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생활하는 사람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휴일 목욕탕에서 어슬렁거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흔히 목욕탕에서 부자(父子), 조손(祖孫) 끼리 등을 밀어주는 흐뭇한 장면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는데……. 이 처럼 아름다운 풍경마저 요즘 사라져 간다.
아들이 아버지 등을 밀면서,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네가 먼저 말해라.”, “MP3신형(新型)을 사주 세요.”
“잠시 의무적(義務的) 노동에 비해 너무 과한 걸 요구하는구나.”,“옵션으로 성적 5명 재낄게요.”,“흥정을 잘하니 나중에 상대(商大) 지원해라.”약간 각색을 했지만 꽤나 재미있었다. 그리고 흐뭇했다.
그런데 매사 어휘에 까다로운지라, “흥정”이란 말이 마음속에 남았다. 사전을 찾아보는 등, 호들갑을 떨었는데 흥정이라고 하면,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상담(相談)을 하는 저자거리 용어인데, 이 대목에서는 협상(協商)이란 말이 어울릴 것 같다. 지원학과도 상대보다는 정치외교학과(政治外交學科) 이런 것이 어울릴 듯 하고…….
협상과 흥정 -. 사실 협상이든 흥정이든 별로 산뜻한 단어는 아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협상하면 남북협상, 임금협상, 야권통합협상, 뭔가 이면(裏面)이 있는 듯, 어두운 단어…….
협상이란 개인이든 국가든 반드시 필요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처럼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지?
밀치고 당기고, 얼굴을 붉히고, 위로하고, 비방하고, 변명하고, 자리를 박차고, 말리고……. 그 과정이 정(正)과 반(反), 순탄치 않아서일까? 따지고 보면 우리는 눈을 뜨고, 잠 잘 때까지 무수한 협상을 통해서 숨 쉬고 있다. 손쉬운 예를 든다.
며칠 술자리로 귀가 시간이 늦었을 때, 일차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그것도 수용이 안 될 때, 내일 부터는 일찍 들어온다는 약속, 그것도 아내가 양에 차지 않는 표정을 하면 지키지 못할 금주(禁酒) 약속! 마지막으로는 지갑을 열든가, 약속을 어긴 만큼의 보상을 선물로 대신한다.
대수롭지 않는 협상마저 귀찮아했을 때, 아내는 분명 사십이 넘으면 스스로 우울증(憂鬱症)이라고 진단하고……. 심리적 행패를 부릴 수도 있으니 협상을 귀찮거나 두려워 마시길. 자칫,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된다.
협상을 치사하게 보지 말아야 한다.
우연히, 이갑용(전 민주노총위원장, 오산동구청장)이란 분이 쓴, “길은 복잡하지 않다.”에서 협상의 기술이란 대목에 이런 말이 있다.
이기는 법! 첫째, 기죽으면 안 된다. 상대방의 기를 꺾어라. 둘째, 막무가내로(책에는 무대뽀란 표현을 했음) 일관하라. 셋째, 붉은 머리띠를 매라. 넷째, 상대방에게 유리한 발언은 절대 하지 마라. 협상에는 참고 될 만할지 몰라도, 아내들이 읽어선 안 될 쓸데없는 병법(兵法)이 많이 적혀있다. 대원군이 외국 사신들로부터 조선을 개방하는 회담 자리에서, 장죽을 재를 터는 것처럼 놋쇠 재떨이에 땅땅 두드려서 상대방의 기를 죽여 - 장죽(長竹)을 Negotiation pipe(협상용 파이프)라고 했다나 ―.어쨌든 협상이 끝나면, 공통된 점이 있다. 죽일 듯 으르렁대던 과정은 모두 잊고, 조인서(調印書)를 양 끝에 한 자락씩 쥐고 이빨을 드러내고, “치즈” -. 기념 촬영을 한 후, 차 한 잔을 마시면서도, 결과가 상대방의 양보에 의한 것임이 아니고 아군의 “살신성인” 탓이라고 주장한다.
“회사 측의 아량에 우리는 모두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기로 했다.”
“노조 측의 양보를 사측에서는 무한한 감사로 느끼며......” 이런 상대방의 입장을 높이 사야 과정이야 어찌됐든 양반스럽고 향기 나는 조직(組織)이 아닐까?
양보란 곧 이해란 말과 동의어! 기대의 일치점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에 협상의 기술은 애당초 필요 없는 것인지 모른다.
네가 양보한 만큼, 나도 양보할 수 있지만, 네가 양보하지 않으면 나도 양보할 수 없다……. 이것은 흥정이지 협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렵게 말 할 필요 없다. 세상 어디도 찾아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법도 있으니까! 하여간 우리는 살아가면서 대수롭지 않는 장소에서도 교훈을 얻고, 배운다. 목욕탕에서 얻은 교훈은, 흥정은 협상보다 저급(低級)이란 사실.인생, 도처에 배움터가 많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