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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수원사람들] 11. 수원 화성

수원 화성(華城). 110만 수원시민은 물론 화성, 오산 등 수원권과 경기도민의 절대 자랑거리 중의 하나.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km의 성곽으로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됐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살아있는 역사.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물론 젖먹이 아이까지 20여년만에 되살아난 수원천과 함께 생활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삶의 동반자. 수원사람들은 화성과 함께 태어나 화성을 놀이터로 유소년시절을 보내며, 청년시절 꿈과 희망을 틔우고 또 화성너머로 지는 낙조를 보며 인생을 마무리한다는 절대 가치. 빛나는 신록 속에 생생이 살아있는 수원 화성을 살펴보자.
 

 

 

 

 




수원 화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 정조대왕. 조선 후기 민족 중흥의 새 역사를 썼던 군주인 정조의 효심이 축성이 근본이 된 수원 화성. 어디 그뿐이랴. 조선을 갉아먹은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이자 ‘위민사상’의 새로운 구현을 위한 ‘수도’이자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탄생한 꿈의 도시의 출발점이 바로 수원 화성이다.

1794년에 역사적인 착공에 들어가 정조대왕의 전폭적인 지원속에 1796년 9월 10일 준공된 수원 화성은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 대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를 택했다.

실학자 정약용과 유형원이 설계를 하고, 좌의정 채제공의 주관 아래 화성유수 조심태 등이 공사를 진행해 성을 쌓은 후,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등의 건물을 지었다.

성곽을 석재와 벽돌을 섞어 쌓은 점, 거중기와 녹로 등 새로운 기기를 사용한 점, 화살과 창검, 총포 등을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등에서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당대 최고의 건축물로 평가 받고 있는 동시에 우리나라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수원 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다. 이후 1975~1979년까지 “화성성역의궤”에 의거,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천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 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다.

또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다.

수원 화성의 특성 중 가장 빛나는 것은 철학적 논쟁 대신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 화성을 쌓기 위한 정조대왕의 집념은 각별했다.

정조대왕은 효심과 정치개혁 등을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을 쌓았다.

그런만큼 수원 백성들을 위한 여러 조치 역시 파격적이었다.

수원의 새로운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으로 옮기면서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驛站),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 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눠 준 것은 물론이고, 수원부에 감금된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중에 있는 이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또 화성유수부와 인근 백성들의 지세(地稅)와 부역을 감면하고, 환곡과 군포를 탕감하거나 감축시켰다. 임금이 주최하는 각종 연회에 초대하고 문ㆍ무과 별도 과거를 통해 지역 인재 등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을 시행했다.

정조대왕은 수원 화성을 축성하면서 수원의 밑그림을 제대로 그렸다. 국비 6만5천냥이라는 거금을 수원 백성들에게 빌려 주면서 공업과 상업을 촉진, 18세기 말 대도회·상업 도시 수원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수원 화성과 한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왕이 만든 시장’ 팔달문 시장도 그렇게 탄생했다.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수원 화성은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고, 지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수원 화성이 수원 사람들에게 각별한 건 이것만이 아니다. 지금은 1년 365일 내내 수원 화성을 따라 걷는 수많은 사람들을 밤낮으로 만날 수 있지만, 그 뒤에 감춰진 수원 사람들의 노력과 자긍심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수원 사람들은 수원 화성과 함께 숨쉬고 추억을 만들고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히 여긴다.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 그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만나지는 수원 화성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가는 한 해를 마무리 하고 오는 새해를 맞이 하기 위한 그해 첫 시작과 마무리도 수원 화성에서 열리고, 봄날 흐드러지게 핀 오색의 꽃들이 장식하는 수원을 지켜보기 위해 또 수원 화성을 걷는다.

여름 소나기와 함께 독립운동의 첫 기운이 핀 방화수류정 아래 도도히 흐르는 수원천을 지켜보는 일을 행복이라 여기고, 사계절 내내 수원 화성 곳곳에서 문화예술과 사랑·꿈·희망을 함께 나눈다.

바야흐로 수원 화성 전성시대다. 계절의 여왕 5월, 그 소중한 수원 화성을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걸어보는 것 더 이상 미루기엔 시간이 없다. 이제 수원 화성을 걸어보자.*자료제공=수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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