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까이 하면서도, 그 가치를 못 느끼고 허술하게 대접하거나, 가볍게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쓸데없는 것으로 방치했던 물건이 TV의 진품명품(眞品名品)에서 매우 가치 있다는 것으로 감정(鑑定) 받을 때, 혹시 우리 집엔… 하면서 쑥스러운 기분으로 새삼 둘러보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는다. 십 수 년 전에 천한봉(千漢鳳) 선생이란 분으로부터 사발 하나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전혀 기교도 없이 투박한 막사발인데 처음에는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을 모아두다가, 떨어뜨려서 개밥을 주는데 사용했다. 옹기야 유약을 칠해서 사면이 곱지만, 투박하고 볼품없는 막사발은 개밥 주는데 제격이었다.
그 뒤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천 선생께서 다기(茶器)와 다완(茶碗)을 몇 번 보내 주셨는데 커피에 익숙하고, 녹차(綠茶)의 가치를 잘 모르는 무식한(無識閑)(?) 이어서, 받자마자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받은 이로부터, “이 귀한 것을…” 이런 인사를 들었지만 예의상 하는 말로 간주하고, 아까워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천한봉 선생은 대한민국 도예 명장(陶藝 明匠)으로 일본 동경(東京)에서 일 년에 한 번 전시회가 열리면, 모두 거래된다고 하니…. 특히 예술성 높은 작품으로 다완 하나에 한국 돈으로 백만 원 가까이 팔린다고 하니….그때서야 얼마나 나의 무모한 인심이 후회가 되던지…. 돈도 물론이지만 소장(所藏)했더라면 가보(家寶)로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있었을 텐데….커피에 익숙한 사람은 막사발이 필요도 없다. 커피 잔에 막걸 리가 안 어울리듯, 막사발에 커피를 타면, 우선 표면이 매끄럽지 않아 스푼으로 저을 때 마다 달그락 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색깔도 흡사 한약…. 나쁜 말로 하면 사약(賜藥)처럼 보인다.어찌됐든 그 후, 천 선생 댁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입이 벌어졌다. 문경 주흘산(主屹山) 밑에, 한식과 양식을 겸비한 엄청나게 멋진 저택 안에 세련된 전시장에는 세계 각국의 국가 원수(元首)와 찍은 사진이 즐비했다. 청와대에서 외국 귀빈(貴賓)이 오면, 가장 한국의 정서가 담긴 선물로 천 선생의 막사발을 선물한단다.
일본에서도 막사발은 이도차완(井戶茶碗)이라고 해서 국보로 대접받는데, 일본의 오사카성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가치 있게 취급받는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다도(茶道)를 즐겼다고 하는데 다도에 찻잔이 빠질 수 없는 법 - 임진왜란의 목적이 한국의 도공들을 납치하기 위해 일으킨 도자기 전쟁(陶瓷器戰爭)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토록 귀한 막사발을 개밥그릇으로 사용했으니…. 무식함이 극치에 이른다.
며칠 전, 귀한 분을 만났다. 김용문 선생이라고 홍익대에서 공예를 전공하고 삼십년 도예에 미친(?) 분이다. 나이 육십이 멀지 않은 그가 꽁지머리를 하고 개량한복을 입고 나타났는데 건너 받은 책 제목이 “나는 막사발이다.” (부제 도예가 김용문의 막사발 실크로드)몇 년 전에 스쳐 지나간 적이 있는데, 차 한 잔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산에서 열리는 세계 막사발 장작 가마 축제를 12년 동안 계속해 왔는데 예술 일념으로 살아 온 표시가 입성 그리고 신발에 누덕누덕 나타났다.
곤궁하겠지만 표정은 밝았고, 눈빛은 형형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천진스러움이 가득 찼다. 그날 집에서 책을 한 번도 놓지 않고 단숨에 읽었는데, 기교(技巧) 없는 자작시(自作詩)도 마음에 와 닿았다.
마음 하나 다스리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태어나기도 힘이 들지만인생을 마감하기란 더욱 어려 웁니다.그리하여 현실로 살아가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김용문의 ‘마음 하나 다스리기가’
책에서 읽은 가치 있는 상식을 독자들에게 소개할까한다. 도자기의 몸통을 두드려서 둔탁한 소리가 나는 것은 고온(高溫)에 완전히 익지 않았다는 증거! 이런 그릇을 쓰면 나쁜 곰팡이가 번식하기 때문에 이 그릇에 매일 차를 마시면 나쁜 균을 마시는 꼴이라고 한다. 두주불사(斗酒不辭)라는데…. 작품 때문에 술을 삼가고 있다고 한다. 가까운 시일 안에 천한봉, 김용문 그리고 막사발에 대한 무식을 안주삼아 술자리로 유혹(誘惑)할까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정열을 부럽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배워야겠다. 경기도 오산에 이런 멋진 분이 있었구나. 나는 눈 뜬 봉사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