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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오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새누리당 제18대 대선 후보자 지명 전당대회’에서 후보자로 공식 지명된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의 학창시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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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박 후보는 지난 2007년 한나라당 시절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해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패했다. 그가 유력 정당의 대권후보로서 야당 주자와 승부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 후보는 올해 만 60세다.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에 힙입어 정치에 입문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5선 의원을 거치며 고수해온 ‘원칙·신뢰’를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대권 재수에 나서게 됐다. 만약 이번 도전에 성공할 경우 건국 이후 첫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父女)가 국가 최고지도자가 되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박 후보의 앞날은 험로를 예고하고 있다.
■ 18년간 ‘영애·퍼스트레이디’ 18년간의 칩거 ‘파란만장’ 개인사= ‘인간 박근혜’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박 후보는 1952년 2월 군인인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 사이의 2녀1남 중 장녀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2년 뒤인 1963년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청와대에 들어가 ‘영애’의 생활을 시작한다.
1974년 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그는 그해 8월15일 어머니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에 급거 귀국, 약관 22살의 나이에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이후 1979년 10·26 사태로 아버지를 잃을 때까지 5년여간 퍼스트레이디 대행은 계속됐다.
박 후보는 10·26 이후 권력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와중에 1980년 18년간 머물렀던 청와대를 떠났다. 이후 성북동 자택 등에서 무려 18년간 사실상 칩거해 왔다.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영남대 이사장 등을 맡아온 시기다.
■ 1998년 정치권 등장, 2007년 경선패배→‘대세론’으로 부활= 18년간의 ‘칩거’ 후 46세인 지난 1998년 4월 대구 달성에서 치러진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2000년에는 총재 경선에서 이회창 전 총재에 이어 2위로 부총재로 당선됐다.
2001년 상향식 공천, 당권·대권 분리 등을 골자로 한 ‘7대 당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이때 북한을 방문,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북 철도연결’ 등을 논의했다. 2002년 복당한 박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 등으로 풍전등화 위기에 처했던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로 배수진을 쳤다. 이어 치러진 4·15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싹쓸이 예상을 뒤엎고 121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국회의원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완승을 이끌어냈다. 잇단 선거 승리를 계기로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2007년에는 첫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했지만 깨끗한 승복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 이후 40% 안팎의 높은 지지율로 이른바 ‘대세론’을 형성, 당내 친박계의 정점에서 이명박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는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홍준표 대표가 사퇴하면서 비대위원장으로 취임, 2012년 4·11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152석을 차지하는 대역전승을 거두며 당의 유력 대권주자로 입지를 굳혔다.
■ ‘역사관 논란·불통 이미지’ 극복이 과제= 박 후보는 현 정부 내내 여권내 사실상 유일한 대권후보로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정치인으로서 국민에게 한 약속은 지킨다’는 신뢰와 원칙의 이미지와 준비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쌓아온 것이 ‘대세론’이 흔들리지 않는데 결정적인 자산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대권을 거머쥘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부호다. 5·16논란과 같이 아버지와 관련한 과거사 인식이 국민들의 눈높이에 부합하지 않는 등 전체적인 이미지가 ‘과거’에 닿아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 후보는 2007년 경선 당시 5·16에 대해 ‘구국의 혁명’으로고 규정해 논란을 낳았고 지난 7월에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입장을 밝혀 비판을 자초했다. 결국 박 후보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한계를 떨쳐버리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소통의 문제도 줄곧 따라다니는 약점으로 꼽힌다. 세종시 원안고수 등으로 원칙론자의 이미지가 주변에 각인된 측면에 더해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측근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줄기차게 ‘불통의 정치인’이라는 공격을 받아왔다.
비대위원장을 맡아 총선을 승리로 이끈 뒤 친박(친박근혜)계 인사들이 당의 주요 포스트를 사실상 싹쓸이하면서 ‘사당화 논란’도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의 사례다.
수도권과 중도층 그리고 20~40대 젊은층에 취약하다는 점도 고민되는 대목이다. 2007년 당내 경선에 이어 이번 경선에서도 상대 후보들이 제기했던 고 최태민 목사와의 관계 등 사생활에 대한 명쾌한 설명도 대선 과정에서 풀어야 할 과제다.