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력 좋고, 기술도 뛰어난 선수와 복싱게임이 붙었다. 한참이나 싸우고 난후 심판판정이 내려졌다. 이겼다고 손을 들어주니 좋아해야 하는데, 마음이 찜찜하다. 졌다는 상대가 부은 얼굴로 웃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승리한 내 얼굴이 상대선수의 얼굴보다 더욱 일그러져 있어서만도 아니다. 심판이 이겼다고 내 손을 들어주면서 날린 멘트가 문제다. 시합에서 진 상대선수에게 “너는 시합에서 졌다고 공식인정해야 한다”면서도 “너는 우수한데 실력없는 애하고 싸웠다”고 판정한 기분이 든다.
지금 삼성전자의 기분이 이럴 것 같다. 애플사와 9개국에서 30여건의 소송전쟁을 치루고 있는 삼성이 지난 주말 영국법원에서 의미있는 승리를 거뒀다. 영국법원은 삼성전자의 ‘갤럭시 탭’관련 재판에서 “삼성측이 애플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요지의 판결을 내놓았다. 이어 법원은 애플 측에게 “삼성전자가 갤럭시 탭을 만드는 과정에서 애플의 아이패드 디자인을 모방하지 않았다는 판결 내용을 홈페이지와 영국 신문매체 공지란 등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야한다”고 명령했다.
어찌 보면 삼성의 완벽한 승리같이 보이는 이 판결의 찜찜함은 판결문 후미에 붙은 “삼성제품이 쿨(Cool)하지 못하다”는 표현이 발단이다. 아니 삼성의 손을 들어주면서 애플 제품만큼 쿨하지 못해서 모방이 아니라는 말은 아무리 곱씹어도 찜찜하다. 일부에서는 영국식 유머라느니, 애플을 비꼬는 표현이라느니 하는 해석을 내놓지만 말이라는게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아닌가. 승리한 선수에게 “너는 진 선수만큼 훌륭하지 못해서 이긴거야”라는 비논리적 야유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가뜩이나 세계 곳곳에서 사활을 건 소송전을 전개중인 삼성측의 입장에서는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을 듯 하다. 특허소송이라는 것이 워낙 민감해 자칫 패착을 두면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회사의 존망이 걸리거나 최소한 소송결과에 따라 한 쪽은 엄청난 출혈이 예상되는 민감함 때문에 국민들의 관심도 높다. 무엇보다 삼성은 한국의 대표기업이고 애플 또한 미국이 자랑하는 글로벌 기업이어서 국가적 자존심도 걸려 있다.
처음 애플이 삼성에 선전포고를 했을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공룡들이 사활을 건 싸움은 피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데 현재는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 어느 쪽이던 약한 모습을 보이면 시장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농후해 일방적 화해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와중에 찜찜한 판결내용은 향후 소송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