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詩經) ‘소아(小雅)’편에 ‘밭두렁에 오이가 있는데 절여서 조상님께 바치세’라는 구절이 있다. 바로 오이지다. 물론 시경에 나오는 오이는 지금 우리가 먹는 오이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지금의 오이는 시경이 편찬된 훨씬 후인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동아시아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한나라 때 외교관인 장건(張騫)이 서역에서 오이를 가져와 퍼뜨린 걸로 나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경에 나오는 오이는 동아시아에서 토종으로 자라는 참외 종류였을 것이다.
광주(光州) 신창동에서 발굴된 기원전 1세기경 유적에서 오이씨가 발견된 것은, 오이가 전래된 시기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앞당기거나 오이가 대륙을 통하지 않고 해로(海路)를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보면 ‘염지’라 하여 ‘무를 소금에 절인 음식을 겨울 내내 반찬으로 삼았다’는 글이 나온다. 여기서 ‘지’는 ‘물에 담근다’는 뜻이다. 김치란 이름은 이 ‘지’가 고려말기에 ‘저(菹)’로 변하여 쓰이다가, 조선 초기에 ‘딤채’가 되고, 구개음화(口蓋音化)로 인해 ‘김채’에서 지금의 ‘김치’가 됐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김치는 소금물에 담그거나 마늘, 회향(茴香) 등의 향신료를 섞는 정도에 그쳤으나 이것이 18세기 조선 광해군 때 고추가 전래되기 시작하면서 붉어지게 됐다. 그러고 보면 오이지가 김치의 원형이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여름철에 자칫 잃기 쉬운 식욕을 북돋워주는데 그만인 오이지의 역사는 이렇게 뿌리가 깊다. 그중에서도 전통적으로 맛있다고 소문난 오이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최영년(崔永年)은 ‘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 ‘용인 오이지’를 조선의 음식명물로 꼽았다. 그러나 용인 오이지는 이보다 앞선 조선 순조 때 빙허삿(憑虛閣) 이 씨가 쓴 여성백과사전인 ‘규합총서(閨閤叢書)’는 물론 1766년에 나온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0’에도 나올 만큼 연조가 꽤 있는 전통음식이다.
이 때문일까. 용인시 남사면 진목리 순지마을은 오이로 유명하다. 1967년부터 작목반을 조직해 오이를 생산해 왔다고 하는데 오이 재배기술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며 자부심이 아주 대단하다. /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