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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 무령왕릉

이해덕 논설위원

가루베 지온(輕邊慈恩)이란 몹쓸 일본인이 하나 있었다. 1924년 조선에 와 공주고보의 일본어 교사로 일하면서 백제 고분을 제 멋대로 도굴한 작자였다. 1933년 송산리 6호분을 송두리째 파먹었을 만큼 악질적인 도굴꾼이었던 가루베는 1945년 일제패망과 함께 무수한 백제유물을 싣고 일본으로 돌아가 백제통을 자처하다 1970년에 죽었다.

1971년 7월 5일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던 한 인부의 삽이 백제 무령왕릉의 벽돌 모서리에 부딪혔다. 그렇게 단 한 번의 도굴도 없이 처녀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무령왕릉은 가루베가 도굴한 송산리 6호분에서 불과 10m도 안 된 지점에서 발견됐다.

가루베가 죽은 지 1년 후에 왕릉이 발견된 것은 후안무치한 범죄자에게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무령왕의 의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틀 뒤인 7월 7일. 김원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한 발굴단은 이튿날(7월 8일) 무덤의 문을 열기로 하고 대기하던 중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호우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발굴소식을 듣고 몰려든 기자들은 발굴단을 밀치고 들어가 유물들을 밟으며 사진을 찍어댔다. 발굴단원들은 쓰레받기와 빗자루를 동원해 소중한 유물들을 쓸어 담기에 바빴다.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무령왕릉 발굴은 한국 고고학 역사상 최대의 성과이자,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유물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실측도면 하나 없고, 유물에 묻어 있는 미생물 분석도 하지 못한 졸속의 극치를 보여준 것이다. 김원룡 관장은 두고두고 이를 자책했다.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은 108종 2천906점에 달하며 이 유물 중 상당수가 국보로 지정됐다.

무령왕릉을 나와 금강을 바라보며 공산성(公山城)을 오른다. 영은사(靈隱寺) 오솔길을 돌아 왕궁 터로 추정되는 쌍수정(雙樹亭)에 이르러 잠시 백제를 생각한다. ‘승자의 기록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역사로 남고, 패자의 기록은 달빛에 바래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적어도 백제의 경우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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