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시대를 일컬어 말의 홍수시대라고 말한다. 각종 가스와 매연으로 환경이 오염되고 공해가 생기는 것보다 무책임한 말, 언어의 남발로 인해 세상은 질식할 만큼 오염돼 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 집단이나 사회, 넓게는 한 국가에 있어서 정신적 신뢰성의 부재현상은 곧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의 혼란을 통해 드러난다. 이것은 굳이 학문적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익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말은 많은데 진실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고, 웅변은 화려한데 설득력이 없고, 토론은 많은데 시원한 해답이 없고, 약속은 많은데 끝내 신뢰성을 찾기 힘든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 사회에서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진심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대화의 장은 마련돼 있어도 서로의 깊은 의식 속에 숨겨놓은 이기적인 욕심의 벽을 허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라 하겠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숨겨진 이기적인 이해타산 집단과 집단 간의 상충된 이해로 인한 갈등의 벽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 한 화려한 웅변도 기지에 찬 설득도 정의로운 부르짖음도 허공을 향한 메아리에 불과해서 서로의 가슴에 응어리진 감정을 풀 수 없을 것이고 애정에 찬 신뢰로 회복하기 힘들 것이다.
언어를 이용한 의사소통은 채널에 따라 일방적이거나, 쌍방향 혹은 다중 방향으로 다양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현재의 언어가 그 본래의 기능인 의사소통으로서의 역할을 올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원인은 대화의 일방적 횡포에 그 이유가 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우리사회의 각 분야는 서구문명의 영향을 받아 많은 발전을 이룩하면서도 개인 간 혹은 개인과 집단 간의 냉정하고 합리적인 토론 훈련을 쌓아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시(是)와 비(非)를 이성적 토론을 통해 거쳐 가려내고, 찬반의 뜻을 외부의 요인에 구애 받지 않는 등 양심에 따라 표하고 나와 다른 뜻을 가진 사람의 의사를 존중 하지 않는 풍토가 조성돼 왔다.
나와 뜻이 다르면 적이 되는 극심한 흑백 논리가 만연하고 그 결과 한편에서는 일방적인 훈계나 지시, 또 다른 한쪽에서는 마녀 사냥과 같이 집단으로 성토하는 풍토가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편견과 자만심으로 가득 찬 오늘 날의 허울과 편견의 늪을 헤치고 진실의 알맹이를 헤아릴 수 있는 건실한 비판력을 기르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돼진다. 더불어 남의 눈 속의 티끌만 볼 것이 아니라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볼 수 있는 균형 잡힌 비판적 안목을 세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현대인은 조용히 사색, 명상하며 기도하는 등의 침묵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천박한 생각과 얕은꾀, 의미 없는 잔소리만 늘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속담은 말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선조들의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의미 없이 쏟아놓는 말보다는 무언(無言)이 향기롭고,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할 바에야 아예 말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돼 진다.
표현력과 발표력으로 지식의 척도가 측정되는 요즘, 말을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말을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 말을 잘한다는 것이 말을 올바르게 제대로 사용한다는 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말의 적절한 구사는 단지 다양한 표현력으로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라 농도 짙은 말을 아껴서 하는 것이라고 본다.
진정으로 올바른 말의 사용은, 많고 많은 단어 중 상황에 부합하는 적절한 어휘를 선택해 본인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명확히 표현하고, 그 안에 현실성을 담고 있을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 말은 소통하기 위한 기본적 수단이자 방법이고, 적절한 의사소통은 본인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일방적인 의사소통이 아닌 옳은 주장을 존중할 줄 알고 인정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의사소통은 서로에 대한 경우와 기본적인 예의가 지켜져야 하고, 자신과 집단의 이해를 떠나서 옳은 것은 옳다고 인정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옳은 것에 대한 존중’ 은 모두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기본이자 미덕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