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경기도지사 당선자는 평균 4시간의 수면을 하며 24박 25일의 강행군을 펼친 끝에 민선 5기 경기도지사 재선에 성공했다.
“정책은 교과서에 없다. 보고서에도 없다. ‘현장’은 살아있는 보고서이며 교과서다”라고 말하며 유난히 현장을 강조했던 ‘현장 도지사’답게 김 도지사 당선자는 선거 유세 역시 철저하게 민생 현장에서 듣고, 말하고, 먹고, 잠자며 무려 ‘24박 25일’의 민박 선거 유세를 펼쳤다.
명실상부한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운동가였던 김문수, 사회주의 붕괴를 지켜보며 한계를 뛰어넘어 보수 세력의 한 복판으로 용감히 뛰어든 김문수.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 김문수, 그의 살아온 길을 되짚어 본다.
▲ ‘문중의 별’에서 제적당한 ‘운동권 수배자’로.
김문수 당선자는 1951년 경북 영천 임고면의 한 촌락에서 태어났다.
김문수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영천군 부동의 1등으로 경주 김씨 ‘문중의 별’로 떠올랐지만 가난한 집안형편으로 인해 진학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실력과 가능성을 알아본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진학, 가난한 유학생활이나마 이어갈 수 있었다.
경북고교 시절 김문수는 대구지역 연대 서클이었던 수양동우회에서 사회의식을 키우며 소위 ‘3선 개헌 반대’를 주도했다. 경찰 조사를 받던 김문수는 뜻을 굽히지 않고 3선 개헌 반대의 정당성을 주장하다 정학을 받기도 했다.
서울대 경영학과 재학 시절 김문수는 사회과학동아리인 ‘후진국사회연구회’에 가입, 길고 긴 운동권 인생을 시작하게 됐고 끝내 제적됐다.
제적과 투옥, 복학을 거듭하면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든 결과 25년 만에야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됐다.
▲ 노동자들 속으로.
김문수가 노동운동을 하게 된 것은 김근태, 당시 민청학련 의장의 주선으로 구로공단에 취직하면서 시작됐다. 한일 공업에 보일러공으로 취직해 6년을 근무하며 노동운동을 펼치던 중 그는 출근길에 사복형사에게 영장도 없이 악명 높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했다.
구사일생으로 다시 돌아온 김문수는 일주일간 파업을 전개, 임금 30% 인상을 쟁취하며 완벽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노동운동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어 이후 일신제강, 부산파이프, 대원전기, YKK 등 유명 기업들의 파업을 지원하면서 금속노조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김문수는 수배자가 됐고 갈곳 없던 김문수가 몸을 숨긴 곳이 세진전자 노조지부장을 지냈던 지금의 부인 설난영 여사의 자취방이었다.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청춘남녀는 한결 가까워졌다.
그는 “만인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사람인데 한 여자를 못 살리겠느냐”는 프로포즈로 설 여사의 마음을 사로잡아 1981년 9월 26일, 웨딩드레스도 없는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결혼 후에도 김문수는 노동자복지협의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대우어패럴 노조 등 노동 현장에 깊숙이 개입하고 직선제 개헌투쟁을 주도하다 86년 주안역 앞에서 보안사에 붙잡혀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 내 이름은 ‘김결식’.
88년 10월 개천절 특사로 나온 김문수는 장기표 등과 함께 민중당을 결성했지만 민중당은 92년 선거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하고 겨우 1% 지지에 그쳐 결국 해산된다.
그러던 중 96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당이던 민주자유당이 공천 물갈이와 함께 각계의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김문수에게도 기회가 왔고 경기 부천 소사에 공천을 받아 김문수는 당시 ‘DJ 대변인’ 박지원 후보를 상대로 싸워야했다.
가시밭길이었지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천 소사의 구석구석을 다닌 결과 결국 선거 3일을 앞두고 지지율은 역전, 마침내 1천680표 차이로 당선돼 15대부터 17대까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0년 연속 베스트 의원으로 뽑히기도 한 김문수는 특히 학교 급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학교 급식 법을 세 번이나 고쳐가며 급식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힘썼다. 결식아동 급식 예산을 삭감하려하자 김문수가 추경 예산안을 조율 중이던 3당 총무회담을 박차고 들어가 “밥 굶는 아이들에게 왜 밥을 주지 않는가. 아이들이 유권자가 아니라고 이래도 되는 거냐”며 거칠게 항의해 이후 김문수는 ‘김결식 의원’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 핸들 잡은 ‘김기사’, ‘GTX’와 ‘무한복지’ 꿈꾸다.
민선 4기 경기도 지사로서 김문수는 이른바 ‘김문수 스타일’로 불리는 ‘현장도지사 ’로 유명하다.
김문수의 못 말리는 ‘현장사랑’은 마침내 그를 ‘김지사’에서 ‘김기사’로 변신하게 했다. 1년 동안 보통 택시 기사와 똑같은 조건에서 택시 영업을 시작해 하루12시간씩 총 18번 운행하는 동안 26개 시군을 넘나들며 400여명의 경기도민을 만났다.
김문수가 택시 운전석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정책 구상의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대표적인 정책이 GTX 즉, 수도권 광역 급행 철도 건설이다. 최고 시속 200K㎞로 지하 40m 이하를 뚫어 일산에서 강남까지 22분, 강남에서 동탄까지 18분 만에 돌파하는 GTX는 경기도의 끝과 끝을 1시간 안에 이동할 수 있는 수도권 교통 혁명으로 평가된다.
김문수는 ‘김결식’이라는 별명답게 복지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 복지지원정책부문에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한 ‘위기가정 무한돌봄사업’을 내놓기도 했다.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민간차원의 복지 인프라와 연계한 수혜자 중심의 ‘위기가정 무한돌봄 사업’은 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