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비 내리는 날/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리 들어 보렴/···중략.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느냐마는/왠지 한 곳에 비어 있는/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중견가수 최백호씨의 히트곡 ‘낭만에 대하여’ 가사중 일부분이다. 평일은 웬만하면 밤 11시 전에 잠을 자려고 노력하지만 일요일은 12시를 넘긴다. 70·80년대 스무살 무렵의 처녀총각이었던 선남선녀들을 위한 프로그램 ‘콘서트 7080’이 방송되기 때문이다.
11시 반쯤 프로그램이 끝나지만 옛날 청순하던 가수에게서 세월의 흔적이 흘러간 뚜렷한 얼굴로 열창하거나,혹시 노랫말이 가슴에 와 닿는 것 이라도 있으면 뭔가 뚜렷하지 않은 과거를 회상하느라 약간 멍한 상태로 12시를 넘기게 된다.
며칠전 이 프로그램에 최백호씨가 출연했다. 분명히 웃는 눈인데 우수에 차 있고 우수에 차 있지만 웃는 눈이다.
웃음 또한 활짝이 아니고 슬쩍, 씩 웃는다. 분위기도 닮았다. “아마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가 젊은 날과 차츰 멀어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시절이 아쉬워서 일겁니다.” 띄엄띄엄 말하는 최백호씨의 멘트도 가슴에 와 닿았다.
맞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구나. 제스처는 참 멋없다. 뻣뻣하게 서서 빠른 박자의 노래에도 기껏 반주에 맞춰 박수를 치는 게 고작이지만 고음은 고음대로, 노래는 빠른 대로 척척 부르는 걸 보면 가창력이야 말로 최고였다.
낭만가객(浪漫歌客)이란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노래 잘 한다는 나훈아, 조용필씨가 있지만 지그시 눈을 감고 진지하게 마음을 담아서 부르는 가수는 단연 최백호라고 할 수 있다. 가수들은 대부분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이번은 ○○노래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이런 멘트를 하는데 이 말은 약간 시혜적(施惠的)인 의미다.
최백호씨는 노래가 끝나면 양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45도 경례를 절도 있게 소위 공무원식 인사를 한다. “노래를 부르게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잘 못 부르는 노래라도 반응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겸손의 느낌을 받는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의 금도(襟度)를 느낀다.
그날 밤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2절 후렴을 나도 몰래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정말로 위스키 한잔이 생각났다.
그러나 이미 당뇨주의 판정을 받은 신세라 먹다 남은 위스키 한잔,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냉장고 문은 열지 못했다.
서글펐다. 사위(四圍)가 깜깜해진 아파트, 눈 아래 적막(寂寞)한 공간을 보면서 왠지 쓸쓸하고 허전하고 아쉬웠던 감정에 그 노래가 끼친 영향이 컸던 모양이다.
그 이튿날 하루 종일 남들이 듣지 않게 최백호의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최근에 사귄 친구가 있다. 참 깔끔하다. 머리도 기름을 발라 곧게 넘기고...(40대부터 염색을 했다고 한다) 감색양복에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구두도 항상 윤이 난다. 그 친구 차에 동승할 기회가 있었는데 차 안에 음악을 켜자 클래식이 흘렀다. 모차르트까지는 괜찮았는데 베토벤은 좀 무거웠다. 그 친구 내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으면서 손으로 박자를 맞추는 게 아닌가? 솔직히 그땐 수준이 외모와 비슷하게 상당히 높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고급문화의 대칭(對稱)은(들어내 놓고 저급문화라고 표현할 수 없으니) 대중문화라고 부른다.
고급문화를 선호하는 사람은 대중문화가 고급문화의 수준을 저해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취향에 따라 문화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나는 최백호씨 때문에 음악은 대중문화 쪽으로 기울어 졌다.
그리고 주위에서 염색을 많이 권유 받지만 꾸미지 않기로 했다.
그날 저녁 최백호씨의 CD를 구하려고 했더니 주문해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7080이다. 낭만(浪漫)이란 영어로 하면 로맨티시즘(romanticism)이지만 한자로 ‘낭’은 방자하는 뜻이고 ‘만’은 넘쳐 흐른다는 의미다. 젊을 때는 방자함이 조금 넘쳐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