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으로 3년. 이 말을 들으면 시집살이가 극심했던 우리 어머니 세대의 애환(哀歡)이 떠올라 가슴이 한없이 저미는 것이 여간 애처롭지 않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한다. 세월을 축낼 수 있는 골 깊은 주름진 생각이다. 현실을 저항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관례적 폭력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그렇다. 정말 야만적이지 않은가? 무차별적 폭력으로 조직의 신경망들이 벌벌 떨고 있다. 아니 억압에 짓눌린 감정이 아닌 솟구치는 분노를 짓누르려 하니 감각들이 일제히 솜털구멍에서 경기(驚氣)를 한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그 폭력적인 힘의 위세에 눌려있지만 아직은 대항할 때가 아니므로 참아야 한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 경구(警句) 한 구절을 입으로 수십 번 반추하다가 머릿속에 저장한다. 그런데 그냥 머릿속에 관념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사르르 중추신경으로 이동해 뼛속 깊숙이 자리한다. 머릿속에 저장돼 있으면 지우기도 쉽고 재생도 가능한데, 뼛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니 지울 수도 없고 꺼낼 수도 없이 인두로 각인돼 있다. 관념 속에선 잊은 듯 하지만 뼛속 신경망은 반사적으로 기억의 회로를 작동시켜 재인시켜준다. 뼈 깎는 듯이 여간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벙어리로 산다. ‘바이블’엔 하느님 말씀으로 세상이 이뤄졌다는 구절이 나온다. 언어는 인간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말을 통해 의사소통 하는데 그리하여 자아가 타인과 관계를 유지하고 그 유지하는 가운데 인간존재가 확연히 드러나기 마련인데 참고 살아가라니, 가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비밀은 그런 연유로 생겨나는지 모른다. 풍자문학이 한 시대를 풍미(風靡)하는 것도 위력적인 시대임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귀머거리로 산다는 것도 양심 속에서 갈등을 유발한다. 들었으나 못 들은 것으로 하려는 이 또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가 무서운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 세상에 커다란 재앙이 예상되는데 위세(威勢)에 눌려 귀를 막고 있는 것은 필경 인륜상 못할 짓이다.
시각장애인으로 사는 것 또한 고통을 수반한다. 공자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면 지그시 못 본척했다는데 그렇게 외면해야 하는 마음 또한 오죽 답답했겠는가? 그러나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못 본 척 하는 행동도 명분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력의 시대에 개인의 신념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죽음을 초개(草芥)처럼 버리는 ‘사즉생’이라는 가치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어렵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선택의 갈림길은 21세기 민주사회에서도 존재하고 있다. 이는 필경 사회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우리들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집단무의식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의 역사적 궤적은 폭발적이면서도 중용적 태도를 꾸준히 선호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진춘석 시인
▲ 1992년 시문학 등단 ▲ 한국문인협회 회원 ▲ (사)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장(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