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신문의 어떤 면을 관심 있게 보는지 직업에 따라 제각기 다를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면(政治面)을, 사업하는 사람들은 경제면(經濟面)을 보는 것, 당연하다. 그런데 특이한 분이 있다.
전 직장의 상사의 인연으로 사형(師兄, 나이나 학덕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으로 마음속으로 모시는 분인데……. 가장 곰곰 하게 살펴보는 것이 신문의 부음(訃音)란이다. 가끔, 누구누구 상주 된 것 알고 있제?, 이런 전화 덕분에 큰 결례를 피한 적도 있는데…….
45년생이고 보면, 친구들 대부분이 완전한 은퇴를 했지만, 넓은 교제의 폭(幅)(흔히들 발이 넓다고 표현한다)과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인품으로 모 회사의 고문격의 회장을 맡고 있다. “혈육의 정인들” 이렇게 쓴 연하장을 주셔서 지금도 귀하게 간직하고 있다.
당연히 회장실은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오다가다 들르는 사람이 많아 서울 무교동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중에 돌아가시면, “대학 시절 가정교사를 했으니 교육계 그리고 기자를 했으니 언론계, 방송국의 사장을 하셨으니 경제계 -. 하여간 묘비 뒤편 경력란이 빽빽하겠습니다.”
이렇게 우스개를 드리면, “한 가지도 옳게 하는 것이 없는데......” 하시면서 계면쩍어 한다. (사실 정계(政界)에서도 몇 번 은밀한 유혹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요즘 들어, 부쩍 “하는 일도 없는데 회사에서 과분한 것 같아”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 그 말씀에는 동의 할 수 없다. 그냥 그림자처럼 버티고 계시는 것 만해도 그게 어딘데…….하여간 당신 스스로 부음(訃音)란에 관심을 갖는 이유인 즉, “상주가 되면 황망해지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알아서 챙기는 수밖에 없다.”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경조사비도 인플레 되어 고만고만한 사이라도 일금 오만원은 손이 오그라들고 또, 예측 할 수 없는 교통 사정 때문에 반나절은 버려야 한다.
그것뿐인가? 휴일이 갖는 복장의 자유 - 그러나 어두운 색의 양복과 넥타이. 구색을 맞추어야 한다.
어찌됐든 사람의 도리(道理)를 골고루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지난 주 지인(知人)이 등산길에서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들었다.
체구도 크고, 모든 운동도 즐기고, 또 생각도 지극히 상식적인 친구였는데……. 왕복 7시간이 넘는 문상 길을 다녀왔다.
상주가 나를 모를 것 같아 망자(亡者)와 인연을 소개했는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 어디어디에 계신다면서요?”
우리 아이는 돌아가신 분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내가 그를 생각했던 것 보다 그가 나를 훨씬 가깝게 생각했나보다.
나이도 동갑이고 보니……. 내 스스로도 남의 일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우리도 죽음이란 벌레가 슬슬 발등에서 기어오르고 있다. 얼마나 빨리 움직이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 상갓집 술판이야 허튼 소리만 난무하지만 그 소리가 명치(鳩尾)를 쳤다. 유언(遺言)도 지금부터 슬슬 준비하란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범한 자세! 지극히 맞는 말이지만, 현인(賢人)인 척 하는 그 친구가 별로였다.
어쨌든 신문의 부음란을 보면, 미루어 짐작하는 삶의 형태도 천양각색이겠지만, 삶의 마감에 대한 느낌도 천 가지 만 가지!
상주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보기 좋고, 더구나 안 상주까지 직업과 직책이 그럴듯하면, 좀 더 사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지만 높은 자리, 명망(名望) 있던 사람도 유가족으로 미망인 한분만 달랑 계시면 측은한 생각이 든다.
수많은 만장, 넘치는 조객 - 이런 것 또한 모든 것이 사사망념, 관념적 소유일터인데 법정(法頂) 스님의 기준으로는 회초리를 맞을 뿐이다.
멋진 유언을 슬슬 준비하라고 했지만 원체 보잘 것 없는 자신인지라 엄두를 내는 것조차 사치일 뿐…….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리고 기행(奇行)으로 유명했던 걸레 스님 중광께서는, “에이, 괜히 왔다가네” 개그우먼 김미화 氏 는 “웃다가, 자빠졌다.”개성 있는 유언이다.
세계를 제폐하려던 알렉산더 대왕은 “죽어서 내 누울 곳 한 평이거늘, 왜 이처럼 많은 적을 그리고 수많은 길을 달려왔던가?”법정 스님의 말씀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