 삼각동 광문회에서 역사 서술에 힘썼는데 ‘동명왕실기’, ‘조선고대사고’, ‘명림답부전’,‘몽배금태조’ 등이 그 시절에 쓴 저서였다. 박은식의 큰 업적 중 하나는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저술이다. ‘한국통사’는 모두 3편 114장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1864년 고종 즉위부터 1910년 한일합방 전후의 105인 사건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25년 3월 이승만 임정 대통령의 탄핵면직을 계기로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된 그는 정치 개혁에 앞장 섰다. 그는 일련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운동 세력의 통합을 주장했다. 박은식은 대통령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옷차림이 검소했다. 당시 중국 돈으로 1원(元) 안팎의 회색 두루마기에 몇 각(角)짜리 호신(胡靴)를 신고 다녔다. 하루는 임정 청사로 들어가는데 경비원이 “여기는 당신같은 시골 영감이 출입하는 곳이 아니다”라며 길을 막았다. 그제서야 백암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청사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시는 것도 서민적이었다. 술은 1각 남짓한 배갈, 안주는 땅콩이나 센차이(소금에 저린 배추쪼가리)가 전부였다. 워낙 술을 좋아해 집무실에는 늘 술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술을 마시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망국의 한을 달랠길이 없어서 택한 방편이었다. 그는 국무령체제 개헌이 확정되자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925년 11월 1일 영면하니 그의 나이 6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