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백남준은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다. 시대를 한걸음 앞서 살았던 그의 작품은 난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행과 비범한 퍼포먼스로 존재감을 알렸지만 결국은 예술성을 공인받았다. 그의 기행과 난해한 작품들이 탄탄한 시대정신과 작가의 통찰력, 그리고 미래를 읽어내는 탁월한 능력에서 비롯됐기에 가능했다.
지금도 ‘백남준’하면 떠오르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고, 여성의 나신(裸身)을 연주하는 이미지는 독일유학 시절부터 형상화됐다. 독일에서도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로 불렸던 그는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라는 작품에서 피아노를 박살내는 퍼모먼스를 선보였다. 백남준이 우리 국민들에게 기억되는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그의 작품 때문이다. TV 수백대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번뜩이는 천재성보다는 그가 그동안 실행해온 다양한 퍼포먼스나 작품들과 맥을 잇고 있다. 그가 처음 TV에 주목한 것은 아직 TV가 전세계의 가정에 보급되기 전인 1960년대 초반이다. 이미 1963년 그의 첫 번째 전시회에서 13대의 TV를 실험적으로 연계한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을 내놓았던 것이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에도 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인 소니사의 포타팩으로 미국 뉴욕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한 후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하는 선도적 미래상을 보여줬다. 이것이 바로 미술사도 공인한 비디오 아트의 시작이다. 백남준은 이후 ‘TV 부처’, ‘TV 정원’, ‘TV 물고기’ 등등 많은 대표작을 선보였다.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그를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렸다. 백남준은 2006년 75세의 나이로 숨질 때까지 세계 각국의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의 초청으로 강렬한 그의 작품세계를 알렸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1993년 그가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청돼 일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라는 작품을 주목한다. 이작품은 예술분야뿐 아니라 이후 고어 미국 부통령 등 산업, 경제계에도 강한 영감을 줬다고 본다. 전자고속도로를 이용한 네트워크, 즉 오늘날과 같은 네티즌으로 국적이 통일되는 세상을 그가 이미 보았다고 확신한다. 세상을 앞서 가며 신의 영역을 엿봤던 백남준의 작품들이 경기도에 모여 있다. 경기도가 지난 2003년 여타 지자체와 치열한 경쟁 끝에 용인시에 유치했는데, 현재에는 찾는 발걸음이 없어 삭막하다. 이 여름, 아이들의 손을 잡고 시대의 거인을 만나러 가는 것도 좋은 피서법이다.
/김진호 편집이사·인천편집경영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