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 같던 비가 새벽에 그쳤다. 서둘러 아내와 성묘 길에 나섰다. 애들이 외국에 나가 있어 이번 추석에는 우리 둘뿐이다.
이른 아침부터 차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들녁은 노란빛이 감돌고 길가의 코스모스는 가을을 재촉한다. 벌써 공원묘원에는 성묘객들로 장마당을 이루었다.
성묘를 끝냈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차머리를 서해(西海)쪽으로 돌렸다. 고속도로에는 꼬리를 문 자동차들이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작은 포구, 홍원 항에는 수족관 마다 은빛 전어가 여유롭고, 고삐 묶인 어선들이 휴가 중이다.
등대 끝, 쪽빛바다를 붉게 물들이다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낙조를 즐기며 한가한 추석을 보낸다. 내가 어렸을 적, 추석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음력 8월이 시작되면 할머니는 커다란 독에 막걸리부터 가득 담그시고 장을 보러 다니셨다.
초사흘쯤에는 친척들이 모여 곳곳에 흩어져있는 산소에 벌초를 하러 간다. 나도 어른들을 따라 포푸라가 줄지은, 자갈투성이 신작로와 벼가 키만큼 자란 논두렁길을 종일 걸었다.
‘이제 다 컸다’는 어른들 말씀에 다리가 아파도 내색하지 못하고 억새풀에 손을 베이며 힘들게 산길도 올랐다. 벼이삭 사이를 뛰노는 메뚜기를 잡기도, 익어 가는 감나무, 밤나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였다.
친척 형들이 여름 내 무성해진 풀을 베었고, 아버지는 윗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점심때면, 주막집 가마솥에 끓고 있던, 국밥을 포식하고 쉬어가기도 했다. 벼이삭은 영글고 허수아비는 새떼를 쫒느라 바쁘다. 수확 전, 들에는 풍요가 넘친다.
추석 날, 일찍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에게 큰절을 드린 후 가까운 산소에 간다.
들길에는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산소에 오가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산소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추석 인사를 하기위해 마을 사람들이 오기 시작한다.
손님들에게는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나도 친척 형들을 따라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드리려 다녔다. 추석날 저녁이면 온 동네 남자들은 취해 있고, 여자들은 지쳐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자신의 조상이나 뿌리에 대해 알려고도, 흥미도 없다. 겨우 부모, 조부모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옛날에는 6촌, 8촌, 10촌까지도 명절이나 벌초, 제사, 시사(時祀) 때마다 만났고 일가로서 남다른 유대감을 가졌는데, 지금은 사촌도 남과 같다.
산업화와 더불어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고 시골에는 노인들뿐이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인구는 줄어들고 농토는 묵히거나 기업농에게 몰리게 된다.
앞으로는 귀성보다는 연휴를 보내는 사람들로 붐비게 될 것이다. 민족의 미풍양속인 추석은 점차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단순한 공휴일이 돼 가고 있다.
춘장대 톨게이트로 들어서자, 어둠이 짖게 내려앉은 상행선에는 무수한 라이트들이 멈춰 있다. 이번 추석에는 3천만 명이 이동 한다고 한다. 교통방송은 전국 곳곳의 정체를 알리고 있다.
/김용순 시인
▲ 월간 한국수필 등단 ▲ 한국문인협회 회원 ▲ 가평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