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1864~1921)선생이 을사늑약을 규탄하며 황성신문에 쓴 반일 사설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전한다. 위암이 격분한 나머지 술에 취해 글의 끝을 맺지 못한 것을 유근이라는 분이 마무리했다는 것.
용인 출신으로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대종교(大倧敎) 지도자로 언론과 교육 사업에 투신했던 석농 유근선생이 바로 그 분이다. 지금은 신문기자 사회의 음주문화가 예전에 비해 많이 순화된 감이 없지 않으나 기자하면 으레 술을 연상할 만큼 가히 경음(鯨飮) 수준으로 치기어린 ‘무애행(無碍行)’을 당연시(?) 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위암의 통음을 불경스럽게 이에 빗대 격하시키려는 의도는 없다. 여기서는 다만 기자와 술의 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적어도 지사적인 기개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뜻을 펼침에 있어 아마 신문이 시작되면서부터 기자와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지 않았나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해볼 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民間紙)인 독립신문의 진갑(進甲)을 맞아 1957년 신문의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제정한지 어느덧 53년이 흘렀다. 신문의 날이 제정되면서 신문윤리강령이 선포됐는데 당시의 신문칼럼을 보면 신문윤리강령에 ‘기자는 술을 먹지 말아야한다’는 조항이 없으니 무엇보다 환영한다는 논평이 있어 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최근의 시들이 가슴에서 터져 나오지 않고 머리에서 짜여 나오는 것은 술꾼 시인이 줄어든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고은(高銀) 시인의 말이다. 선배는 후배에게 술을 권하고 싶은데 예전만 못한 것 같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신문기사도 독자를 우울하게 하는 건조한 기사보다는 감동과 재미를 주는 기사가 분명 대세다. 비록 술을 강요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기자라면 적어도 문사(文士)의 반열인데 고은의 탄식은 한번쯤 음미해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