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0~70년대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호지명(胡志明)’은 ‘김일성’만큼이나 나쁜 ‘월맹(越盟)의 악질 빨갱이 괴수’였다. 인간의 본질과는 상관 없이 이데올로기라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재단한 결과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에게 호지명, 아니 호치민(1890~1969)은 영원한 ‘엉클 호(호 아저씨)’다. 그만큼 친근한 존재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창설자인 호치민은 베트남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 뒤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공산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교사에서 공산주의 혁명가로 일관된 삶을 살며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는 호치민에게는 보 구엔 지압(Vo Nguyen Giap, 武元甲)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지압은 호치민과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종지부를 찍는 데 결정적 전기가 된 디엔비엔푸 전투(1954년)를 승리로 이끈 베트남 전쟁영웅이다. 호치민이 베트남의 독립 항쟁 지도자였다면 실제 전쟁의 대부분은 지압이 치러냈다. 지압은 호치민에 비해서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그를 20세기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으로 높게 평가한다. 미국이 당한 최초이자 유일한 패배는 베트남 전쟁이다. 미군이 이라크 전쟁에서 가급적 지상전을 피한 이유도 베트남 전쟁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베트남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 미국 측 병력은 183만에 달했다. 반면 북베트남의 월맹 군대는 52만명으로 화력 또한 두말할 것도 없이 열세였다. 하지만 월맹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베트남을 통일했다. 이 전쟁의 중심에도 역시 지압이 있었다.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한 지압의 전략을 가리켜 흔히 ‘3불(不) 전략’이라고 말한다. “적들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았고, 그들이 싸우고 싶어 하는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지 않았으며,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싸웠다.”‘회피·우회·혁파 전략’이다.
이 베트남 전쟁영웅이 지난 25일 100세 생일을 맞았다. ‘살아있는 전설’인 셈이다. 그에 대한 베트남 국민들의 존경심도 각별해서 일거수일투족이 연일 기사화 될 정도다. 그러니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던 맥아더의 말은 지압만큼은 예외인 듯도 싶다.
/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