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90년대 학번의 말랑말랑했던 감성을 상징하는 노래로 쓰였다. 80년대 끝자락에 대학교를 다닌 나에겐 1989년에 발표된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가 그랬다. 이 노래에서 첫사랑과 경춘선을 타고 떠났던 춘천 데이트를 아련하게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듯 하다. 특히 서울과 수도권에서 20대를 보낸 이들에게는 말이다. 오월의 내 사랑이 숨쉬는 곳… 안개의 도시 춘천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춘천은 무작정 열차에 올라 멍하니 생각에 잠기던 아픈 청춘들에게도 묘한 치유의 힘을 지닌 도시였다.
봄, 가을이면 경춘선 열차는 대학생들을 잔뜩 태우고 달렸다. 대성리, 가평, 강촌 등 대표적인 MT촌들이 경춘선을 따라 자리해 있었고, 별처럼 총총 박힌 추억들에 줄을 대는 경춘선 열차는 그래서 ‘추억과 낭만의 기차’로 기억되어 왔다. 2010년 12월, 경춘선 복선 전철화 사업이 완료되며, 경춘선 열차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은 영원한 추억이 되었다. 1939년 개통된 경춘선은 아름다운 경춘가도를 따라 달리는 구간이 많아 풍경을 만끽하기에 좋았었다.
구불구불 산과 강을 끼고 돌던 철길은 산 아래로 뚫은 터널을 통과하며 직선으로 변신했고, 세모 지붕을 한 조그마한 간이역은 새로 지은 현대적인 역사 한 귀퉁이에 퇴물처럼 물러앉았다. 경춘선의 복선 전철화 소식을 처음 들었던 당시, ‘속도’가 미덕인 세상에 살면서도 ‘춘천 가는 시간이 단축된다’는 기쁨보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앞섰던 것은 나 또한 그런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름이 성큼 다가온 5월, 오랜만에 춘천을 향했다. ‘춘천 가는 기차’의 추억을 고이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성북에서 출발하는 춘천행 전철 대신 자동차를 택했다. 목적지는 김유정역 인근의 ‘실레마을’. 소설 <봄봄>, <동백꽃>, <금 따는 콩밭> 등 교과서에 소개된 주옥 같은 한국문학의 무대이자,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이다. 김유정역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인명을 역 이름으로 사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걷기여행 열풍이 전국을 강타한 이후, 춘천권에도 걷기 좋은 길들이 많이 생겼다. 춘천8경 중 1경인 구곡폭포를 끼고 도는 ‘물깨말구구리길’, 당림초등학교에서 신숭겸 장군 묘역으로 이어지는 ‘석파령 너미길, 푸른 의암호를 끼고 도는 의암호나들길’, 소양강의 수로와 육로로 연결된 소양호 나루터길 등이 대표적이다. 김유정의 문학작품을 곱씹으며 걷는 ‘실레이야기길’도 춘천권을 대표하는 걷기코스 중 하나다.
김유정의 대표작 <동백꽃>의 무대가 된 동백숲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따뜻한 지방에서 숲을 이루는 동백나무는 금병산 자락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혹은 ‘산동백’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김유정의 소설에 등장하는 ‘동백꽃’은 ‘생강나무 꽃’인 것이다. “닭 죽은 건 염려마라. 내 안 이를테니”라 꼬시며 점순이가 주인공 ‘나’를 쓰러뜨린 그 숲엔 ‘노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에 오르면 금병산에 둘러싸여 마치 옴폭한 떡시루를 연상시키는 실레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파동 치듯 흐르는 산세, 옹기종기 자리한 집들, 마을 앞으로 지나는 경춘선…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김유정의 소설을 따라 홀린 듯 올라온 금병산을 다시 내려가는 길, 아직도 풀어놓을 이야기가 많은지, 산길은 구비구비 이어진다. 김유정역에서 춘천까지는 전철로 2정거장 거리. 마을 안에도 막국수, 닭갈비 간판이 간간히 있긴 하지만, 이곳을 여행할 때는 조금 특별한 ‘여행 속 여행’을 계획해보는 것이 어떨까? 김유정역까지 자동차로 이동했다면, 역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전철로 춘천 시내를 구경하는 맛이란!! 경춘선 열차가 사라지고 춘천의 풍경도 많이 변화한 듯 보이지만, 연인들의 데이트코스였던 공지천과 중도, 골목 가득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던 닭갈비 골목들은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건재하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해발 652미터의 금병산 정상에 도전해봐도 좋다. 봄봄길, 동백꽃길, 금 따는 콩밭길, 만무방길, 산골나그네길 등 김유정의 작품 이름을 딴 등산로에는 잊지 못할 ‘봄의 추억’이 그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